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현상곡ㅣ신정훈
저는 글을 막 씁니다. 브레인스토밍하듯 손가락 가는대로 놔두는 식입니다.
작가 프로필 ㅣ 신정훈
현상을 쿨하게 응시하고 그것에 담긴 의미를 즉흥적인 글쓰기 과정으로 풀어내려 한다.
고대 그리스어 ἄθεος(atheos)에서 유래된 단어 ‘Atheism’은 “신이 없는”을 의미하는데, 현대에 와서는 무신론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18세기에 접어들며 커지는 회의주의와 종교 범죄로 인해, 현대적 의미의 무신론자들이 탄생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30%~ 52%가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다. 무신론자의 개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성적 판단 후에 신의 존재를 거부, 혹은 유보하는 측과 생각도 관심도 없는 측이 그것이다. 종교에 관심이 많지만 나는 무신론자이며, 전자의 경우에 속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묻는다면 아타락시아, 쾌락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의 말을 인용해 설명하고 싶다.
"신이 악을 막으려는 의지가 있지만 불가능하다면? 신은 무력하다. 신이 악을 막는 것이 가능함에도 의지가 없다면? 신은 악의적이다. 신이 악을 막을 수도 있고 의지도 있다면?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신이 악을 막을 수도 없고 의지도 없다면? 그럼 왜 여전히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부도덕한 일들, 인과응보라는 말을 들이밀 수 없는 이들의 불행은 의문을 키웠다. 모든 신의 존재에 회의적이나, 이 경우에는 기독교에 한정한다. 절대 선이라는 예수, 혹은 하나님은 어째서 이런 일을 방관하고 있는가? 그리고 구약과 신약에서 보여주는 선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부 종교에서 선악의 구분은 신의 역할이라고 한다. 오직 단 하나의 존재인 선한 신만이 선과 악을 결정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선악은 순전히 신의 관념이다. 여기서 모순이 생긴다. 우리는 선함과 악함의 구분이 없으면서 어떻게 신이 선한 것을 알 수 있는가? 질문은 뫼비우스의 띠 위를 달리고 달리게 된다.
편의상 불가지론을 무신론의 개념에 포함해 칭하나, 굳이 나눈다면 나는 불가지론자다. 왜냐하면, 알 수 없는 것, 모르는 것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설사 많은 모순과 불합리를 목도했다 하여도, 이를 근거로 100%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신의 존재에 관해 묻는 그래프를 그려, 있음을 0, 없음을 10으로 놓는다면 9와 10 사이에 발을 올릴 것이다. 무신론자이지만 그렇다고 종교의 유용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사교 생활이나 새로운 만남을 목적으로 할 때, 기독교 혹은 기타 종교는 좋은 만남의 장이 될 수 있다. 종교인의 관점에서 언짢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여타 동호회나 모임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깊고 오랜 만남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인생의 위기에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어머니는 작년 초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나뿐인 아들을 먼 타국 땅에 보내놓고, 홀로 외로운 생활을 이어가셨다. 몸까지 안 좋은 상황이라, 종종 약한 소리를 하셨다. 삶의 목적이 아들의 성공과 행복이었고, 그 외엔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종교를 갖게 된 후론 다른 인생의 목적을 찾으셨다. 어깨에서 부담이 조금 덜어진 것도, 어머니가 정신적으로 건강해지신 것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작년 말, 어머니에게 안 좋은 사건이 있었는데, 아들을 대신해 곁을 지켜준 것도 같은 교회 사람들이었다. 혜택을 본 건 어머니뿐만이 아니다. 종교의 힘으로 가정불화를 극복한 친척을 보면서, 종교의 효능에 감복했다. 그들에게 종교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다만 아브라함계 종교를 위시한 여타 종교에선 이런 모습을 증거로, 자신들이 세상에 전파한 유익함을 논한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대중은 이를 외면한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종교의 테러와 학살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뉴스에서 성전이란 이름으로 살인과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는 수많은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이슬람교뿐만이 아닌, 근본주의, 교조주의화 된 종교의 공통점이다. 역사적으로 종교가 살린 사람과 죽인 사람의 수를 헤아려 본다면, 역시 종교에 긍정적일 수만은 없다.
어떤 이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믿음이 커진다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된다. 무신론자들의 주장이 더 와닿는 건 그 방증이 아닐까. 여기 몇 가지 인상적인 주장이 있다.
첫 번째로 무신론은 우리의 도덕률의 기반을 붕괴시킨다는 기독교의 주장에 대한 무신론자의 태도 표명이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신을 전제하지 않는 사회에선 도덕이 생길 수 없다. 그러나 동양 사상 중 하나인 유교를 통해 신을 가정하지 않고도 충분히 도덕과 바른 정치란 어떤 것인가 설명할 수 있다. 신을 가정해야만 도덕률이 생긴다는 믿음에서 발생한 전제인데, 이 경우 밤이 새도록 반대 사례를 말할 수 있다. 오히려 리처드 도킨스나 다른 무신론자는 벌을 받지 않으려, 지옥에 가지 않으려는 등의 목적을 갖고 행한 선은 진정한 선이 아니라고 한다. 나 역시 이성과 학습을 통해 생긴 도덕으로 행한 선이 더 낫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두 번째, 인간 인식 범위 바깥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종교인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서 무신론자들은 말한다. 우리의 인식 방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접했을 때, 종교인은 종교적 설명, 성경에 맞춰 해석하며, 교리에 반하는 현상과 방식은 거부한다. 지동설을 주장한 조르다노 브루노의 최후는 어떠했는가?. 또한, '인간 이상의 존재'의 존재 가능성이 아닌 존재 자체를 주장하는 부분에서 이미 그들의 비판은 논리를 잃는다.
마지막으로 우주 창조에 관한 주장이 있다. 종교인과 무신론자가 만났을 때 나오는 중심 이슈이다. 종교인은 '신이 없다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어쩌다 우연히 생긴 거로 보는 거야?'라고 물어온다. 어려운 질문이다. 그래서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질문에 질문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시작이 있어야 한다. 우주는 빅뱅으로 만들어졌어. 그럼 그 빅뱅은 어떻게 발생한 것인가. '신이 있음'에 관한 반증으로 논리와 합리성을 논하면서, 그냥 발생했다고 말하는 건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 맨 처음에는 누가 있었단 말인가? 방아쇠를 당긴 역할만을 인정해 편하게 이신론자임을 자처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쩐지 비겁하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 침묵하겠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연의 사전적 정의는 인과율과 무관한 사건의 발생이다.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것이 우연이라면, 세상만사가 우연이란 말이 된다. 당장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게 종교이고 신중하게 결론을 유보하는 것이 무신론이라면, 여기서도 무신론자의 편에 서겠다.
학창시절 스스로 질문을 했다. 나는 왜 사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을까? 어떤 날은 생각했다. 큰 부를 얻고, 예쁜 여자랑 결혼한다고 계속 즐거울까? 영원한 것은 없는데, 결국 사라지겠지. 죽으면 끝이니까. 생각이 길어지면 곧잘 맥이 빠지곤 했다. 그런 나에게 기독교인인 가족·친지들은, 만날 때마다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을 했다.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과 천국의 안락함을 약속받고, 현세에서도 충만할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큰 절차 없이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니. 교회나 성당은 영원한 행복을 구매대행 해주는 고마운 곳이었다. 그 후 몇 차례, 종교의 문을 두드린 적이 있다. 기도를 통해 간청까진 아니지만 믿음을 요구했다. 하지만 매번 돌아올 땐 빈손이었다.
뜬금없지만 나는 CD 게임을 좋아했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좀처럼 진행이 안 되면, 에디터 프로그램을 사용해 최강의 무기를 얻고, 능력치를 최대로 올렸다. 또 공략집을 보고 시행착오 없이 이야기를 진행했다. 게임은 쉬워졌는데, 재미는 없었다. 길지 않은 시간 살다 보니 게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것이든 쉬우면 재미가 없다. 삶이 게임이라면, 이번엔 에디터나 공략본 없이 플레이하고 싶다.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한 여정에, 몇 번 헤매더라도 직접 찾아 나서는 것이다. 시행착오, 그것이 게임으로 얻는 재미의 근본이다. 전지전능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삶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다. 이것이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다. 그래서 나는 무신론자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