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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업도 기행 1

여행자의 기록 23

by 홍재희 Hong Jaehee



굴업도 낭개머리에서 비박 야영을 마치고 개머리언덕을 지나 다시 큰말(큰 마을) 해변에 도착합니다. 정오에 섬에 들어오는 나래호에 승선하려 배낭족과 민박 손님들이 굴업도에서 하나뿐인 간판 없는 해변카페(이름도 그냥 해변카페)에서 시간을 죽이죠. 굴업도는 덕적도에서 승객을 태우고 하루에 한 번 들어오는데 섬에 승객을 내려놓고 다시 승객을 태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그 배를 놓치면 영낙없이 하루를 더 섬에 머물러야 합니다.




해변 카페에서 생수 한 병으로 목을 축이고 숨을 돌리며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다와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고 눈부신 햇살 아래 고요와 적막만이 춤을 춥니다. 아아, 불현듯 서두르기 싫다 떠나기 싫다 하루쯤 더 있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오더군요. 까짓 거 텐트도 있겠다 사방이 잠잘 곳인데 뭐가 대수인가. 해변가 송림 아래 텐트를 치고 오늘밤은 저 바다 파도소리를 벗 삼아 잠을 청해야겠다 싶었어요. 정말 충동적으로 섬에 하루 더 머물겠다고 결정해 버렸습니다. 직장인들처럼 매인 몸들이야 불가능하겠지만 프리랜서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자유로우니까 돈은 없어도 시간은 많으니까요.



저는 오랜 기간 배낭여행을 다니며 터득한 저만의 여행 방식이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낯선 곳 여행지에 대해 공부합니다. 그 나라 그 곳의 역사와 문화 등 정보를 꼼꼼히 취합 사전계획을 철저히 세우는 편입니다. 그러나 막상 여행길에서는 계획대로 하지 않고 그날 그날의 상태와 기분 현지 상황에 맞추어 지냅니다.



계획을 세우되 따르지 않는다.



그게 제가 여행하는 방법입니다. 안정적이고 익숙한 일상의 반복에서 벗어나서 마음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따리 가는 거지요. 예측하지 못한 돌발상황이 생기고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나고 그럴 때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여행의 본질이 아닐까요. 저에게 여행이란 낯선 곳에서 익숙한 것들을 발견하는 기쁨. 낯선 풍경을 통해 내면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여정입니다.






배편을 취소 변경하려고 가보고 싶은 섬 홈피에 접속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자꾸 오류가 뜨더군요. 배 시간은 다가오고 배편 변경은 못하고 핸드폰 배터리는 간당간당하고 섬을 떠나기는 싫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해변 카페 쥔장님이 선박회사에 전화를 걸더니 저 대신 배편을 취소해 주셨어요.



언제로?

하루 더요. 오늘 배 취소하고 내일 나가는 배요.

잠깐만 기다리쇼.



정말 고맙지 뭡니까! 당일 배편은 인터넷이 아니라 전화 취소밖에 안 된다는 걸 몰랐어요. 역시 길 위에서는 모르면 묻고 도움을 받고 감사하면 됩니다.


원래 길 떠나기 전에는 2박 3일로 계획한 여행이었습니다. 굴업도 1박에 소야도 1박 이렇게. 그런데 마음이 바뀌어 굴업도 2박으로 덕적도까지 돌아보는 4박 5일 여정으로. 닷새 동안 먹을거리와 옷가지를 챙겨 오지 않았지만 뭐가 대수람. 등반도 아닌데 산꼭대기나 인가 없는 숲 속만 아니면 어디서든 그때 그때 필요한 건 살 수 있습니다.


앗싸! 배편도 내일로 변경했겠다 느긋한 마음으로 해변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주문. 커피를 들고 파라솔 아래 앉아 하염없이 멍을 때립니다. 여행객들이 전부 배를. 타러 떠나고 인적 끊긴 해변. 이따금 작은 물결이 일고 수평선 너머 새가 날고 멀리 어디선가 개가 짖는 소리. 시간이 걸음을 멈추고 해변에 길게 누워 낮잠을 청합니다. 시간의 모래가 파도에 씻겨나갑니다.

.

하루가 온전히 내 것이니 오늘은 무엇을 할까.

텐트 치려고 봐둔 자리에 집을 지어놓은 다음

큰 마을을 돌아보고 섬 반대편으로 트레킹을 떠나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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