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기일에 쓰다
찬바람 맞으며 밖에서 일을 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귀갓길.
버스는 한 해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코 끝이 얼얼하지만 정신은 바짝 기가 들었다.
해가 저무는 하늘을 바라보며
떠오른 말은 일기일회.
'일기일회’란 말은 중국 진(晉) 나라 원언백의 “만년에 단 한번, 천년에 단 한차례뿐인 귀한 만남, ‘만세일기 천재일회(萬歲一期 千載一會)’”에서 나온 말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기회)이며, 모든 만남도 생애 단 한 번의 만남(인연)이라는 뜻이다.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법정스님이 쓴 책의 제목이 생각났다.
벚꽃 찬란한 어느 봄날, 길상사. 법정스님의 법문.
“이 눈부신 봄날, 새로 피어나는 잎과 꽃을 보면서 무슨 생각들 하십니까? 각자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참고 견디면서 가꾸어온 그 씨앗을 이 봄날에 활짝 펴시기 바랍니다. 봄날은 갑니다. 덧없이 갑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는 새로 돋아나는 꽃과 잎들이 전하는 거룩한 침묵을 통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라는 뜻. 그러니 한 번의 연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말씀. 사람으로 태어나 부모 자식의 연으로 만난 인연, 살면서 지금껏 만나고 헤어지고 스쳐 지나간 인연, 지금 만나는 인연, 앞으로 만날 인연을 다시금 생각한다. 이승을 뜨기 전까지 그 모든 인연이 덧없이 소중하나니. 괴로워할 것도 외로워할 것도 없나니. 오직 기쁘고 슬프고 그 한가운데 머무나니.
‘까르페 디엠(Carpe Diem) 메멘토 모리 Mememto mori) 아모르파티 (Amor fati)'
호라티우스의 송가에 나오는 말이다. 모든 것은 생에 단 한 번뿐이니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는가가 다음의 나를 결정한다. 매 순간 우리는 다음 생의 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인 것처럼, 내일이면 내가 이 세상에 없을 것처럼 그렇게 절실하게 살아갈 일이다.
오늘은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16년 전 세상을 뜨고 한 줌 재로 우주의 먼지로 태초에 우리가 온 곳으로 돌아간 아버지를 떠올리며 묵상한다. 우리말로 사람이 죽은 것을 돌아간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죽음이란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일뿐이다. 생을 마치고 연이 다하면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죽었다는 말보다 돌아갔다는 표현 속에 나는 생의 덧없음과 생의 소중함을 느낀다. 일기일회한 생이여. 거룩한 침묵이여. 봄꽃 같고 벚꽃 같고 흩날리는 눈발 같은 생이여. 사랑이여. 죽음이여. 그리움. 아아 슬픔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