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팔순 노모의 무릎이 영 시원찮다. 혼자 갈 수 있다며 손사래를 치는 어머니 앞에 어머니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라는 핑계를 댔다. 그랬다. 사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머니를 뵈는 날이 없다. 바빠서 건, 귀찮아서 건, 비루한 일상에 치여서건 집에서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 어머니가 먼저 전화를 하셔서 잘 지내니? 라는 말을 건네기 전까지 어머니의 존재를 까먹고 산다.
집에 한 번만 와주고마라고 수없이 부탁하셨던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일까. 아버지가 그리 허망하게 돌아가신 지가 아아. 십 여년이 흘렀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벌써 그리되었나. 헛헛한 웃음이 나온다. 문득 어머니마저 가실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을 다잡는다. 알고 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버지를 떠나보냈을 때와는 달라야 하리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되리라.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으리라. 떠나기 전에 더 많이 얼굴을 봬야 할 텐데 라는 조바심에 마음이 바빠진다.
그런데 그 순간뿐이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마음은 도루묵이다. 간사하기 짝이 없다. 어릴수록 물정을 모르고 젊을수록 교만하다. 도저한 시간의 흐름을, 삶의 유한함을 그때는 알래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한참이나 모자라고 미욱하다. 그래도 어른이 되면 달라지리라 믿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삶에 한 해가 보태질수록 성숙한 인간이 되어 망설임 없는 인생을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랬지만 모두 거짓말이다. 삶은 언제나 기대를 배반하고 믿음은 길을 잃고 비틀거리며 방황은 끝이 없다.
내 걸음을 쫓아오지 못하는 노모를 가다가 서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게으르게 느릿느릿 걷는 나에게 항상 잔소리를 했던 어머니, 불과 몇 해 전까지도 걸음이 빠르고 단정해서 항상 앞서 걸었던 그 어머니가 이제는 내 뒤를 쉬엄쉬엄 따라온다. 어머니의 세월은 그새 어디로 흘러간 것일까. 내가 시나브로 나이를 먹듯 어머니도 속절없이 늙어간다. 저만치 먼저, 따라가면 더 멀리. 그 간극은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법.
그때 노모의 말 한마디가 상념에 빠져 있는 나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시장에 가서 뭘 사 오려 해도 힘에 부쳐 살 수가 없었는데 마침 네가 와서 잘 됐다. 이 참에 장을 보자꾸나. 어머니는 앞장서서 시장통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딸기 두 팩을 사서 하나를 날 주시며 중얼거린다.
'너는 아직 젊으니 좋겠구나. 늙으니 이 몸뚱이마저 무겁고 버겁다. 늙으면 쓸모없어. 빨리 가야 해'.
알고 있다. 늙어버린 어머니의 육신은 이제 당신에게는 몹쓸 짐이다. 하지만 나는 또 알고 있다. 세월의 먼지가 켜켜이 묻은 몸과는 달리 어머니의 마음은 아직도 깃털처럼 가볍고 새처럼 자유롭다는 것을. 키가 내 머리 하나만큼이나 줄어든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나는 문득 꿈과 희망과 불안과 고민을 가득 안고 있었을 한 소녀. 한 때 소녀였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 소녀는 지금 내 나이도 지나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여자가 되어 또 다른 세상에 혼자 서 있다.
그 나이를 실감한다는 것은 어떤 감정일까. 앞으로 내가 어머니처럼 그즈음에 서 있을 때는 또 어떤 것을 느끼게 될까.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가슴으로 울고 있을 것인가. 그때서야 어머니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될까. 삶과 죽음을 소스라치게 그러면서도 담담히 실감하게 될 것인가.
늙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낡아가고 잃어버리며 병들고 아프고 쓸쓸해지는 것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슬프고 참 싫은 일이다. 몰랐던 것을 깨우치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되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는 걸 시간이 가르쳐주는 것이다. 삶에서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은 오직 흐르는 시간과 생의 끝에 맞이할 죽음 밖에는 없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나이를 먹고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예외는 없다.
노년 그리고 앞으로 당도할 죽음. 아아. 그 고독의 한가운데로 걸어가는 어머니. 어머니의 그림자는 당신이 살아온 인생의 궤적을 남김없이 그려내고 있었다. 꼬부랑 할머니가 된 어머니의 뒷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언제 저리도 허리가 굽으셨던가. 이제 그만 익숙해져야 하는데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도 어머니의 굽은 등은 여전히 낯설고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