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 시대라는데 장수가 결코 행운만은 아니다. 반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백 년 동안의 고독이 될 수도 있다.
늙는다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잊혀 가는 것이란 말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다고 상상해 보라. 그때마다 자기 안에 자리했던 어느 부분을 영원히 잃어버렸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죽음 탓에 잊혀 가는 것이 바로 늙음이 아닐까.
유명세를 떨치거나 명성 권세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잊힌다는 게 두려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살면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고 일면식도 없는 무수한 사람들 불특정 다수인 대중에게 기억된다는 것이 과연 자신의 인생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일까. 어차피 살아 이름을 날렸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두 서너 세대만 지나도 모두 사라질 이름들인데. 날 기억하는 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면 나란 존재도 영원히 사라질 터인데. 그 따위 것 하나도 부럽지 않다.
상실이 고통스러운 것은 나와 같은 시간과 경험을 공유했던 누군가가 죽음으로 그 기억을 저 세상으로 가져가버리기 때문이다. 부모의 죽음이던 배우자던 자식이던 가족이던 친구던 간에 만약 날 기억해 주는 누군가가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있던 소중한 내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 되는 것이다. 덮어버리려 해도 덮을 수 없는 공허감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 가족, 죽마고우, 친구, 동료 등등이 나를 먼저 앞세우고 세상을 뜨는 것. 시간과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이 기억이 하나둘 끊어져 가는 것만큼 외롭고 쓸쓸한 것은 없다. 모든 기억에는 고유한 특성이 있어서 다른 것으로 대체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남보다 더 오래 사는 건 축복이 아닌 것이다. 나를 기억하고 내가 기억하는 모든 이들이 사라지고 난 후까지 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 슬픔의 근원에는 바로 '상실'이 있다.
이 때문에 나는 내가 사랑하고 사랑한 사람들이 오래오래 살아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내 옆에 있지 않아도 가까이 없어도 헤어졌어도 그 사람의 기억 속에 우리가 서로 사랑했던 기억이 아꼈던 마음이 함께 보냈던 시간이 경험이 기억이 추억으로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지구별 어디에서 무얼 하든 그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된다.
한 번 사랑했던 사람은 사랑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사랑한 사람이었다. 사랑이 어떤 얼굴로 끝났든 간에 설령 괴롭고 고통스럽게 끝났더라도 나는 사랑이 끝난 후에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해본 적이 없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난 내가 한 때 사랑한 사람이 좋아했던 사람이 불행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사정이 있어 헤어지고 말았지만 그가 계속 행복했으면 바란다. 내가 그 행복을 줄 수는 없게 되었지만 스스로 또 다른 인연과 행복하기를.
무엇보다 사랑했던 기억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추억할 거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노년이 풍요롭다. 더불어 상실의 고통과 외로움을 줄이기 위해서는 고독과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을 곁에 둬야 한다.
나이 들수록 늙어갈수록 가족보다 친구가 더 중요해진다. 불확실과 불안정이 디폴트인 유동하는 현대 우리 시대의 삶에 있어서 어쩌면 혈연이라는 핏줄보다 삶을 걸어가는데 지지가 되는 동반자적 교우관계가 더 필요하다. 나보다 한 살이라도 젊고 어린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좋다. 연하라 해서 나보다 오래 산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상실이란 위험도를 여러 각도로 분산시키는 것이 초고령사회에서는 특히 유용하고 필요한 삶의 지혜다.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를 벗 삼는 것.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교우관계를 넓히는 것. 나이 어린 사람은 제 보다 더 삶을 오래 산 이의 관점을 배우면서 삶의 중심을 세울 수 있고, 나이 많은 사람은 제 보다 어린 이의 고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서로 동시대를 살면서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한국처럼 연령으로 위계와 질서를 따지는 연령주의 문화에서는 인간관계라는 게 고작 혈연 가족을 제외하면 대개 동갑내기나 또래 연배로 비슷한 연령과 배경의 사람으로 한정된다. 그러나 이럴 경우 편협한 시야를 벗어날 수 없으며 나이 들수록 제가 속한 집단과 세대라는 좁고 작은 세계로 세상을 섣불리 단정, 판단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한마디로 자연스레 꼰대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십중팔구 남보다 오래 사는 사람은 상실과 고독을 혼자 끌어안고 외롭게 남은 생을 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친구란 직업의 유무만이 아니라 연령에도 구분을 두지 않고 폭넓어야 한다.
늙을수록 입을 다물고 귀를 열라는 말이 있다. 시대의 물결에 좌초하지 않으려면 노년에 외롭지 않으려면 나이 들수록 더더욱 마음을 열고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자신이 서있는 위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반성하고 돌아봐야 한다. 오픈 마인드. 타인을 통해 배우고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이야말로 현실감각을 유지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미래에서 도태하지 않는 길이다.
“슬픔의 끝에는 황홀경이 있다. 당신의 부재가 지극한 기쁨으로 타오르는 순간이 있다. 그동안의 모든 슬픔과 외로움과 애태움과 아픔이 빛나는 이 순간의 땔감들이었던 것처럼. 이별의 주체는 고행의 나무꾼이다. 이 찬란한 빛의 순간을 밝히는 땔감들을 구하려고 부재의 고통스러운 숲 속을 헤매야 하는 고행의 나무꾼.”
-철학자 김진영 <이별의 푸가>
죽음 그리고 나이 듦.
상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상실의 고통을 끌어안고
제 고독을 달래는 방법.
고독한 남을 달래는 방법.
누군가가 다가와 옆에서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라고 말해주는 건 너무 상투적이다. 아무 의미도 없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의 고독을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당신처럼 나도 고독하다. 따라서 나는 최소한 당신이 고독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게 더 솔직한 위로다.
그렇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너의 눈 속에 비친 나를
내 눈 속에 들어온 너를
조용히 말없이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