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종이 한장 차이

내 맘대로 인생연습 ㅣ 김은지

by 한공기
사진.JPG 스토리 중독자


저는 스토리 중독자예요. 어렸을 때는 만화랑 소설에(주로 만화에) 빠져서 살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영화에 빠져 살고 있어요. 스스로 이야기에 중독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제가 음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작가 프로필 ㅣ 김은지

그냥 평범한 대학원생이에요. 회사에 다니다가 학교로 돌아간 거라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보다 나이가 많은 만학도예요. 처음엔 회사생활이 싫어서 도망치다시피 학교에 들어왔는데 다니다 보니 어느새 좋아져서 계속 학계에 남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국제정치를 전공으로 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꼰대 같은 면이 있어요. 위트 있고 매력 넘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는 대학에서 일한다.


원래 신분은 대학원생인데 학비도 벌고, 생활비도 벌어야 하니 대학의 비정규직 신분도 가지고 있다. 비정규직이라 맨날 출근은 안 하는데 오늘은 일이 있어 일찍부터 행정본부에 들러야 했다. 겨우내 리모델링을 하고 있어서 뭐가 바뀌었나 했는데 오랜만에 가본 본부 건물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일단 대학 설립 때 지은 건물이니 엄청 오래되었긴 했는데 이번 리모델링으로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로비를 가지게 되었다. 경비 아저씨 두 분이 들어가 있던 경비실이 없어졌다. 대신 뒷벽의 큰 모니터가 홍보영상을 계속 띄우고, 세계 시계가 주르륵 걸려 있다. 그 앞에는 하얀 대리석 상판이 올려진 큰 카운터가 생겼다. 바닥도 대리석으로 바꾸었는지 유난히 반짝인다. 3층까지 올라가다 보니 계단도 난간을 모두 유리로 교체하고 바닥 재질도 싹 바꾸었다. 한마디로 번쩍번쩍했다.


예전부터 본부 건물이 너무 낡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터라 ‘짧은 시간에 공사 잘했네.’라고 생각하며 볼 일이 있던 재무과 사무실로 향했다. 너무 오래되어서 본부의 사무실 건물 입구들은 모두 가건물 같은 슬레이트 문을 달고 있었다. 리모델링하면서 사무실도 바뀌었겠거니 했는데 실제 사람들이 일하는 사무실은 여전히 허름하고 낡은 모습이었다. 일을 마치고 나오다 보니 총장실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유난히 더 번쩍인다. 총장실은 이미 예전에 리모델링을 마쳤기 때문에 더 공사할 것도 없어 보였다.


건물을 나와서 바로 좌측에 있는 우편 발송실에 들렀다. 학교로 오는 모든 우편물을 각 기관에 맞게 분류해주는 곳이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찾는데 애를 먹었다. 사람들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있어서 한 번에 못 찾았다. 외부는 허름해도 안은 나름 깔끔했는데 움직임이 많은 일이라 그런지 남자 직원들만 계셨다. 오전 9시 30분인데도 벌써 땀 냄새가 났다. 자판을 두들기는 사람들이 이제 막 커피를 타 와서 자리에 앉을 시간에 맞게 우편물이 도착해야 하니까 아침부터 일을 서두르는 부서인 것 같다. 아무튼, 엄청 바쁜 와중에 내가 들어가 급히 필요한 우편물을 찾아가려는데 우편함이 비어있다. 다들 너무 바빠서 말을 걸 엄두를 못 냈는데, 하필이면 가장 바빠 보이는 분이 가까이 계셔서 조심스레 우편물 행방을 여쭤봤다. 그러자 칸막이 반대편에서 ‘어디라고요?’라고 내 질문에 답을 해준다.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니 몇 군데 전화를 걸어 내 우편물 위치를 파악해준다. 책상 위에는 지하철 역 입구에서 나눠주고 있는 세월호 리본이 보인다. 본인들 업무를 멈추고 내 우편물 소재를 파악해 주면서 단 한 번도 핀잔의 목소리나 귀찮은 내색이 없다.


기분이 좋아서 건물을 나서는데 아래 주차장에서 롱코트를 입을 신사가 여러 명 내린다. 모두 언뜻 보아도 좋아 보이는 옷에 중년임에도 관리가 잘되어 호리호리한 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학교 내의 부당해고 시위자들의 천막이 작년 겨울부터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건물은 새 것인데 마치 공사가 안끝난마냥 하얀 천막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옆을 중년 혹은 노년의 신사들이 서로 담소를 나누며 유유히 지나 반짝반짝해진 로비로 들어간다.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오랜만에 학교에 붙은 대자보를 구경해 본다. 몰랐던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이번에 인류학과 과사무실이 없어진단다. 다른 과와 통합된다는데 아이들의 분노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듯한 대자보가 붙었다.


한쪽은 갈수록 화려해지는데 다른 어떤 곳은 허름함을 유지하고, 또 다른 곳은 그 허름함도 빼앗기고 있다. 그분들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방금 본 노신사들이 생각난다. 왠지 그들의 웃음이 마음에 안 든다. 천천히 걷는 여유 있는 걸음걸이가 미워진다. 먼지 하나 안 붙은 부들부들한 롱코트가 너무 싫어진다.


마음에는 두려움이 든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과 내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나는 힘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고 싶은데, 힘을 갖지 못하든지 세상을 바꾸지 못하게 될 것 같다. 바꿀 능력을 갖추는 순간 내가 변할까 두려움이 든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잘못된 선택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상에는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힘을 키워 나갔지만, 나중에는 그 권력에 취해 나쁜 짓만 저지르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지조차 못 하는 사람도 아주 많다. 정치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그들을 비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권력의 속성은 항상 그렇다. 힘이 인간을 잡아먹는 데에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만이 필요하다. 그러니 오히려 힘을 가지고도 그 힘에 지지 않는 사람이 특별한 거다. 어찌 보면 그들이 더욱 독한 종류의 인간이라 볼 수 있겠다. 내가 가장 독하다고 생각하는 인물로 정의당의 심상정 의원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신념에 거침이 없으며 그런 거침없음을 위해 꾸준히 힘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 스스로 만들어낸 권력에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지금은 생각보다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관철하는 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이렇듯 나의 본보기가 롤모델이 되는 사람이 있음에도 나는 나의 속성을 자신할 수가 없다. 그녀가 겪었을 어려움을 상상도 하기 힘들고 내가 그걸 감내할 자신이 없다.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 잘 해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자신이 없다. 힘을 가지고 옳은 선택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생각도 종이 한 장 차이일 거다. 실제로 권력을 가진 입장에서는 생각만 조금 바꾼다면 훨씬 좋은 사람이 될 기회가 있는 거다. 하지만 이 종이는 투과성이 없다. 마치 A4지 아래에 머리카락이 하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머리카락을 볼 수 있고, 어디 있는지 파악이 된다. 좋은 사람이 될 방법이 분명하게 눈에 보인다. 하지만 종이를 찢어내기 전까지 그 머리카락은 절대 빼낼 수 없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과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겨우 종이 한 장의 차이인 거다.


나도 세월호 리본을 받아 가지고 다닌다. 가방에 하나 달아놨는데 어느 날 보니 없어져서 떨어졌나 했다. 알고 보니 엄마가 방을 청소하다 보시곤 리본을 떼어냈다. 잘 보여도 시원찮을 판에 밉보이면 안 된다고 한다.. 엄마를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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