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재키의 직장 방랑기 2화

뚜.뚜.뚜.뚜... PC 통신 ㅣ 재키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2-11 오후 4.24.55.png 직업 유랑자


1997년 pc통신이 한창 흥하던 시절 저는 대학 1학년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방제는 <음악/영화/책 이야기하실 분 오세요~~(1/10)>였습니다. 채팅방에 찾아온 사람들과 진지하고 순수한 대화를 많이 나눴고 그때 알게 된 사람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기도 합니다.


작가 프로필 ㅣ 재키

대학 졸업 후 영화감독이 되려고 충무로 영화판에 뛰어들어 가진 고생을 다했다.

영화판을 떠난 후 수많은 직종에서 일했다. 나의 직장 유랑 경험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가출해서 내가 찾아간 곳은 누나가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 전주였다. 누나는 고향을 떠나 전주에서 홀로 작곡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이었다. 전주 고속터미널에 도착해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충격을 받았겠지만 금세 상황을 파악했는지 일단 집으로 오라고 했다. 전화를 끊기 전 부모님께는 아직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누나는 알았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누나가 알려준 곳으로 갔다. 택시 기사님의 말투에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듣고 ‘내가 멀리 오기는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택시 기사님은 무슨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내가 살던 곳에서 만난 사람들 중엔 그렇게 수다스러운 사람들이 없었다. 낯설고도 친근한 기분이 들었다. 자취방에 도착해 보니 제법 아늑한 임대 아파트에 방이 두 개나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방에 내려놓으니 드디어 내가 가출을 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긴장이 약간 풀리니 배가 고팠다. 일단 밥을 챙겨 먹고 누나와 함께 아파트 주변을 산책했다. 화창한 날씨였다. 누나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나의 갑작스러운 일탈에 조금 당황해하며 이것저것 물어봤고 나는 한숨을 쉬며 나의 심정을 토로했다. 그때만 해도 누나와 대화가 잘 되는 편이었나 보다. 나의 이야기를 듣던 누나는 대뜸 내일 교회에 가자고 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랑 상담을 해보란다. 앞으로의 일정이 막막하던 나로서는 거절할 핑계가 없었다. 잠들기 전에 가방을 열어 챙겨 온 책들을 들춰보다가 시집을 꺼내 들었다. 타고르의 <기탄잘리>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시집을 왜 샀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꾸역꾸역 읽었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추천을 해서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할 것 같은 유명한 책들을 챙겨보던 때였던 것 같다. 시집을 몇 페이지 넘기다 잠이 들었다.

나는 학교 교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체육 시간이었나 보다. 주변을 둘러보니 책상 위에는 친구들이 벗어 놓은 교복들이 각자의 성격을 따라 놓여 있었다.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교복, 가지런히 접어 놓은 교복, 의자에 걸쳐놓은 교복. 나는 교복을 입고 홀로 책상에 앉아 알퐁스 도데의 <꼬마 철학자>를 읽고 있었다. 창 밖을 바라봤다. 뭉게구름이 줄을 맞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 당시 바라본 구름은 늘 어딘가로 바삐 가고 있었다. 한없이 구름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아까 있었던 녀석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그 녀석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금세 또 다른 구름이 몰려왔지만 나는 늘 사라져 버린 구름을 아쉬워했다. 둥둥 떠나가는 구름을 보며 나도 같이 둥둥 떠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늘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했다. 너무 갑갑하다. 진저리를 치며 온몸을 아둥바둥거리다가 책상을 걷어차고 의자에서 떨어졌다.

꿈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낯설다.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벌떡 일어났다. 누나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늘 그렇게 챙겨 먹는 건지 동생이 왔다고 특별히 차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제법 근사한 상차림이었다. 맛있었다. 나는 늘 밥을 맛있게 잘 먹었다. 밥 먹는 모습이 복스럽다며 좋아하는 어른들이 많았다. 특히 엄마는 내가 밥 먹는 모습을 보면 '내 새끼~'이러면서 엉덩이를 토닥이곤 했다. 나는 어릴 때는 그게 좋았지만 점점 싫어졌다. 다행히 누나는 엉덩이를 토닥이지 않는다.

"목사님께 전화드렸어. 얼른 오라고 하시더라"

"..."

교회는 버스를 타고 30분쯤 가서 언덕을 한참 올라 언덕이 끝날 때쯤 길가에 있었다. 임시 가옥을 개조한 건물이었다. 지붕에 달아놓은 십자가가 없었다면 공사현장에 임시로 지어놓은 건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교회에 다다랐을 때 문이 열리더니 왠 어린 여자아이가 나왔다. 어딘가로 가는 길이었나 보다.

"언니 왔어요? 어서 와요. 어? 이분이 동생? 안녕하세요?"

목사 딸이었다. 츄리닝을 입고 있었는데 교회의 성전에 청소하러 가는 중이었다고 했다. 좀 있다 점심 식사 때 보자고 하며 사라졌고 나는 교회 건물과 붙어 있는 사택으로 목사를 만나러 갔다. 누나가 소개를 했고 인사를 나눴다. 목사는 최대한 나를 다 이해하고, 괜찮다는 눈빛을 하고 나에게 조언을 시작했다. 최대한 종교적인 압박감은 느끼지 않도록 주의하는 눈치였다. 그런 목사가 내심 고맙고 안심이 되었지만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교회와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뿌리에서부터 싹을 틔우고 있던 시기였고 그걸 누나가 알기 때문에 미리 목사에게 귀띔을 해주었나 보다. 결론은 학교를 마치고 나서 생각해보라는 뻔한 말을 해줄 뿐이었지만 심약한 상태였던 나는 목사와 대화를 하며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며 목사의 말을 흘려 들었다. 금세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되었고 목사 사모가 한상 가득 점심을 차려왔다. 어느새 목사 딸도 상차림을 거들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었나 보다. 투피스의 정장에 가까운 느낌었는데 상의는 아이보리색 블라우스였고 치마는 무릎 위까지 오는 검은색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니 제법 이쁜 여자아이 같았다.

식사 시간에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밥 먹을 때 분위기가 다르다. 그리고 반찬의 개수가 다르다. 맛도 확실히 다르다. 밥상을 보고 침이 가득 고였다. 다정하게 대화를 하며 식사하는 밥상이라니.

아무렇지 않은 척 밥을 씹어 넘기며 가슴속 뭉클함도 숨겨 넘겼다. 영화 속에서 보던 밥상의 그림이었다. 가슴 따뜻한 식사를 마치고 나자 차와 과일을 내어 온다. 목사 딸의 이름은 지선이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 얼굴이 예쁜 것은 아닌데 싹싹하고 밝은 성격 탓에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아이였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눈이 한번 마주치고 나서부터 나는 괜시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헛기침을 하며 목사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척했다. 목사 딸의 치마가 살짝 들려 허벅지가 드러나는 순간 가슴이 조금씩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맛이 떫어 왜 먹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녹차를 연신 들이켰다. 안간힘을 다해 진정을 한 후 누나를 보채 교회를 빠져나왔다.

"오빠, 잘 가요. 또 오세요. 언니. 이번 주 주일에 반주 잘 부탁드려요." 누나는 이 교회에서 목사 딸과 번갈아가며 찬송가 반주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빠라니...?' 목사 딸이 인사하는 모습의 잔상이 남아 집에 돌아오는 길에 누나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자 누나는 방 정리를 한다며 한참 동안 짐을 이리저리 옮기더니 주일에 반주하게 될 찬송가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눈을 붙였다.

누나가 부른다. 전화가 왔다고 받아 보란다.

"여보세요. 오빠. 저예요 지선이."

생각지도 못한 전화에 깜짝 놀랐지만 반갑다.

"오빠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바람쐐러 나오실래요?"

"네?"

"오빠 기분 전환도 하실 겸. 전주 시내 구경시켜 드릴게요. 아빠가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용돈도 주셨어요."

"아 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깜짝 놀랐지만, 무엇보다 반가운 소리였다. 하지만 못 이기는 채 수락하고 약속 장소를 안내받은 후 전화를 끊었다.

누나가 쳐다보며 웃는다. 나는 마주 쳐다보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가출한지 겨우 이틀째이고 아직 아무런 계획도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다정한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나에게 약속 장소에 가는 길을 다시 물어보고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따뜻한 바람에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산들산들 흔들거리는 게 보인다. 전주는 도로가 한산해서 그런지 가로수들이 내가 살던 울산보다 더 많이 보인다. 차들도 살살 달리며 여유가 있는 느낌이다. 도시의 분위기에 따라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보고 느끼게 되었다. 버스가 천천히 서서 나를 태웠다. 좌석이 많아 밖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창밖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해볼까, 신문배달을 알아볼까. 온갖 고민과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저 멀리 정류장에 목사 딸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서둘러 부저를 누르고 버스 뒷문으로 내리다가 차가 흔들리며 버스 손잡이에 팔꿈치를 찧었다.

잠시 또 꿈에 빠졌었나 보다. 누나가 내 팔꿈치를 흔들고 있었다. "일어나 봐. 엄마, 아빠 오셨어."

"뭐라고?!" 정신을 번쩍 차리며 벌떡 일어났다. 부모님이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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