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일년이 하루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하루는 눈 깜박임 한 번과 같을 것이다. 내게는 아직 일년이 일년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작년과 비교하면 달라졌다. 과거를 돌이켜보니 해마다 점점 빨라진다. 나이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어린 시절 하루가 그토록 길고 지루했던 까닭은 아이에게 주어진 미래라는 가능성, 누구라도 될 수 있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시간이 무한정으로 느껴질 만큼 정말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인생이 팔십 년까지라 한다면 열 살 짜리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겨우 팔 분의 일만 사용한 것. 사십이라면 딱 반이 남은 것이다. 팔십이라면 그에게는 오늘은 선물이자 덤이고 내일이 주어진다면 생의 축복이거나 저주일 것이다.
어릴 적에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루 빨리 어른이 되어 집을 떠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줄 알았다. 하루하루가 끝도 없이 길어서 좀이 쑤셔서 졸고 또 졸았던 시절. 그 때는 하늘에 떠있는 정오의 태양이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고 나니 어른은 뭐든지 다 할 수는 있지만 삶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원히 내 옆을 맴돌며 장난칠 것만 같았던 시간이 저만치 혼자 달려나간다. 시간이 흘러간다고 느끼는 것은 결국 인간의 기억이라는 감각이 만들어낸 착각이자 환상일 테지만 그럼에도 한 살이라도 더 젊었으면 하는 마음에 시간을 붙잡고 싶어서 옹송거리는 마음에 서글퍼하면서.
날아갈수록 시간이 점점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닫는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나이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시간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죽음을 앞두고 죄책감과 회한을 남기고 떠나게 된다. 평생 제가 바라는 삶을 살아내지 못한 인간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잘못 살았다는 후회 그리고 더이상 자신에게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는 회한에 휩싸여 죽는다. 종국에 인간은 기억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생각해본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기억하며 죽고 싶은가.
"듣고 생각하고 명상하고 질문할 수 있을 때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생의 마지막 날, 마음에는 여유가 전혀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도 없고 의지할 곳 또한 아무데도 없을 것이다. 오직 남아 읽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후회뿐이다."
-달라이 라마 <무상에 대한 명상>
한 개체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 그 시간성을 인식하는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동물, 호모 사피엔스.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소멸한다는 명제. '죽음'을 인식한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 차라리 불수의적 감각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세포 동물이거나, 변연계라는 충동과 본능밖에 없는 파충류로 태어나거나, 감정을 느끼되 시간성을 사유하거나 사고하지 않는 개나 고양이로 태어날 것을. 인간은 엄청난 용량의 두뇌를 달고 태어나 생각하고 상상하는 동물이라는 게 우리 생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리라.
스티브 잡스가 그랬다지 않은가.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가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노라고. 죽음이란 생명이라는 스위치를 끄고 시스템을 종료하는 거라 생각한다고. 냉정히 말해 나도 그렇다. '죽음에 무관심할 때 죽고 싶다'고 했던 몽테뉴. 나도 그렇게 가고 싶다. 그러니 후회없이 살기 위해서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생명의 스위치가 꺼질 때까지 오늘도 내가 살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겠다. 생로병사라는 굴레 안에서 슬픔이 가득한 세상에서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베풀고 그렇게 그렇게.
"나는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 죽기를 바란다......너희들의 생명이 어디서 끝나건 너희들의 생명은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삶의 유익함은 그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 방법에 있다. 오랫동안 살았지만 조금밖에 살지 못한 사람도 있다. 너희들이 살아 있는 동안 너희가 충분히 살았는지 어떤지는 너희가 산 기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의지에 달려있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앎으로써 우리는 모든 예속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죽음으로 생명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인생에 아무런 불행도 없다."
- 몽테뉴 <에세(수상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