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6화. 미영

소설 '안아주세요' ㅣ 화이

by 한공기
화이 프로필.jpg 땅고댄서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냄비는 이미 끓기 시작했다. 누군가 국자로 국물을 떠서 산처럼 쌓여 있는 뼈 위로 붓는다. 들깻가루가 뜨거운 국물에 젖으며 국물과 함께 흘러내린다. 뻣뻣하던 깻잎이 차츰 숨을 죽이면서 뼈에 눌어붙기 시작한다. 참을성 없는 숟가락 두어 개가 합세했다.


"이거 이미 익혀서 나온 거라 먹어도 돼. 빨리 하나씩 건져가. 라면 사리 넣게."


젤소미나가 재촉했다. 모두 앞 접시에 뼈 하나씩을 담고 소주잔을 채웠다. 건배를 하고 잔을 반쯤 비운 다음에 젤소미나는 라면 사리를 반 뚝 잘라서 냄비에 넣고 국물을 또 부었다.


"그런데 오늘 정모에 왜 이렇게 사람이 적었지? 지난주보다 덜 왔지?"

"정모지기가 홍보를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거 아니야?"

"정모지기가 홍보를 어떻게 더 열심히 해? 각자 기수장들이 회원들 독려를 해 줘야지."

"이번 달 들어서 부쩍 정모 참석인원이 준 것 같애."

"파티하고 나면 원래 사람이 늘어나야 정상 아니야?"


미영은 뼈에 붙은 고기를 젓가락으로 열심히 뜯으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사실 그녀는 동호회 회원 수나 운영에 대해서는 방관하는 편이었다. 그저 밀롱가에서 춤추는 게 즐거웠고, 밀롱가 후에 친한 이들과 뒤풀이를 가서 한잔 하는 게 낙이었다. 고민은 그들의 몫이지 미영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저번에 초급 마친 기수 애들도 이제 정모 참석해야 하잖아. 게네들은 왜 안 나와?"

"아직 밀롱가 다니기 무서운가 보지. 나도 그 시절엔 얼마나 겁이 났었는지.... 하하하."

"젤소미나, 네가 품앗이잖아. 네가 끌고 와야지 뭐 하는 거야."


냄비에서 라면을 길게 들어 올리던 젤소미나는 자신이 언급되자 젓가락을 삐끗했다. 라면이 미끄러져 냄비에 빠지면서 뜨거운 국물이 테이블에 튀었다. 사방에서 국물 폭탄을 맞은 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 왜! 나오는 애들도 있잖아. 원래 살아남는 인원은 소수인 거 몰라?"


젤소미나는 가디건 앞자락에 튄 국물을 물수건으로 닦으며 항변했다. 그녀는 미영을 쳐다보며 빈정댔다.


"나보다도 친구 관리도 못 하는 캔디한테나 뭐라고 하지 그래?"


미영이 접시에서 고개를 들었다.


"뜬금없이 왜 나한테 불똥이야? 그리고 친구 관리를 못 한다니 무슨 뜻이야?"

"네 친구란 애, 동기들 꼬셔서 다른 학원으로 빼돌리고 있잖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못 들었어? 그럼 너한테도 말 안 한 거야?"


미영은 처음 듣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젤소미나가 덧붙였다.


"우리 애들 중에 줄리앙이라고 순해 빠진 남자애가 있는데 걔도 꼬임에 넘어가서 같이 다닌대."

"와, 그새 커플 생긴 거야? 네 제자들 빠르다. 하하하"

"다른 애들은? 또 다니는 애들 있어?"

"아마 다른 애들도 작업하는 거 같아. 아직 잘 모르겠어."


젤소미나가 대답했다. 누군가 미영에게 말했다.


"캔디, 네 친구니까 네가 얘기해야 하지 않아? 동호회 가입을 해 놓고 양다리 걸치는 건 배신이야!"

"그 애 때문에 다른 동호회로 빠져나가는 애들이 생긴 거 아냐? 그래서 정모도 사람이 준거고?"

"그럴 수도 있지. 아무래도 다른 애들도 나도 다른 데 가 볼까 하고 영향을 받겠지."

"그것도 애들 빼돌려 갔다며? 캔디한테는 미안하지만, 운영진한테 얘기해서 그 애 짤라야 하는 거 아냐? 다른 애들 더 영향 주기 전에?"


대회가 점점 희선을 공격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미영이 그들을 말렸다.


"오빠, 그건 잠깐 기다려 줘. 내가 희선이랑 일단 얘기해 볼게."


미영은 일단 상황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희선과 얘기를 해 보면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미영의 말에 젤소미나가 비꼬듯이 중얼거렸다.


"여태 말도 안 한 애가 잘도 네 말을 듣겠다. 둘이 친구 맞아? 난 걔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어. 새벽별한테도 얼마나 꼬리를 치더니 딴 남자까지.... 순진한 척 걸레 같은 게..."


미영은 자기도 모르게 앞에 있던 물수건을 젤소미나의 얼굴에 던졌다.


"아이 씨, 더럽게!"


젤소미나가 벌떡 일어나서 미영의 머리채를 잡으려고 하면서 앞 접시를 엎었고, 테이블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야, 야, 진정들 해. 왜 몸싸움을 하고 그래."

"그래, 말로 해, 말로. 자, 자, 그만 하고 앉아."


뒤풀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두 사람을 말렸다.


"캔디, 네가 참아. 젤소미나가 원래 맘에 없는 소리 잘 하는 거 너도 알잖아."

"맘에 없는 소리 아니거든? 오빠, 내가 뭐 틀린 말했어? 내 말이 맞잖아!"


젤소미나가 소리를 빽 질렀다. 미영도 받아쳤다.


"너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내 친구를 핑계로 나한테 시비 거는 거 아냐, 지금? 그리고 네가 새벽별 좋아한다고 모든 여자가 새벽별한테 꼬리 치는 걸로 보이니? 네가 새벽별한테 차인 게 내 친구 탓이야?"

"야! 너 말 다했어?"


젤소미나가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미영은 지갑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테이블에 던지고 일어섰다. 그녀의 등 뒤로 울먹이는 젤소미나와 그녀를 달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미영은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차가웠다.


미영은 머리를 식히기 위해 걸었다. 젤소미나가 빈정거리면서 말을 심하게 내뱉는 건 하루 이틀 겪은 일이 아니었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은 젤소미나는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본심이 아닌 말을 하고 나중에 후회하곤 했다. 그래도 뒤끝은 없는 타입이어서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왔는데, 희선을 욕하는 말을 들으니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젤소미나의 '둘이 친구 맞아?'라는 말이 미영의 귀에 맴돌았다.


"희선이는 어쩜 나한테 한 마디도 안 했지?"


미영은 서운함보다 동료들 앞에서의 민망함이 더 컸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한기를 느끼자 허기도 따라왔다. 접시에 남아 있던 감자탕 뼈가 눈에 아른거렸다. 미영은 어쩐지 짜증이 났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이름을 찾았다. 윌리엄. 몇 번 신호가 가더니 상대가 받는다.


"뭐 해? 웬일로 전화를 바로 받는 걸 보니 오늘은 혼자 있나 보네? 응, 나 기분 완전 안 좋아. 싫어. 재원 씨가 기분 풀어줘. 지금 간다?"


택시를 잡았다.


"방배동이요."


미영은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불빛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후 예배 후에 모이는 중고등부 그룹에서 늘 뒤쪽 끝에 혼자 앉아있던 무표정한 얼굴 하나를 떠올렸다.


"야, 너 우리 위층 살지? 3동 4층. 나 2층 살아. 전부터 너 봤다?"


미영이 말을 걸었을 때 희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었다. 그날 이후로 미영과 희선은 단짝이 되었다. 미영이 무슨 이야기를 하건 희선은 무조건 다 믿었다.


"내 남자친구가 날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며칠 전에 만났을 때 맥주를 마셨거든. 나보고도 마시라고 하더라구. 내가 맥주 안 마셔 봤다고 하니까 괜찮다고, 한번 마셔보라고 그래서 한 모금 마셨더니 얼굴이 빨개지는 거야. 너무 챙피해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까, 나보고 얼굴이 빨개지니까 너무 사랑스럽다고 그러는 거 있지."


희선은 놀라움과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미영을 바라보았었다. 미영은 그런 희선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계속 이야기를 지어냈다.


"우리 아빠는 날 공주라고 부르셔. 지금은 사우디 아라비아에 일하러 가셨는데, 이번에도 선물을 보내주셨어. 아이 섀도우하고 볼터치하고 립글로스가 들어있는 화장품 상자인데, 케이스에 장미꽃 조각이랑 보석이 박혀서 반짝반짝해. 빨리 고등학교 가고 대학교 가서 쓰고 싶다."


미영은 희선 앞에서 자랑을 했지만, 사실 아빠는 미영이 철이 든 이후로 더 이상 집에 오시지 않았다. 이사 오기 전 동네에서는 첩의 딸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했었다. 미영은 희선의 앞에서만큼은 절대 주눅 들고 싶지 않았다. 미영은 피부가 유난히 희고 머리가 갈색이어서 이국적인 외모를 가졌다. 그 덕분에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받았다. 희선과 다니면서 사람들의 시선에서 의심의 눈초리가 사라졌다. 희선은 평범하고 얌전했기 때문에 희선과 있으면 모든 사람이 미영에게만 집중했다. 미영은 그게 좋았다. 그녀에게 있어 희선은 꼭 필요한 소중한 친구였다.


"미영아, 전에 말했던 재원 씨야. 재원 씨, 여긴 내 제일 친한 친구, 미영이."


카페에서 재원을 소개받았을 때, 미영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재원은 미영이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이런 남자가 희선과 사귄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미영은 자신이 더 잘 어울리는 상대라고 믿었다.


"너 나랑 이러는 거 희선이가 알면 어쩌려고 그래?"

"어머, 재원 씨가 그런 말할 자격 있나? 자기는 나 말고도 여럿이면서?"


재원은 예상했던 대로 달콤하고 황홀했다. 여자가 원하는 것을 잘 알았다. 희선에게도 이렇게 해 주겠지 생각하니 질투심이 일었다. 희선이 재원의 딴 여자를 알아내고 헤어진 이후에도 미영은 재원을 계속 만나 왔다. 순진한 내 친구는 아무것도 몰랐다. 설령 둘이 나눈 메세지를 봤어도 희선은 몰랐을 것이다. 둘 다 윌리엄과 최 대리란 이름으로 저장돼 있었으니까. 그런 바람둥이 당장 헤어지라고 희선을 달래면서 미영은 살짝 죄책감을 느꼈었다.


젤소미나가 희선을 '걸레'라고 불렀을 때, 미영은 순간 자신에게 한 욕처럼 느껴졌다.


"아, 짜증 나...."


미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화려한 야경을 자랑하던 다리의 조명은 이미 꺼졌다. 가로등마저 하나 건너 켜져 있다. 늦은 밤의 도시는 어둡고 적막하다. 맞은편 차의 불빛이 지나갈 때마다 유리창에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미영은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제 재원 씨도 정리해야 할까...."


미영은 혼자 중얼거렸다. 어쩌면 오늘 밤이 마지막 만남이 될 지도 모른다고 미영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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