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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요구하는 정치가

by 홍재희 Hong Jae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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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민주당원으로 독일 대통령이었던 요하네스 리우가 새로운 21세기의 벽두, 2000년에 독일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국회에서 독일어로 연설을 했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애국심은 오직 인종차별과 민족주의의 여지가 없는 곳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애국주의를 민족주의와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애국자란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민족주의자는 다른 이들의 조국을 경멸하는 사람입니다."




애국주의 -민족주의 -극우주의가 진보라는 이름으로 혼재되어 정치적 득실에 따라 이데올로기로 남용되는 한국 사회의 현실. 보수우파가 진보를 광고 카피처럼 지배 이데올로기로 선전선동하는 적반하장의 현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눈 뜨고 코베이는 상황에 놓일지 모른다. 누구나 하나 이상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다른 이들에 대한 관용이 단지 이론상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체화되지도 못한 상태에서의 극단적 민족주의는 아무리 애국심으로 미화 포장한들 자유주의든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보수든 진보든 그 어떤 외피를 두르더라도 파시즘이라는 독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작금에 대통령이 사로잡혀 있는 종북세력 척결이라는 프레임, 자신만이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사회 곳곳에 암약하는 반국가세력과 싸우는 고결한 지도자라는 망상이 그렇다.)



일상의 모든 영역이 정치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정치와 일견 관련이 없었던 생활 분야에까지도 정치화가 진행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한마디로 정치 과잉의 시대다. 더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현실 정치를 계급성과 정당의 강령과 정책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팬덤으로 즉 취향으로 사고하는 사회다. 비전과 정책은 실종되고 인물론과 이분법적 사고만 남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대로 사는 법이 무엇인가. 먼저 남을 위한 공간을 존중, 배려해 주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리를 주장하는 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대화와 소통의 전제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기가 이토록 어려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통절히 느낀다.


일국의 리더 지도자라는 대통령부터가 갈등의 진앙지 불통의 아이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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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정치가.

위대한 '정치가'가 아니라 단순한 '정치꾼'- 차이는?


예술가는 스스로에게 진실하기 위해서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용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런 용기가 없다면 그는 예술가가 아니다. 반면 진정한 정치가는 스스로에게 진실하기 위해서 언제든 구사할 수 있는 고도의 타협의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런 기술이 없다면 그는 정치가가 아니라 단지 시류에 편승하는 정치꾼에 불과하다. 따라서 '정치적인' 사회에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주류에 역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인' 사회에서 정치가-정치꾼의 의미에서- 가 된다는 것은 주류에 편승하거나 비주류에 비타협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가 이룬 것에 대한 자부심과 결말 자체에만 관심을 보이는 치들, 해결사 역할을 자청하는 자들은 정치가가 아니라 한낱 정치꾼에 불과하다.


정치가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지니고 실천에 있어서도 긴 안목을 지니고 있는 자다. 훌륭한 정치가는 비전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실천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과 관련이 되든 간에 지금 존재하는 것과 앞으로 존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 훌륭한 정치가는 무엇보다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옳다"라는 말은 이미 철학적으로는 틀렸다를 의미한다. 그것은 타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정치가는 현실을 이해하고 텍스트를 이해하고 이를 실천하는 어려움을 이해하고 나서 다음 단계로 최고의 용기를 가지고 비전의 실현을 위해 전력투구한다.


아, 우리에게는 위대한 정치가가 절실하구나.


과연, 지금,


한국에는 미래를 향한 비전이 있는 '정치가'가 있는가?



3.


뉴스를 볼 때마다 정치판에는 온갖 현란한 미사여구와 이합투구가 난무한다. 어지럽다. 노회 한데도 욕심으로 가득 찬 늙은이들이 선거판에 도전장을 던지고, 돈과 권력에 눈이 먼 모리배들과 협잡꾼들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다. 이 나라에서 정치란 돈으로 쌓아 올리고, 돈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하이에나들, 패거리로 세를 불리는 잇권에 따라 이리저리 정당을 옮겨 다니는 철새들의 놀이터다. 명태균 게이트를 보면 한국의 선거판은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이다. 사상도 철학도 비전도 없다. 정치가도 정치인도 보이지 않는다.


제22대 4월 총선 남녀 연령 비율.


50대 이상 70대 남성 후보가 90%를 넘고 여성은 고작 10%. 청년도 극소수.

50-70대, 서울, 강남구, 대졸 이상, 군필, 판검사, 언론계, 고위공무원, 교수, 사업가, 부동산 업자, 자산 10억, 이성애자, 한국 사회의 기득권 남성들로만 구성된 대한민국 국회.



대한민국 인구의 과반은 여성이라는데

나라의 미래를 책임지는 주체는 청년이라는데

삶의 질과 미래의 향방을 책임질 국회 권력은 오직 늙다리 기득권 남성들의 손에 달려있다.

2024년에도 이 나라에서 태어나 일하고 노동하고 세금 내는 시민이자 국민인 여성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도 목소리를 낼 수도 없다.

청년은, 노동자는, 비정규직은, 농부는, 성소수자는, 이주민은, 장애인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주체로서의 권한이 없다.


21세기의 가치는 성평등이다.

대한민국에서 성평등은 아직도 요원하다.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지 않는다면 저출산은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

출산율 0.78이라는 상황을 누가 만들었는가?

현재 기득권 기성세대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사회를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기는커녕 단지 기득권을 연장할 권력만 쥐려고 한다.


이 나라 정치는 여전히 답이 없다.




政治 Politics


'정치란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분배' (데이비드 이스턴)라는 말이 있다.

남초들의 나라, 남초들의 권력.

50-70대 기득권 남성들만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에서

정치란 이미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한국의 정치는 기득권인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들만의 기득권을 강고하게 유지하기 위한 카르텔일 뿐.

2024년에 케케묵은 20세기 서민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금수저 강남키즈 한동훈,

룸살롱에 드나들며 말 바꾸기의 귀재인 나이만 젊은 구태 이준석, 비열한 야바위꾼 원희룡, 오세훈.

과거를 답습하는 노회한 정치꾼들인 홍준표, 황교안, 이낙연, 박지원 등등 수많은 얼굴을 본다.


아무도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국에는 지도자가 없다.


야당이 맘에 안 든다고 제 편을 들어주지 않는 언론이 반대하는 의사들이 밉다고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고 화나서 죄다 쓸어버려! 계엄령을 선포하는, 정신연령 다섯 살, 대화와 타협 협치라는 민주적 가치 대신, 복종과 통제 지배와 폭력이라는 전근대적 방식에 익숙한, 정치인은커녕 정치가 뭔지도 리더가 뭔지도 모르는, 국민에게 위임받은 대통령이란 직책을 사적으로 남용하며, 시민과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를 적으로 규정하는, 미치광이 검사가 국군 통수권자로 대통령으로 앉아있는 나라다.


모든 나라는 그 나라 국민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말이 있다. 국민의 과반수가 그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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