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고찰

지구여행자 ㅣ 해원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4-01 오후 2.14.40.png 지구여행자


작가 프로필 ㅣ 해원

현재 요가원에서 일하면서 요가를 배우고 있고, 주말에는 종종 커피숍에서 일하고 있어요.

요가로 신체를 단련하고, 글쓰기를 통해 정신을 단련해서 초인이 되고자 합니다. (...)

필살기는 음... '머뭇거림...'입니다. -_-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고찰

- 부제 : 인간이 살인과 자살을 하면 안 되는 이유



인간은 왜 살인과 자살을 하는가?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살인하지 말라 하셨을까? 문명 사회에서 인간의 공격성은 왜 제거되지 못하는가? 이 파괴적인 힘은 무엇이며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번 글은 그 답이 없는 물음에 대한 나름의 고찰이다.


1.
질문 하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아가 최고로 안정된 ㅡ 소위 말해서 행복한 ㅡ 상태가 무엇일까?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타인(외부세계, 이하 세계로 통일)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혹은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사람들, 심지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일지언정 나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순간에, 행복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나를 쏟아부어 만든 창조물(나의 대리물)이, 타인(세계)에게 인정받을 때 순수한 기쁨과 희열을 느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런데 위 명제의 두 가지 조건이 하나라도 희생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타인에게 인정받았으나 그를 위해 <나 자신이 왜곡되었을 때>, 혹은, 내가 특별히 왜곡되진 않았지만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타인에게 받여들여지고 싶어한다.' 그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현재 상태가 있다. 그리고 그 격차를 실제 삶 속에서 확인할 때 당혹감, 죄책감, 수치심, 분노, 뭔가 잘못되어있다는 감정을 느낀다. 고통이 된다. 고통이 누적되어 당사자가 소화할 수 있는 분기점을 넘어가면 '공격성'을 낳는다.

그 공격성이 밖으로 향하면, 분노를 잘 표출하고 외부에 있는 특정 대상을 혐오하는 유형의 사람이 된다. 반대로 그 공격성이 안으로 향하면 우울하고 침체되어 있으며 자기자신을 학대하고 혐오하는 사람이 된다. 보통은 양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혼재되어 있다. 두 가지 혐오가 한 쪽으로만 극에 달하면 파국이 된다. 외향적 공격성의 끝은 타인을 살해(세계를 파괴)하는 것이고, 내향적 공격성의 끝은 자기살해, 자살이다.



2.
그렇다면 이 ‘공격성’을 어떻게 소거해야 하는가?

내 생각은 이렇다. 이 공격성은 세상에 분출해 나오려는 자아의 에너지다. 나는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내재된 원시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현재 느끼고 있는 불만족스러움, 불편함, 불완전한 상태를 뚫고 나가서 완전한 상태(앞서 말한 자아가 행복감을 느끼는 상태)가 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가 있다. 나는 '정체성에 대한 소소한 사색'에서, 우리는 무엇이냐 물으며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의지>'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 정체성이란 우리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그 상태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다. 이 근원적 열망으로부터, 우리는 인종·문화권 등 사회문화적인 넓은 의미에서의 환경, 가정·학교 등 개인적인 좁은 의미에서의 환경, 개인이 타고난 재능, 우연적 사건에 대한 경험과 학습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여 각자의 개성과 환경에 맞는 방식으로 현실의 삶에서 ‘그 상태’에 도달하려는 욕구를 갖게 된다. 행복한 가정을 이룸으로써, 신에게 헌신함으로써, 정치나 운동으로 사회를 변혁함으로써, 사업으로 신제품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글을 쓰고 예술을 함으로써. 자신에 맞는 방식으로 자아를 실천하고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 가운데 우리는 끊임없이 그 열망과, 그렇지 않은 현실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공격성은 그 욕구가 좌절될 때, 지향성을 잃고 발현되는 비뚤어진 에너지다. 즉 공격성은 ‘그 의지'의 다른 이름이다. 이 힘은 같은 알맹이가 다른 옷을 입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에너지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어느 정도는 공격성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문제 상황을 마주하고 고통을 겪을 때, 우리의 내면에 이따끔 고개를 쳐들고 올라와 어둠으로 치달으려는 충동이 그 공격성이다. 여전히 남아있고 때로는 끓어오르는 그것이 파국으로 치닿기 전에, 다듬고 정제해서 다시 ‘그 의지’로 전환해야 한다. 물길을 틀어서 내가 자각하는 통제 내로 가져와야 한다. 내가 그 힘의 주인이 되어야한다. 그것이 사실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말은 좋다. 그런데 어떻게?



3.
첫 번째 방법은 ‘아는 것’이다. 이는 이성과 고독이 밑받침된 사유의 힘이다.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 고통 속에 파묻히지 않고, 내가 현재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나를 불편하게 하고, 고통을 주는 근원이 무엇인지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의식의 범위 이면에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땅 속에 깊고 넓게 단단히 박혀있는 나무의 뿌리를 뽑아올려 샅샅히 뒤져야 한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든다. 게다가 근저에서 퍼올린 거대한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현실의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사소한 무엇부터 어떻게 할 것인지 결론지어야 하는데, 이 또한 막막하기 그지없다. 이는 마치 내 자신을 송두리째 뽑았다가, 그 커다란 것을 손으로 흙을 파고 다시 차근차근 심어 세우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본질에 가까워지는 방법은 지름길이 없다. 포기하지 않고, 지금껏 인류가 쌓아놓은 지혜를 도구삼아 비밀스러운 표식을 하나씩 발견해 나가면서, 문제가 무엇인지 구하고 파고 드는 것 밖에는 없다. 더군다나 인류의 지혜는 도구일 뿐, 답이 아니다. 답은 오직 내 안에서 퍼 올려야 한다. 이 작업은 괴롭고 고독하다.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고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신비주의나 감상주의로 빠지지 않고 통찰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이성으로 사유를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 작업의 첫 번째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 있다. 내가 앞서 고독과 이성을 강조한 이유다.


두번째는 타인(세계)과의 교류이다. 질 높은 교류가 이루어지면 연대가 된다. 내적으로 파고 드는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이 외적 교류의 끈을 놓는 것이다. 앞서 하고 있는 ‘내 문제 찾기’가 산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는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서 점검하고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걱정스러운 점은 최근 우리 시대는 여러 사회문화적 요인들로 개인이 고립되기 쉽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방식보다는 소통 내용이므로, 인터넷이나 기타 매체를 통해 간접 교류를 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를 잘 활용하면 긍정적이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직접 소통보다 편리한 장점이 있지만, 오히려 사유를 교란하는 저질정보로 가득 찬 매체더미에서 내가 무엇과 소통할지 선별하는 눈을 기르지 못했다면 역효과가 난다. 책도 마찬가지다. 책이라는 매체 특성상 타 매체보다 한 주제에 대하여 심도 있게 논의를 전개하고, 저자의 정신과 일대일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에 깊은 통찰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책도 하나의 상품이고 너무 많다. 누가 추천한 책이라고 해서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거나, 읽기 편한 책에만 골몰하는 것은 건전한 소통으로서의 기능을 둔하게 한다.

내가 말하는 교류란 ‘나’와 ‘내가 아닌 것’과의 소통이다. 타인의 생각, 어떤 사건, 사회 경험, 콘텐츠 등 다양한 형태로 삶에 나타나는 외부와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이다. 나의 정신세계는 내 순수정신이 외부 자극에 반응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저질적이거나 편중된 자극을 받으면 오염되기 쉽다. 다채롭고 질 높은 자극으로 양분을 주어야만 내 정신을 제대로 가꾸어나갈 수 있다.

필수적인 것은 사람과 몸을 부딪혀 직접 만나는 경험이다. 가장 좋은 것은 이런 과정을 함께 할 수 있는, 가치관과 철학이 어느 정도 맥이 닿아있는 동시대 사람들과의 소통과 연대이다. 물론 요즘 시대에 그런 동지를 만나기 어려우며 관계를 지속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을 표현하고 마음을 열어두는 것만이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자신의 문제를 찾는 과정을 계속하면서 내적 에너지가 소진될 수 있는데, 외부와의 좋은 교류를 통하여 자신을 점검하고, 충전할 수 있다. 또 연대해서만 바꿀 수 있는 공동의 문제를 인식하고 개척해 나감으로써 개개 자아를 넘어선 수준 높은 집단적 자기실현에 다다를 수도 있다.

셋째는 앞서 말한 두 가지를 지속하는 힘이다. 여기서 육체와 정신의 지구력과 성실성이 요구된다. 꾸준히 그 방향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가만두지 않는다.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고 망각시킬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시도도, 성취도, 깨달음도 시간이 지나면 흔들릴 수 있다. 흔들렸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단단한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언제 온전한 자기자신이 될 수 있을까?

‘온전한 자신’이라는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는 시점은 없다.
특정 시점에 특정 사건이 생김으로써 행복이 완성되거나 자아가 실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삶에 균열을 일으켰던 고통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해결하려고 투쟁하는 과정에서, 내가 결핍을 느끼는 현재의 상태를 극복하고 더 나은 상태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보다 나 자신에 가까워졌다고 조용히 느낄 때가 올 뿐이다.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그 기쁘고 평온한 느낌이 증명해주는 순간에, 타인과, 세계와, 우주와, 교류하고 연대하고 인정받는 충만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소한 순간이다. 그러나 그 순간순간을 만끽하면 된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이 모든 과정은, 완전한 어느 시점을 위한 준비단계가 아니라, 매번 맞이하는 순간순간이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이 타인(나아가 세계, 우주)에게, 자연스러운 내가 내가 아닌 것들에게, 거리낌없이 받아들여지는 기쁨, 최고의 행복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순간을 연결하고 지탱하기 위해서 강인한 지구력이 필요한 것이다.



4.
살인, 혹은 자살, 이라는 비극적 결말.

주체적으로 해결해야 하지만 숙명적으로 주어진, 인간이라는 플레이어가 감당해야 할 이 가혹하고 숭고한 미션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치될 때, 현실을 뛰어넘어 자신을 실현시키고 싶었던 자아의 순수한 에너지는 ‘공격성’으로 전락한다. 세계에 대한 극단적 혐오로 인한 타자 살해, 자아실현의 대척점인 자살. 이 두 가지 극단적 시나리오는 우리에게 주어진 게임의 완주를 포기하고 컴퓨터를 부수거나 강제 종료해버리는 것이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은 외부를 향한 에너지와 내부를 향한 에너지가 건전하고 단단하게 잘 조화된 사람이다. 외부를 향한 에너지는 세계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되고, 내부를 향한 에너지는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과 성찰하고 변화하려는 의지가 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건전한 의지라 하더라도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다. 밖으로만 지향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사회 속에서 해야 할 자신의 역할을 알고 영향력이 있으며, 외적 성취가 두드러지고 그만큼 타인에게 인정을 많이 받을 테지만, 그에 비해 내적으로는 공허할 수 있다. 내부를 향한 의지만 강한 사람은 세상과 연을 끊고 홀로 깨달음을 얻는 도인이 된다. 그들은 깨달음을 집대성해서 세상에 나누어야 할 자신의 사회적 소명을 인지하지 못하고 제 자아실현만 하고 소리없이 우주 속으로 사라진다. 그래서 두 가지가 잘 조화된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이다. 외부와 내면 차원에서의 행복을, 연대와 고독을 함께 할 줄 아는 사람. 이 둘을 분리시키지 않는 사람.

그래서, 자연스러운, 있는 그대로의 모두가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는 기쁨의 상태가 된다면. 이 기적을 달리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행복, 자유, 사랑이 가득함, 아름다움, 고귀함, 천국, 가장 높이 고양된 상태...

그것으로부터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불안하고 불완전한 곳에 우리가 있다. 우리는 그 먼 곳에서 오는 부름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느낀다.

한 가지 위안은 이 유리감으로 고통을 격심하게 느끼는 인간이야말로 그만큼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잠재력도 높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헤세가 말했다.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는, 우리 삶에 주어진 의무는, 그저 행복해지는 것뿐이라고. 낭만적인 위로의 말처럼 들리지만, 곱씹어보면 감당하기엔 서늘하고 날카롭다. 그리고, 황홀하다. 내 안의 열망은 알고 있을 것이다. 자칫 괴물이 될지 모르는 이 불꽃 덩어리를 나를 행복으로 인도할 원동력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라는 것.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주신 인간 본연의 힘을 타인을 공격하는데 쓰지 않고, 일상의 순간순간에서 스스로 행복해지는 데에 쓰길 바랐던 애타는 노파심에서가 아니었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의 언어능력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