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이야기 ㅣ 이정민
전 건망증이 심해서 병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전 10시반에서 11시까지 무엇을 했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물은 몇 잔을 마셨는지...흘러간 시간 속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감정들까지도 세세하게 기록하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이정민
직장인. 성격이 무척이나 쾌활한데 힘든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과장일지도 모름.
#1
"응 그래, 오늘 하루는 잘 보냈고 ? 점심은 뭐 먹었어 ?"
"그.. 건물 안에 있는 식당에서 먹었는데 그.. 내부식당 ?"
"... 구내식당 ? "
"아 맞다 맞다 ㅋㅋ 구내식당 ! "
#2
"오빠 오빠 우리 다음에는 몬스터 길들이기 보러가요 ! "
"몬스터 길들이기 ?"
"아 맞다 맞다 몬스터 길들이기 투 ! 원은 이제 극장에서 안하지여 ? ㅋㅋㅋ"
"아 드래곤 길들이기 투 ? "
"아 맞다 맞다 ㅋㅋㅋㅋㅋㅋㅋㅋ아유 나 너무 크게 말했네 아이구 부끄러워 ㅋㅋㅋㅋㅋ"
나는 어릴 적부터 엄마 어떤 것을 '읽는' 것을 보고 자랐다. 학생 때는 단순히 흥미 위주의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가는 것이었는데도,‘도서관’이라는 단어에 '그래 공부하러 가는구나'라고 기특해하시는 할머니의 배웅을 받았다. 처음 몇 번은 공부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 때 할머니가 '그래, 그게 공부지 뭐'라고 하셔서 공부인 것으로 결론난 이후로 대외적으로 공부하러 가서 사실은 책을 읽다가 오곤 했었다. 그 덕에 고등학생 때는 별달리 국어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언어 점수는 곧잘 나오곤 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언어 시험이 어떻게 느껴졌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언어 시험은 오락실에서 하는 틀린 그림 찾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특정 단어 혹은 말하고자 하는 바 찾기.
학원을 두 달 정도 다녔던 것 외에는 특별히 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학교 외에서 영어를 접할 일이 별로 없었기에 고1까지 영어점수가 정말 안 좋았다. 하지만 당시 영어 선생님이 '영어공부는 노력이다. 문법을 포기하여도 단어만 많이 알면 80%는 맞출 수 있다' 고 하셨다. 그 말에 자극받아 '잘'은 못하지만 '열심히'는 하는 고로 외국어 능력 시험도 언어 시험처럼 틀린 그림 찾기를 했던 것 같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 '정민이처럼 공부하면 나는 서울대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었는데 당시에는 칭찬인지 알았다.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내가 서울대를 못 갔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칭찬이 아닌 것 같다 ㅋㅋ)
여튼 어린 시절 책을 읽었던 덕에 언어와 외국어에서 혜택을 많이 봤었다. 언어능력을 평가받을 때 유리했던 셈인데, 지금은 부작용에 시달리는 것 같다. 속독하는 버릇을 가지다 보니까. 그렇게 길들여져서 그렇게 읽으면 안 되는 책들도 그렇게 읽고 있는 것이다. 수능 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수능 칠 때 언어능력을 푸는 방법으로 책을 읽는다. 수필이나 정보전달 위주의 책을 읽을 때는 부작용이라는 생각이 덜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는 대화문 위주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시를 읽을 때는 사실 좀 비참한 생각까지 든다. 이 시를 썼을 사람을 생각하면 좀 미안하기도 하다. 그럴 땐 더 이상 춤추고 싶지 않은 빨간 구두가 된 기분이다. 까만 구두를 신고 찬찬히 걸어봐야지.
책과 도서관을 좋아하고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책을 읽거나 고르면서 지낸다. 그래서 남자친구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을 때도 '뭐하고 있었어?' 라는 물음에 흔히 드라마에서 아가씨들이 발톱에 매니큐어 칠하다가 내숭부리는(?) 의도로 할만한 '응, 책 읽고 있었어.'라는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럼 남자친구는 '그래 네가 책 읽고 있다고 하면 진짜 책 읽는 거지.'라고 했고, 그럼 왠지 나의 진정성이 증명되는 듯 하여 기분이 좋았었다. 하루는 남자친구가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손에 꼽히게 책을 많이 읽는데, 말을 잘 못하는 것 같애 ㅋㅋㅋ' 라고 말했고, 나는 이것이 칭찬이면서도 웃겨서 고등학교 친구한테 말했다. 그랬더니 친구가 "니 남자친구가 아직 뭘 모르시네. 니가 책을 그마이 읽으니까 그 정도라도 말을 하는 거지. 안 읽었으면 어쩔 뻔 했노." 라고 했다. 친구의 말이 너~무 웃기고 내 주위 사람들이라면 내가 말을 하면서 단어선택에서 머뭇거리는 상황을 몇 번씩 봤었을 것이므로 이 이야기를 하면 재밌는 화제가 된다.
남자친구가 말한 '말을 못한다'는 것은 단어 선택을 적확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사실 맨 위에 상황처럼 '구내식당'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마침 그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나의 언어능력보다는 단순히 메모리가 작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비휘발성메모리에 저장은 돼 있지만 휘발성메모리가 작아서 동시수행을 잘 못하는 것이다. 여튼 머리가 안 좋아서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나지 않아서 문제인 것이다. (근데 진짜 가끔 말 자체가 입에서 안 나올 때가 있다. 말을 더듬는 것도 아닌데 이럴 때는 나도 내가 답답하다)
하지만 때때로 말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말을 특별히 못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위에서 부정했던 것처럼) 특별히 잘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왠지 속 빈 강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한테 '말을 잘한다'라고 말했던 사람은 아마 내가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말을 잘(자주?)한다.'라고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듣기에는 유창하게 잘한다는 말인 것 같아서 그것에 대해서 부정하는 근거는 내가 그 주제에 대해서 평소에 많이 생각해보고 읽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누구든 '당신이 좋아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하면 다른 어떤 주제보다 편하게 오래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비교적 다른 사람들보다 관심 분야가 넓어서 얻어걸리는 게 많탈까..
말을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곳은 독서모임이다. 독서모임에 오래 나가다보니까 주워들은 게 많아서 어떤 개념에 대해서 전공자만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관련된 경험이 많다. 이 둘의 차이라면, 정확하게 아는 것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전공한 사람들이 서울의 역사나 각종 수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이고, 관련된 경험이 많은 것은 ‘서울’에서 자란 것이다. ‘서울’을 전공한 외국인이 서울사람들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겠지만, 서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했을 때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전공 외국인보다 할 수 있는 말이 더 많지 않을까. 그래서 삶에 대한 태도나 가치관 등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한다면 또래들 중에서는 풍요로운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독서모임에 나가면서 영어회화스터디도 했었는데, 영어회화스터디에서 신입회원이 물어보는 말 중에 하나가 '아까 굉장히 말을 잘하는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이 보기에는 ㅋㅋ) 얼마나 하면 그렇게 되나요?' 이다. 그럼 보통 해주는 말이 '그냥 맨날 와서 말하는 연습을 하다보면 는다. 처음에는 부담 갖지 말고 와서 듣는다고 생각하고 오세요.' 이다. 그리고 독서모임에 처음 와서 긴장한 신입회원에게도 '외국어 배울 때 리쓰닝 먼저 하고 스피킹 하는 것처럼 독서모임도 그렇게 생각하고 오세요.'라고 한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것에서 선입력 후출력인 것 같다.
친구가 한 말이 웃겨서 자주 말을 옮기다보니 그 말을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는데(기록하지 않은 일상은 휘발된다) 독서모임에 가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친구 말이 진짜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인생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지금까지 여러 번 생각하고 말해왔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과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할 일이 있었을까? 내 몸은 다 컸지만, 나의 언어능력으로 대표되는 정신적인 능력은 내가 노력할수록 조금씩이나마 향상되는 것 같아 새삼 뿌듯한 마음이 든다. 듣기 말하기와 같은 맥락으로 글 쓰는 것도 그렇게 될 것 같다. 글쓰기가 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독서모임에서 겪었던 것처럼 파운틴에서 오래 있다 보면 문득 '나의 쓰기의 원천은 파운틴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최근에 다른 회원 분이 올려주신 글처럼 다른 분들 글을 재밌게 읽다보면 나의 쓰기도 늘 것 같다. 앞으로도 열심히 읽고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