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길섭 Sep 03. 2024

Prelude(전주곡)

6월 13일, 펜을 들기로 결심하다

(작가가 되기로 3개월 전에 결심했을 때 쓴 글입니다.)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펜을 쥐는 것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며, 해야만 하는 일이었음을. 내 시선이 향하는 대상은 언제나 음악이었지만, 정작 나를 더 사랑해 주는 것은 글이었다. 비록 대문호가 될 정도의 필력은 아닐지 몰라도, 스러져 가는 이들의 마음을 소생시킬 수 있는 얼마간의 문재(文才)가 나에게 있음에 더없이 감사하다. 이제는 나 역시 글을 전심으로 사랑한다. 그리하여, 나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음지에서 벗어나기 싫었다. 세상에 나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고, 솔직히 지금도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치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해 그리 떳떳하지 않은 탓이다. 생각도, 감정도 없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했을 정도로 인간관계로 인해 마음에 생채기가 많이 생겼지만, 나 역시 어떤 이들의 가슴을 무참히 난도질한 한갓 죄인일 뿐이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고, 겸연쩍다. 과연 이런 나에게 글을 쓸 자격이 있을까 싶어서 얼마 전에는 정신과 교수님께 고해 성사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라는 것을 한 움큼 쥐어본다. 종교 의식처럼 매우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부지불식간에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한번 시도해 본다. 아름답든 추하든 31년 간 순간순간의 합이 곧 현재의 나라는 사실을 직면하고, 명문(名文)으로 세상에 속죄하고 싶다.

더 나아가,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일궈내고 싶다. 오래된 일기장에서 얼마 전에 인상적인 글귀 하나를 발견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경애했던 영어 선생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말씀이었다. "네 눈빛만 보며 수업한단다. 큰사람이 되거라. 모든 것을 따스하게 녹여내고 되돌릴 수 있는⋯⋯." 그분이 교육으로써 당신의 선한 의지를 체현하셨다면, 나는 아름다운 글로 해내고 싶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내가 강고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지쳐 쓰러져 있을 때 먼저 툭툭 털고 일어나 다른 사람도 일으켜 주는 그런 멋진 사람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저 내 바람일 뿐이다. 자주 그럴 자신은 솔직히 별로 없다. 내가 아는 사람 중 나보다 약한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고, 이런 나 자신이 언제나 마뜩잖았다. 나부터가 이런 사람이기에 억지로 긍정적이고 교시적인 글만 쓸 수는 없다.

그 대신, 내 나름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위무해 줄 자신은 있다. 나의 유약한 내면까지도 솔직하고 고담하게 글로 내보이는 것이다. 이따금 구슬픈 선율로 묵은 감정을 해소하듯, 진심만 담겨 있다면 멜랑콜리한 글을 통해서도 누군가는 힘을 얻는다. '이 사람도 보통의 존재고, 나와 함께 떨고 있구나⋯⋯.' 깨닫는 것이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은 어느 한 사람도 없지만 표현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러니 나라도 자신을 드러내련다. 내가 위로를 받고 싶다기보단, 그들이 이런 나를 보며 대리만족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 나는 긍정의 힘을 동경하지만 슬픔의 미학 또한 믿는 사람이다.

한 치 앞도 예견할 수 없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글을 쓰게 될지는 미지수다. 어느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언제까지 글을 짓게 될지도 막연하다. 마치 광활한 숲 한가운데에 툭 떨궈진 장님처럼 두 팔을 앞으로 허위허위 내저으며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기분이다. 막막하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가늠이 안 된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명명백백하다. 내가 예술에 본능적으로 이끌리고, 그에 도전할 용기가 이제는 나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죽는 날까지 좌고우면만 하지 않겠다. 지긋지긋한 곡선 주로에서 벗어나 이제는 직선 주로에서 전력으로 질주하고 싶다. 그만 겉돌고, 예술이라는 과녁의 정중앙에 나 자신을 수직으로 세차게 내리꽂고 싶다. 죽을 고비도 이미 수차례 넘겼기에 더이상 그런 실패는 두렵지 않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그저 생과 사 둘 중 하나로 환원될 뿐이다.

정말로 모골이 송연한 것은 지난 4월에 주요우울장애가 재발했다는 사실뿐이다. 내 경우에는 향후 재발률이 통계적으로 무려 90%에 육박한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사실상 완치에 실패한 것이다. 내 카드를 받고서 까 봤더니 끗발이 너무 안 좋은 상황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무섭다. 왠지 나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 같다. 내일의 내가 지우개로 필흔 지우듯 내 존재를 없애버릴까봐 오늘의 나는 겁이 난다⋯⋯. 이대로 잠들면 영영 눈뜨지 못할까봐 불안해서 잠 못 이룬 밤도 많다. 타인에게 짐이 될까봐 챗GPT에게 나도 살 수 있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답정너였다. 그런데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내가 약해지면 나를 도와줬던 사람들이 속으로 실망하고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나는 그 누구보다도 살고 싶다. 나를 파고들며 파괴하고 싶지 않다. 나를 해방하고 싶은 것이지, 훼방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람을 살리는 작가가 될 것 같아서 기대된다고 첼로를 가르쳐주는 친구가 말했는데, 사실 타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살리고 싶다⋯⋯. 이틀 전에 성대역 근처 벤치에서 삽상한 바람을 맞으며 그 친구와 첼로를 연주했을 때 우리는 더없이 자유로웠는데, 그런 날이 반드시 다시 왔으면 좋겠다⋯⋯.

내일을 희구한다. 그러나 오늘만을 바라보며 살기로 결심했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필사적으로 오늘만 쳐다봐야 내일의 태양이 뜰 때 내 눈도 뜰 수 있을 듯하다. 나에게 내일은 왠지 아득하기 그지없다⋯⋯. 나는 결의를 다졌다. 내가 가장 응원하는 두 음악가가 각자의 음악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쏟아붓듯이 나 역시 내 글에 나의 모든 것을 갈아 넣고 싶어졌다. 문자 그대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인 것이다. 나는 각오가 됐다.


추기:

고등학교 자퇴하고 나는 한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지냈다.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숨만 쉬고 살았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잘 지내냐고 안부 연락을 주신 분이 계셨는데, 바로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었다.

위 사진에서 내가 들고 있는 책은 내가 재학 중일 때 그분이 선물해 주신 <Holes>이다. 우울해 하던 내가 기운을 내길 바라신 거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책이라서 작가 프사는 반드시 이 책과 함께 찍고 싶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