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병실 일기 3
1.
수술 받은 날 있었던 일. 척추 마취가 생각보다 훨씬, 평균적인 다른 환자들 경우보다 너무 빨리 풀린 데다가 엿같은 무통주사가 효과가 전혀 없어 수술 직후부터 통증과 고열에 시달리던 때였다.
수술 직후 무릎을 보호하고 지탱할 보조기가 당장 필요했다. 보조기 없이는 병실 내 보행도 퇴원도 불가했다. 허겁지겁 입원 수속을 밟고 번갯불에 콩 볶듯 수술을 하느라 미처 보조기를 생각하지 못한 낭패였다. 병원에서 급히 새 걸 사면 25만원이나 하는 무릎 보조기를, 내 소식을 들은 친구가(그것도 미국에 사는), 제 사촌 언니가 쓰던 게 있다며, 그것도 나랑 똑같이 다친 다리도 오른쪽, 내 치수에 딱 맞는 보조기를 흔쾌히 준다는 게 아닌가! 이런 천운이 또 있을까! 게다가 사촌 오빠가 친히 내가 입원한 병원까지 가져다 준단다. 경기도에서 서울까지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다니.
별 말씀을요. 어차피 서울에 볼 일이 있어서 차로 들리니까 가는 길에 가져다 드릴께요.
다정한 친구와 사촌 언니오빠의 친절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배달비 겸 감사 표시로 오만원을 드리기로 했다.
그런데 친구의 사촌 오빠인 그 분이 하필 이 순간 병실에 도착했지 뭔가! 수술 후 발끝부터 곧바로 지구핵을 향해 추락하는 것 같은 고통에 정신이 림보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중에. 내 사나운 몰골을 보더니 이 분, 깜짝 놀랬는지 손사래를 치며 돈을 안 받겠단다. 이렇게 아픈 사람한테 말 거는 거조차 미안하다며 그냥 가보겠다고. 나는 통증에 어퍼컷을 맞아 넋이 나간 맹한 눈으로 그냥 가시면 안된다는 신호를 보내며 눈물 콧물 질질질 짜면서 달달달 떠는 손가락으로 배낭을 가리켰다.
- 거기 지...갑 있어요. 거기서 꼭 꼭 가져가세요.
잔뜩 미안해하는 얼굴로 울쌍을 지으며 머뭇머뭇 배낭을 열었는데,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하는 친구 사촌 오라버니. 이 분이 미적거리며 가방 속에서 내 지갑을 못 찾자 옆 병상에 누운 오지랖 겁나 넓은 중년 아주머니 환자가 끼어들었다. 저기, 줘봐요. 자기가 더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러더니 대신 내 가방 속을 재빨리 뒤져주었다. 그런데 지갑을 꺼내 안을 살피던 아주머니가 말하길, .....어머, 돈이..어디... 없네?
뭐? 돈,이, 없,다,고??!
분명 십만원이 넘는 배춧잎을 넣어두었는데 없,다,고!!!!!!!!
으아악! 아....안 돼!
그 소리에 머리 속에 섬광이! 정신이 번쩍! 그 순간 벽을 뚫고 날아가서 산에 정면 충돌하는 줄 알았다.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고개를 들었다. 무릎뼈를 뚫어놓은 고통이 주는 충격보다 돈이 없어졌다는 소리가 더 충격이었다. 찰나 모든 고통이 통증이 정말 씻은 듯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후다닥 지갑을 낚아채 뒤졌더니....천만 다행히도 돈이 거기, 있었다. 십년 감수했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자마자, 주변 환자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어어! 머리 들면 안돼욧!! (참고로 척추 마취 후에는 여섯 시간 동안 누워서 절대 고개를 들면 안된다. 척수액이 역류해 두통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을 건네고 인사 치레를 하고 귀인이 병실 밖으로 사라지자마자....털썩 병상에 드러누었다. 그런데 다시 미친듯한 통증이 배고픈 하이에나처럼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이고 나 죽겠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 하나. 세상에, 돈이 없어졌다는 말에 내가 머리를 든 지도 몰랐는데. 그 순간에는 아픈지도 몰랐는데. 돈, 돈, 피같은 돈을 잃어버렸다는 게 최강 진통제라니! 죽을 만큼 아픈데 동시에 너무 웃겨서 혼자 흐엉흐엉 울다가 비실비실 웃었다. 옆자리에 누운 환자에게 내가 통증 때문에 너무 아파하면 돈, 돈 애기 좀 하라고 그럼 안 아플 거 같다고 했더니 다들 낄낄낄 우하하하 모두 웃었다.
이 날 경험으로 깨달은 것.
'돈'은 통증보다 무섭다. 호환마마보다 무섭다. 제일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