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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길섭 Sep 13. 2024

선물

나는 열여섯 살에 중학교를 자퇴하고 7년 동안 거의 혼자였다. 사람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게 누구인지도 모른 채로. 무인도에 떨궈진 뒤 어떤 배라도 좋으니 여길 지나가주길 기다리는 심정과도 같았다.


내가 사람을 그리워한 것은 엄밀히 말해서 인간이 고독을 견딜 수 없게끔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었지, 내가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 둘은 엄연히 다르고, 그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다. 오히려 나는 사람을 싫어하는 편에 가까웠다.


그랬던 내가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은 대학 입학 후였다. 평생의 인복을 대학에서 소진해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학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4학년 막학기에 복학했을 때도 인복이 더없이 좋았다. 처음에는 겨우 한 학기만 다니기에 누구와도 진지한 관계는 맺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병원에서 실습을 함께하게 된 친구 'K'와 두터운 교분을 쌓게 되었다.


지난 7월 23일, 수원 천천동에 소재한 카페 B' side에서 K를 만났다. 졸업식 날에 사진을 함께 찍고 다섯 달 만이었다. 고작 반년도 안 지났지만 둘 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오랜만에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K와 자리를 잡자마자 나는 가방에서 선물을 꺼냈다. 간호사들이 반창고를 걸고 다닐 수 있는 고리인 릴홀더였다. 누군가에게는 하잘것없어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물건이었다.



이것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2년 전에 내가 정신과에 입원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당시 내게 은인과도 같은 간호사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은 자기혐오가 심했던 나에게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진심으로 말씀해주시곤 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분이 달고 계셨던 릴홀더가 바로 이 곰돌이 릴홀더였다. 나는 간호사를 반드시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 해야만 한다면 그분처럼 정신과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릴홀더를 통해 그 사람을 떠올리면서 나 또한 누군가를 그렇게 돕고 싶어서 그분을 따라서 구매한 것이었다.


파란색, 보라색, 자주색 등 색상별로 여러 개가 있었다. 그중에 몇 개는 아끼는 대학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주었지만 이 연두색 하나만큼은 아무한테도 안 주고 무조건 내가 평생 간직하려고 했다. 간호사를 하든 말든 상관없이. 그 간호사 선생님이 쓰고 있던 색상이 연두색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K를 만나기 전날 밤에 이것을 그녀에게 주기로 결심했다. 내가 가지고 있어봤자 썩히기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K에게 주었더니 예상과 달리 내 마음은 아쉽기는커녕 오히려 너무도 후련했다. 마침 그 친구도 릴홀더를 잃어버려서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했고. 진짜로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우리는 스타필드로 이동했다. 일단 식사부터 하기 시작했는데 친구가 계속 불안해 했다. 가게가 문을 닫기 전에 향수를 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LP 카페에도 가기로 했었는데, 내가 "그럼 밥 먹고 향수부터 사러 가자."라고 했더니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게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밥 먹다가 바라본 창밖


이내 우리는 다니엘 트루스라는 향수 가게에 들렀다. 선물로 받으면 자주 쓰지만 내 돈 주고 구매할 여유는 없어서 향수 가게에 들러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함께 시향을 하는데 갑자기 K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하나 사줄게."


나는 문자 그대로 내 두 귀를 의심했다. 오만원을 훨씬 웃도는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응?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작가 하기로 했대서 주는 선물이야."


"아니야······."


"이거 두 개 사면 더 싸."


"아니 진짜 괜찮아······."


나는 계속 사양했다. 그런데 지난 6월에 작가가 되고 싶다고 밝혔을 때 친구가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어."라고 말했던 것이 순간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아, 그때 그렇게 이야기하고 지금까지 사주려고 벼른 게 혹시 이거인 건가······.'


끝까지 거절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은 받겠다고 했다. 두 가지 향 중에서 고민이 됐는데 이전에 친구가 썼던 것이 봄쉘이라고 해서 이것으로 결정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K가 말했다. 자신도 이번에 졸업하고 친구로부터 향수를 선물 받았는데 기분이 좋았다고. 그 말을 들으니 친구에게 참 감사했다. 나도 살면서 타인으로부터 뭔가를 받고 나면 제3자에게 똑같이 해주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데, K는 그런 마음을 바로 나에게 가져줬다는 것이니까······. 그날 귀가하면서 나는 앞으로 K가 사준 이 밤쉘의 향처럼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고 다짐했다.


이날 대화하면서 K한테서 감동을 받은 순간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내가 이렇게 물었다.


"저번에 나한테 친해지고 싶다고 했었잖아. 근데 도대체 내 어떤 면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거야?"


그랬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살면서 왠지 모르게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아주 가끔 나타난다? 많이는 아니고 한두 명씩? 근데 있지, 너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였어."


나 역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이유는 모르겠는데 본능적으로 끌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런데 내가 다른 누군가로부터 그런 말을 들어볼 줄이야. 문득 K가 나에게 주는 사랑이 과분한 것이구나 싶었다. 내가 31년을 살면서 평생 들어본 말 중 손꼽을 정도로 감동적인 말이었다.


언젠가 K가 방을 정리하다가 나에게 카톡으로 웃으면서 사진을 하나 보내왔다. 사진 속의 종이에는 내 학번과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가 4년 전에 처음 병원 실습하면서 발표할 때 복사해서 다른 학우들에게 배부했던 내 보고서였다.



실습 부서가 달라서 몇 번 못 본 탓에 서로를 기억하지 못했을 뿐, 사실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이 처음으로 싹튼 것은 막학기가 아니라 4년 전이었던 셈이다. 둘 다 동시기에 2년을 휴학한 끝에 막학기에 재회한 것이고. 결국, 우리는 함께할 운명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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