1.
유년 시절. 엄마는 형제 중 나한테만 못 먹게 한 음식이 많았다. 핫도그 호떡 떡볶이 고구마 옥수수 떡 아이스크림 팥빙수 그런 것들. 언니와 동생은 하나 더 사주면서 나한테는 왜 반 개만 주는지 왜 나만 먹지 말라는 건지. 서운하고 억울했다. 더 먹고 싶은데 다 먹고 싶은데 그걸 막는 엄마와 수도 없이 실랑이를 벌였던 일이 떠오른다. 몰래 먹다 걸리면 크게 야단을 맞거나 와구와구 먹고 나면 언제나 급체하고 설사하고 탈이 나서 엄마 손을 붙잡고 동네 주치의 의원에 가고 한의원에 가고 그랬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방바닥에 배를 대고 누워있으려면 엄마는 깜짝 놀라 배를 따뜻하게 하라며 혼을 냈다. 엄마가 떠주는 따뜻한 보리차에 죽을 먹으며 아픈 속을 달랬던 나날. 엄마는 부어오른 내 배를 손으로 살살 어루만져 주셨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나를 내려다보며 조곤조곤 타일렀다.
넌 다른 애들과 달라. 수술받고 약 많이 먹어서 배가 약하니까. 남들처럼 똑같이 먹으면 안 돼.
만성 위장질환자가 되고 보니 어린 시절 어머니가 왜 그리 나를 단속했었는지 뼛속들이 이해 간다. 어느 어미가 세상 맛난 모든 걸 제 자식에게 먹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먹으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들 이해할 수 없는 어린애를 달래고 달래며 매번 실랑이를 벌여야 했던 어미의 마음. 유달리 잔병치레가 심했던 아이를 돌봐야 했던 그 마음이.
2.
나는 어머니의 약한 위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지금도 위하수와 위무력증으로 고생하신다. 다행히도 평생 술과 담배 커피는 모르고 사신 분이다. 당신은 맵고 짜게 먹고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위장병에 시달리신다. 타고난 거다. 어머니를 보면 내 노년이 보인다. 조심성 없이 겁 없이 산 나는 아마 더 심각할 것이다.
배를 차게 두지 마라.
찬 우유 콜라 먹지 마라.
밤에 뭐 먹지 말아라.
먹고 바로 눕지 말아라.
찬밥 먹지 마라 체한다.
과식하지 마라.
음식은 언제나 데워서 따뜻할 때 먹어라.
고구마 옥수수 팥 떡 빵 라면 같은 밀가루 많이 먹지 말아라.
밥 꼭꼭 씹어 천천히 먹어라.
급할 때 화날 때 밥 먹지 말아라.
이 모든 말은 당신의 경험에서 당신이 고통을 겪었기에 나온 이야기였다. 어릴 적부터 내가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들었던 소리. 이래라저래라 하는 어머니의 그 모든 말을 잔소리로 여겼는데 이제야 곱씹게 된다. 나이 들수록 제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대로 체질에 맞게 살지 않으면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노화란 그런 것이다. 잘 늙으려면 자기에게 맞게 타고난 대로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 남들과는 달리 생각하고 달리 살면서 왜 식습관은 하나도 달라지지 못했을까 깊이 반성한다.
3.
위장병이 도졌다 하니 주변에서 이런저런 걸 먹어보라 조언을 준다. 고맙기 그지없다. 그러나 사람마다 체질과 기질이 다르고 저마다 병증이 또 다르다. 자신에게 잘 맞는 음식이 효험을 본 재료가 남에게도 똑같다는 법은 없다. 제 몸에 맞는 것은 자신이 찾아야 한다.
왜 위장장애가 심각해졌을까 내 밥상이 뭐가 문제였을까 찬찬히 들여다봤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냉수 한 컵.
따뜻한 물 한 잔도 아니고 내가 미쳤지.
몸에 좋다고 현미 잡곡밥.
위장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현미는 백미보다 나쁘다.
밥 먹고 나서 커피. 작업하기 전 카푸치노 한잔, 작업 중에 에스프레소, 믹스 커피 한 잔.
블랙커피가 속 쓰려 우유 타서 먹었는데 우유 단백질은 더 소화가 안 된다.
차가운 맥주와 발효 와인.
위산이 콸콸 수도꼭지 밸브가 터져 물이 새는 꼴.
근육 만든다고 단백질 파우더.
유청 단백질로 만든 근육강화제는 약한 위장에 급기야 기름을 부었다.
헬리코박터균 때문이 아닌가 검사받아보라는 말도 있었다. 검사해 봤지만 헬리코박터균이 없었다. 무관하다. 최근 몇 년 간 사고로 입원하고 항생제 같은 약을 과하게 달고 살았다. 편두통 생리통에 상습적으로 먹던 소염진통제도 위장병을 악화시키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단순한 감기도 처방약 때문에 위장장애로 악화되는 유형이다. 따라서 병이나 사고로 입원하면 뒤탈이 심하다.
4.
참조기 구이와 대추 넣은 황태죽
나물과 토마토
양배추와 사과 반쪽 대추생강차
황태를 불리고 대추를 넣어 찹쌀죽을 끓였다. 나물에 토마토를 반찬으로 삼고 참조기를 구웠다. 조기는 성질이 따뜻하여 위가 찬 사람의 위기능을 보해준다. 대추와 생강을 넣어 생강차를 끓였다. 후식으로 양배추와 사과 반쪽을 먹었다.
양배추를 씹어 먹다가 문득 떠올랐다. 고등학교 삼 년 내내 극심한 변비에 양배추를 들고 다니며 먹었다. 별명이 양배추 먹는 언니였다. 까먹게 잊고 산 기억이다. 웃음이 나온다. 다시 아프니까 이제야 생각이 나다니.
아직도 통증이 가시지 않는다. 이번은 꽤 오래갈 듯하다. 아픈데 안 아픈 척하는 것도 고역이다. 죽을 맛이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 수년 동안 만성이 되어버렸는데 하루아침에 멀쩡해질 순 없겠지. 욕심은 버렸지만 충동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탓이다. 어쩔 수 없다.
과거의 식습관과 작별하기로 한다. 버리는 것은 두렵지 않다. 다만 새로 길을 내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이미 여러 번 해봤지 않은가. 잘 죽으려면 죽는 그날까지 잊지 않는 것만이 살 길이다. 길고 먼 길이다.
일일신우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