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진화론 ㅣVincent
글을 쓴다. 하나의 글귀는 주제가 되어 설명과 예시를 부른다. 예시는 인물과 배경을 등장시켜 사연을 만들고 사연은 플롯의 옷을 입어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부르고 재미와 감동으로 현혹한다. 거짓말에 진실을 담아, 진실을 그럴듯한 거짓말로 위장시켜 현실의 감옥에 갇힌 이들을 상상 속의 우주로 탈출시킨다.
작가 프로필 ㅣ Vincent
아이들은 황홀한 피리 소리만 따라갈 뿐 남자의 정체 따윈 관심 없었다.내가 누구인지는 글이 결정할 것이다. 안타깝고 슬픈 로맨스든, 우주의 장대한 모험담이든, 인생에 대한 미천한 깨달음이든 인정욕구에 중독된 자아를 외면하고 순정의 진실만 담아 당신에게 글을 쓴다.
내 이름은 Vincent.
한 줄을 써도 부끄럽지 않은 글로
당신과 마주할 수 있기를...
태어날 때부터 인생의 목표는 승리라는 말에 인이 박혔다. 교회, 학교, 군대, 직장, 언제나 나의 주변은 승리와 패배뿐이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위대한 내일의 강박속에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다.
내 편을 닦달해서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웠다. 보이지 않는 적들이란 애초에 있지도 않던 존재였다. 그저 내가 만들어 낸 적들을 가공의 전쟁터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악에 받쳐 맞이했다. 모든 게 전쟁의 결과였다. 성공, 실패, 부귀, 가난, 사랑, 행복, 고난...
전쟁이 끝나면 항상 논공행상을 벌였다. 나와 내 가족, 동료들과 축제를 벌이거나 질타와 책임추궁의 반성회를 갖았다. 모두들 숨막혀 했고 나도 숨막혔다. 어느날 전쟁은 끝나고 모든 영광과 좌절의 순간이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때서야 알았다. 애시당초 전쟁은 없었다.
내 스스로 인생을 착각했고 내 생각을 주위에 강요했을 뿐이었다. 모든 걸 잃고 모두 떠난 뒤 남은 건 폐허였다. 그곳에서 진실이 보였다. 인생은 그저 여행에 불과했다. 매일 새로운 장소에서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아침을 맞이할 뿐이다. 그 여정에 좋고 나쁜 것은 없다.
苦樂而不
고난과 즐거움이 다른 게 아니다.
모든 걸 잃은 뒤 남은 것은 빚에 대한 책임뿐이었다. 그 화려한 과거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자리에서 예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예전의 십분의 일도 안되는 돈을 벌어서 허공의 연기처럼 빚갚는데 바쳤다.
집도 없고 차도 없고 가족도 친구도 없다. 외롭고 고달픈데 홀가분하고 즐겁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삶에서 작지만 영롱한 여유를 누린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쓴다.
가진 게 없으니 무거운 가방이 필요없다. 휴대폰과 헤드폰, 체크카드 한장이면 충분하다. 차가 없으니 전철 안에서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메모를 하고 자료를 찾는다. 쉬는 날에는 한가로이 산책을 하고 중고책방을 뒤진다. 스타벅스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인터넷을 검색한다. 돈이 많지 않으니 멋부리지 않아도 되고 만나는 사람이 없으니 상처 받을 일도 줄 일도 없다. 대단한 목표가 없으니 오늘이 불만스럽지도 않고 화려한 꿈도 없으니 지금이 소중하다.
얼마전까지 꿈꾸지 못한 삶이었고 그때는 아마 이런 삶을 경멸하거나 비웃었을 것이다.
내일이 오는 게 두렵지 않게 되었다. 가슴앓이도 없어졌고 피부도 표정도 좋아졌다. 드라마를 기다리고 좋아하는 배우의 신작을 기다리고 새로 나온 잡지의 매끈한 표지,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좋은 음악에 설레인다. 과거엔 그렇게 여행을 많이 다녀도 즐겁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 방을 떠날 일도 없는데 하루하루가 여행같다.
애초에 인생은 전쟁이 아니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었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부질없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살든 각자의 선택이고 행복 역시 각자가 알아서 느낄 일이다. 이렇게 즐거운 여행길을 숨막히는 싸움터로 만들었으니 나도 참 어리석었다. 다시는 그런 과오를 저지를 생각은 없다.
안드레아 거스키의 역작 'Rhein-ii'다. 그의 사진들은 가히 전쟁과도 같았다. 하지만 최고 걸작의 자리는 이 작품이 차지했다. 볼 때마다 멍해진다. 평화로움에 넋을 놓다가 언젠가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