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2

홀로 우뚝 서라

by 한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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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마음을 담아 나마쓰떼~

모두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전 최근 쇼팽 콩쿠르에서 수상한 조성진 군의 연주 동영상을 보며 마음이 매우 복잡해진 일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그 연주를 보고 있노라니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자기 자신과 오랫동안 싸워왔는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과거를 돌이켜보았습니다.


유명한 미모의 여류 작가 밑에서 사사를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뒤로 와 모니터에 있는 글을 보고 감탄하며 자신의 양손을 키보드 위에 올려놓고 저와 함께 2중주로 함께 글을 완성하는 순간을! 늘 꿈꿔왔습니다. 드라마 '밀회'처럼 말이죠. 하나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낸 과제도 첫장만 보고 내팽기쳤습니다.

전 지금 후회하고 있습니다.

왜 난 그때 집으로 돌아와 울지 않았는가? 키보드에 피가 물들 정도로 더 열심히 글을 쓰지 않았는가! 대신 친구들과 흥청망청 술 마시며 '역시 난 소질이 없어~' 하며 신세한탄만 했던가!

나의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었고 그놈의 이름은 '게으름'이었습니다.


전 지금 쇼팽의 피아노곡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키보드 버튼 하나 하나마다 제 숨결을 담고 있습니다. 왼쪽 검지 손가락 끝이 물집이 잡혀 ㄱ,ㅅ,ㄹ,ㅎ,ㅍ버튼을 누를 때마다 에려오지만 차마 멈출 수 없습니다. 곡이 끝날 때까지 피아노 앞을 지켜야만 했던 조성진 군처럼 후기를 마칠 때까지 이 자리에 머물 것입니다.


데미안 낭독 두 번째 모임, 챕터 2 카인 (민음사 도서 기준 36 P~63P)


1부. 낭독의 시간


금요일 8시... 낭독회 회원들이 모였습니다. 기존 멤버도 있었고 새로오신 분도 있었습니다. 시간상 자기소개를 하지 않고 바로 낭독을 시작했습니다. 반시계 망향으로 돌아가면서 낭독을 했는데 딱 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 내용 요약-


이런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구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왔다.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의 삶 안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계속 작용하고 있다.


싱클레어의 학교에 '데미안'이 전학을 온다. 싱클레어보다 한 학년 높고 몇 살 더 나이가 많은 그는 유복한 미망인의 아들이다. 소년과 어른의 중간단계처럼 낯설게 성숙한 데미안은 주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늘 침묵을 지킨다. 하지만 가끔 선생님들에게 맞서는 그는 자신감이 있고 당차다. 막스 데미안은 어느새 인기남이 된다. 어느 날 우연히 그의 반과 합반 수업을 했는데 수업 내용은 성경의 '카인과 아벨' 이었다. 싱클레어는 수업시간에 몰래 데미안을 지켜본다. 그의 총명하면서도 슬픈 냉소를 담은 눈빛 는 싱클레어에게 호감을 주기도 하고 반감을 주기도 했다. 둘이 눈이 마주쳤을 때 싱클레어는 재빨리 시선을 피한다.

싱클레어가 집에 가는데 데미안이 따라온다. 그리고 말을 걸었는데 내용은 싱클레어네 집 대문의 문장에 관한 것이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네 집 앞을 지날 때마다 그 대문에 있는 새를 눈여겨 봤다고 했다. 그리고 데미안은 갑자기 싱클레어에게 '카인과 아벨'에 관한 수업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 싱클레어는 '마음에 들었다'라는 짧은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데미안은 웃으며 자기한테는 그렇게 꾸밀필요 없다며 그냥 신과 죄악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거 같다고 말한다. 데미안은 왜 신이 살인자 카인에게 벌을 주지 않고 표적을 주었는지, 그 표적이 아무도 카인을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한다. 싱클레어는 그럼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묻는다. 데미안은 아주 간단하다며 이 이야기의 키워드는 '표적'인데 그 표적이라는 것이 실제 이마에 찍힌 그런 것은 아니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는 힘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카인을 무서워했고 불편해했다. 그래서 겁쟁이인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 일수도 있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싱클레어는 그럼 카인이 동생을 죽인 것이 사실이 아니냐고 묻는다. 데미안은 그건 분명 사실이라며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죽인 것인데 아무도 카인에게 덤빌 수 없어서 <우린 겁쟁이여서 그를 죽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하나님이 그에게 표적을 주었습니다>라고 말한 거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멘붕 온 싱클레어를 남겨두고 "내가 널 오래 붙잡아 두고 있구나, 안녕~"하며 중행랑을 친다. 싱클레어의 머릿 속은 카오스가 되어 버린다.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고 매우 불쾌해 하지만 그의 이야기가 어느새 싱클레어의 삶 속에 녹아들고 만다. 싱클레어는 자신을 괴롭히는 크로머를 카인으로 동일시하고 자기 자신을 아벨이라 생각한다. 동시에 부모님 지갑에서 돈을 훔쳤던 자신을 카인으로 인식하기도 시작한다. 그러자 자신의 범죄가 표적이 아니라 표창이고 자신은 아버지보다 더 높은 곳에 서 있다고 착각하기까지 한다.

또 그는 데미안을 카인으로 인식한다. 데미안의 강렬한 어른의 눈빛이 마치 카인의 표적처럼 느껴진다.

학교에 가니 데미안에 관한 소문이 나돈다. 그의 집이 매우 부자라던가, 그 집은 교회를 가지 않는다던가, 기독교가 아닌 은밀한 회교도 집안이라던가, 그가 매우 싸움을 잘 한다던가, 그가 여자와 사귀고 있으며 여자애들에 대해서는 빠삭하다(까졌다)라던가...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거부할 수 없이 빠져드는 사이 크로머는 여전히 싱클레어를 괴롭힌다. 심지어 꿈에서도 나와 싱클레어를 짓누르고 싱클레어에게 아버지를 죽이라고 지시하기까지 한다. 크로머 때문에 매일같이 잠 못 이루고 가위에 눌리는 싱클레어, 어느 날은 자신을 누르고 있는 자가 데미안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싱클레어가 결국 크로머에게 약속한 돈을 모두 갚았음에도 크로머는 이제 너희 아버지 돈을 훔친 것을 너희 아버지에게 이르겠다며 협박한다. 싱클레어의 목을 옥죄던 크로머의 덫은 점점 더 좁혀지고 싱클레어는 점점 더 괴로워한다. 이제는 가족들까지도 싱클레어를 이상하게 여기며 '요즘 너 환자 같다며~' 기도까지 해주는데 싱클레어는 사정도 모르는 그들을 비웃는다. 싱클레어는 부모님께 모든 것을 고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자신의 행동과 고통에 대해 이해해주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어느 비 오는 날 싱클레어는 크로머가 나오라고 한 광장에 간다. 그날은 돈이 없어 집에서 케이크 두 조각을 가져왔고, 크로머보다 먼저 도착해 홀로 크로머를 기다리기까지 한다. 싱클레어는 흠뻑 젖은 나뭇잎을 두발로 헤집으며 자신의 처지가 어쩔 수 없다며 체념까지 한다. 이내 도착한 크로머는 싱클레어에게 누나를 소개하여달라고 강요한다. 싱클레어가 강하게 거부했지만 크로머는 화도 내지 않은 채 어떻게 누나를 불러내고 어떻게 자신과 엮을지 일일이 디테일하게 지시하고 가버린다. 텅 빈 광장에 홀로 남겨진 싱클레어는 생각한다. 자신은 철저히 혼자이고 철저히 크로머의 노예상태라는 것을!!!

그때 신기하게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 다가와 부드러운 손길로 잡았다. 그리고 무슨 일 있냐며, 왜 그리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냐며,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냐며 케묻고 자신이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자신을 내버려두라며... 도대체 뭘 바라냐며 귀찮게 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도망친다. 데미안은 여전히 싱클레어를 따라와 그런 말을 한다.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누군가에게 자기 자신을 지배할 임을 내어주었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거야!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크로머란 이름을 언급하지만 싱클레어는 두려움에 떨며 크로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달라고 부탁한다. 데미안이 돈을 대신 갚아준다고 해도 싱클레어는 오히려 데미안에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말아줘! 부탁이야! 아무것도 할 생각하지 마! 형은 날 불행하게 해!>라고 원망 섞인 말을 한다. 데미안은 그런 싱클레어를 보며 실실 웃고 깝쭉거리듯이 <넌 언젠가 너희들 사이의 비밀을 나에게 알려줄 거야... 난 크로머처럼 널 굴리지 않을 거야... 걱정 마, 넌 내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으니까... 싱클레어 크로머를 때려죽여!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나도 좋겠어. 내가 널 돕기도 할 거구>라고 말하고 떠난다. 싱클레어는 카인의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라 무서워서 훌쩍훌쩍 울며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집으로 왔다. 일 년쯤 떠나 있었던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달라보였다. 나와 크로머 사이에 미래 같은 무엇, 희망 같은 무엇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나 무섭도록 혼자 여러 주일 동안 내 비밀과 더불어 있었던가를 이제 비로소 알았다. 내가 이따금 씩 깊이 했던 생각도 곧바로 떠올랐다. 부모님 앞에서 고해를 하는 것이 후련은 하겠지만 완전히 나를 구원할 수 는 없으리라는 것이. 그러나 이제 나는 고해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 낯선 사람한테다. 그리고 구원의 예감이 짙은 향기처럼 내게로 풍겨왔다.


싱클레어의 삶에 고요함이 찾아온다. 더 이상 크로머는 싱클레어를 불러내지도 않았고, 심지어 길에서 마주쳤을 때 싱클레어를 피해갔다. 이 이상한 현상에 대해서 놀람과 기쁨이 교차하며 어리둥절하고 있던 싱클레어는 학교에서 데미안을 만난다. 아니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찾아왔다. 데미안은 크로머가 더 이상 괴롭히지 않냐며 묻고 싱클레어는 형이 그를 때렸냐고 묻는다. 데미안은 싸움을 싫어한다면서 그냥 이야기만 했다며, 다음에 또 크로머가 나타나면 '데미안을 기억하라'고 얘기주라고 말한다. 싱클레어는 도대체 데미안과 크로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자꾸 케물었지만 데미안은 가르쳐주지 않고 떠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옥 같았던 크로머와의 일과 함께 데미안도 잊으려고 노력한다. 다시 천국 같은 빛의 세계로, 가족들 품으로... 원래대로 돌아간 싱클레어는 결국 부모님께 모든 것을 고백한다. 돈을 훔쳤던 일과 얼마나 오랫동안 나쁜 놈에게 묶여 있었는지를... 부모님은 그를 안아주고 품어주며 마치 성경 속의 돌아온 탕아처럼 맞이해주신다.


이제 나는 정말 열정적으로 이 안정 속으로 도피해 들어갔다. 다시 평화를 되찾고 부모님의 신뢰를 되찾았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싫증 나지 않았다. 나는 집안의 모범 소년이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누이들과 놀았고, 기도 시간에는 구원받은 개종자의 감정으로 좋아하는 옛 노래들을 함께 불렀다. 그런 일은 충심에서 우러났으며 어떤 거짓도 섞이지 않았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뭔가를 깨닫는다. 그가 진정 고해해야 하는 대상은 데미안이었음을... 그것이 더 자신에게 유익한 짓이었음을... 이제 싱클레어는 '낙원'의 노예가 되었다. 그 안전한 세계에 갇혔고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은 여전히 아벨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카벨을 찬양하고 아벨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크로머라는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가 아니라는 것이다. 친절한 손 하나가 나를 구해내었고 난 그 덕에 어머니 품의 아늑함 속으로 달려들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신을 자신보다 더 어리게, 더 의존적으로, 더 어린 애처럼 만들었다. 나는 크로머에 대한 예속을 새로운 의존으로 대치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눈 먼 마음으로 아버지 어머니에의 의존, 그것이 유일한 것이 아님을 이미 알아버린 <밝은 세계>에의 의존을 택했던 것이다. 내가 데미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은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데미안이 부모님보다 더 많은 것을, 훨씬 더 많은 것을, 나로부터 요구했을 테니까. 그는 충동과 경고로, 조롱과 반어로 나를 보다 자립적으로 만들려고 했을 테니까. 아, 지금은 알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인간에게 거슬리는 것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로부터 반년 뒤 싱클레어는 아버지와 산책하다가 카인과 아벨에 대해 물어본다. 카인이 아벨보다 더 훌륭하다고 설명하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아버지는 몹시 놀라며 그것은 사이비 종파들에서 전수 해오는 이야기로 미친 학설이며 우리의 신앙을 깨뜨리려는 악마의 시험에 다를 것이 없다며 그런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진지하게 경고한다.



1부 끝. 인터미션


10분 휴식. 화장실 갔다 오세요. 음악도 감상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Llni1Dn-f4U


2부 토론의 시간


(하단의 내용은 오직 저의 기억을 바탕으로 작성하는 것이니 실제 우리가 논했던 것 외에 저의 상상 속의 담론이 첨부되었을 수도 있음을 미리 알려드리며 양해 부탁드립니다. )


9시에 다시 모인 우리. 전 먼저 '토론의 원칙'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첫째, 사회자인 저의 인도를 따를 것

둘째, 저자의도에 대해 비판하지 말고 순응할 것 (책 내용을 물고 뜯지 말 것)

셋째, 타인의 의견에 대해 부정하지 말 것 (각자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질문: 이 챕터를 읽고 각자 뭔가 떠오른 것을 말해보아요.


- 제 인생에 데미안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 카인에 대한 데미안의 해석이 충격적이었어요.

- 싱클레어가 열 살 밖에 안되었는데 참 성숙하네요... 제가 열 살 때는 뭐했나 생각해보니 참 비교가 됩니다.

-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멘토와 멘티의 관계 같아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교감이 참 감성적이라 좋았습니다.

- 역시 거짓말을 하면 제가 그것에 얽매여져서 그것의 노예가 되는 거 같아요. 결국 그것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며 고해했을 때 다시 자유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 데미안의 영향력이 무섭네요. 그를 존경하지만 그에게 예속될까 봐 두려워하는 싱클레어의 마음이 이해됩니다.

- 그렇다고 데미안은 신이 아니잖아요. 데미안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제 삶을 돌이켜볼 때 데미안 같은 멘토를 만나고 또 실망하고 또 떠나면서 제가 성장했던 것 같아요. 누구나 그러면서 자기만의 가치관을 찾아가는 과정을 겪는 것 같아요.

- 어쨌든 데미안 같은 존재가 있는 게 좋은 거 같아요. 저를 끌어주기도 하고 또 언젠가 제가 밟고 디디고 넘어서면서 성장할 수 있는 존재...

- 데미안의 성장배경이 참 궁금해졌어요.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저런 애가 되었을까?


우린 세 가지 이 챕터에서 세 가지 키워드를 발견했습니다.


첫째, 데미안

둘째, 카인

셋째, 노예


정말 인생에서 '데미안' 같은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인 것 같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는 갈수록 경쟁관계가 되거나 서로 무관심하며 각자 살아가는 분위기라 이런 인연을 만나기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자신의 삶에서 데미안 같은 존재를 만났던 경험이 있나요?


- 꼭 데미안처럼 완벽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선배나 스승을 만나며 그들을 통해 성장했던 것 같아요.


-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건 아니지만 책이나 강연, 팟캐스트를 통해 귀감이 되는 존재를 만난 적은 있다고 봅니다.

(예, 강신주, 오쇼 라즈니쉬, 지대넓얕 )


- 전 대학 때 훌륭한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는 저를 존중해주었고 졸업 후 자신을 찾아오라고까지 했습니다. 졸업 후 스승 밑에서 1년 정도 작업을 도왔는데 1년 후 그가 저에게 이제 자신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가 나를 버린다고 생각했고 그를 원망하였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 이 아이가 계속 내 밑에 있으면 절대 나를 뛰어넘지 못한다...'

실제로 스승을 떠나고 독립하면서 전 많이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스승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독립


우리의 토론은 '독립'이라는 단어에 초첨이 맞춰졌습니다.

독립이란 뭘까요?

무언가에 의존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


실제 누구나 태어나면서 '귀속상태'에 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독립하면서 어른이 되죠.

그런데 우린 실제 어른이 되었나요?


가족의 가치관에 귀속되어 있거나

내가 받은 교육에 귀속되어 있거나

회사나 일에 귀속되어 있거나

국가에 귀속되어 있거나

돈에 귀속되어 있거나


과연 진정한 독립을 했는지 의문입니다. 우리가 독립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 두려움 때문 아닐까요? 어딘가에서 나와 혼자가 되면 매우 힘들어지죠. 그럼 또 불안해지고...


- 맞아요, 제가 예전에 오래 다녔던 교회는 청년교회 있는데, 목사가 돈을 밝히시고 청년들을 경제력으로 차별을 하셨죠. 심지어 탈북자, 사회 부적응자 같은 사람들을 모두 내쫓았어요. 그런 와중에도 교인들은 목사님을 옹호하며 열심히 다녔죠. 그 교회는 특히 연예인 지망생이나 예술 관련 교인들이 많았는데 자매들이 무척 예뻤어요. 그래서 형제들이 많이 몰렸죠. 웃긴 건 목사가 연애 중매를 했다는 거죠. 자신이 아끼는 자매들은 돈 있는 남자들이랑 맺어주는 거예요. 그리고 목사 허락을 받지 않고 사귀면 교회에서 쫓겨났어요. 어떤 커플은 목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둘이 몰래 사귀었는데 자매가 임신을 했어요. 형제는 곧 자매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목사는 두 사람을 쫓아내고 마녀사냥을 부추겼어요. 무서운 건 모든 교인들이 그 커플을 비난하고 저주까지 했어요. 전 이 사건으로 분노하며 교회를 나왔는데 너무 오랫동안 몸담았던 교회라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지난 시간의 제 삶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거든요. 또 어떤 교회를 가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한동안 집에서 혼자 성경을 읽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다름 아닌 영화 '아저씨'였습니다. (세상에... 이제 생각해보니 원빈이 나의 데미안이었구먼)

전 혼자 신앙생활을 하며 더 강해졌습니다. 진짜 그제야 그리스도를 만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전엔 목사만 보고 신앙생활을 했거든요.


- 사실 내가 있는 집단에서 나오면 분명 힘들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집단이란 내가 추구하는 이익을 보다 편하게 얻을 수 있는 시스템이잖아요. 그곳에서 나와서 혼자 그것을 얻으려 노력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죠. 그것이 집단의 장점이죠.


-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너무나 습관적으로 집단에 귀속되는 것 같아요. 그것은 어릴 적부터 반복 해오는 것이었으니까. 결국 스스로 혼자 사유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맞아요, 예를 들어 외국에서 만난 친구들을 보면 그들이 굉장히 독립적이고 개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쳐놓았죠. 그리고 저의 생각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해했죠. 반면 한국에서는 일단 처음 보자마자 호구조사부터 하잖아요. 제가 어떤 집단에 귀속되어 있는지 먼저 파악하고 판단하려는 거죠...


- 그러고 보니 한국 사회는 집단문화인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집단이 저의 생각을 대표하고 저는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이 순응하는 습관이 드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제가 좀비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나만의 생각이 없어진다거나 어딘가에 쉽게 물든다거나... 사유하는 과정이 없었던 것 같아요.


- 그래요 과정이 필요한 거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린 너무나 빠른 결과만을 바라잖아요. 그러니까 남들이 좋다는 것에 일단 우~~~ 몰리고 보는 거죠.


- 시행착오! 맞아요. 시행착오가 사람을 성장시키죠.


- 전 개인적으로 대학 졸업 후 끊임없이 공동체 커뮤니티에 가입해왔어요. 동호회도 있고 협동조합도 있고 종교단체도 있고 등등... 공동체의 장도 여러 번 하고요... 재밌는 건 한국사회의 모든 공동체에 똑같은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집단 이기주의'이죠. 집단 이기주의의 끝은 결국 '개인 이기주의'로 빠져듭니다. 심지어 가장 진보적인 단체에 있을 때도 회의 10분만 지나면 격렬한 싸움으로 번지죠. 타인의 말을 아예 듣지 않고 각자 자기 할 말만 합니다. 그런 현상의 기제를 분석해보면 모두 안에 두려움이 크게 존재합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랄까... 그리고 쉽게 공동체의 본질을 잃어버리죠. 대한민국에 흔하디 흔하게 존재하는 님비현상도 이젠 이해가 합니다. 우린 각자가 사유하고 성장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본능적이고 직관적으로 이익에 집착하게 되죠.


- 아마도 그건 우리 사회가 역사적으로 '노예상태'에 머물러서가 아닐까 합니다. 조선시대의 계급사회, 일제 식민지, 미국 식민지, 독재... 심지어 지금 정부까지도... 결국 노예근성이 만연해 있죠. 전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화두가 '독립'이 아닐까 합니다.


- 죽창을 듭시다!


- 죽창을 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결국 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권력으로 자리바꿈을 해도 그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통치를 할 거라고 봅니다. 얼마 전 읽었던 책이 생각나네요. 미국의 신학자이면서 정치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가 쓴 '도덕적인 개인과 비도덕적인 사회'라는 책인데요, 그의 지론에 따르면 인간은 혼자 있을 때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어도 집단이 되면, 자연스럽게 비도덕적으로 변한다는 거죠. 역사적인 사례를 살펴봐도 맞는 거 같아요. 우리가 홀로 양심을 가지고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지만 개인이 집단화되면 '집단의 이익'을 중심에 둔 환경의 거대한 카테고리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그곳에서는 정치적 담론이 굉장히 큰 프레임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집단과 충돌했을 때 밀리면 굉장히 큰 피해를 볼 것이라는 두려움이 당연히 생깁니다. 실제로 전쟁 같은 분쟁 속에 있는 개개인의 삶의 지축은 엄청나게 흔들리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현재 이익을 보고 있는 집단에 있으면 안정감을 갖게 되고 내가 속한 집단의 행동이 비도덕적이라도 그냥 눈을 감고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양심과 도덕을 내세우며 자기가 속한 집단을 비판하게 되면 엄청난 투쟁을 해야 되죠.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본능을 뛰어넘는 냉철하고 합리적인 이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개개인이 선해져서 해결될 문제가 절대 아니라 결국 시간을 두고 정치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 맞아요, 시간이 걸리고 모든 사람들의 소통과 합의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논의 과정'이 자꾸 함축되고 있죠. 그러다 보니 논의의 기준이 '정말 무엇이 정말 옳고 그름에 대한 인문학적 철학적 사유' 가 아니라 '누가 얼마나 이익을 볼 것인가'의 프레임으로만 접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니 오히려 그렇게 몰고 가잖아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아요. 비판을 하는 순간 바로 빨갱이로 몰아가는 것처럼...


- 그래서 전 물들지 않아야 한다고 봐요. 우리 주변을 둘러 싼 흐름들... 그런 것들에 휩쓸리지 않으면 정말 각자 독립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경험이 무척 중요한 것 같아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음 없이 타인의 말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면 그것이 옳은 방향인지 틀린 방향인지에 상관없이 이미 노예상태에 머물고 있는 거 아닐까요?


- 집단이 아닌,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독립적 상태를 유지하려면 많은 유혹을 뿌리쳐야 합니다. 끄달리다...라는 말이 있어요. 꺼둘리다의 사투리인데 '꺼둘리다'란 남에게 움켜잡혀 마구 이리저리 휘둘리다... 란 뜻입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 무언가에 끄달리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죠. 그것은 돈이 될 수도 있고, 이성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물질이 될 수도 있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난 나의 무게중심도 없는데 왠지 그것이 있으면 자존감이 올라갈 거 같고 내가 뭔가 진화한 느낌이 드는 것 혹은 나의 쾌락을 채워주는 무언가...


- 인정하기 싫은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살이 자꾸 무언가 끄달리는 것에 연속이죠. 신기한 것은 제가 끄달리는 것이 계속 변하고 그것이 없으면 불안해집니다. 또 끄달리것을 찾게 되죠. 그러면 뭔가 공허하고 겉도는 느낌이 들죠.


- 그런데 개인의 삶에서 '욕망'이란 엔진 같은 거 아닐까요? 그런 엔진이 있기에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것.


- 맞아요. 모든 존재는 '욕망'이 있고 인류의 역사가 '욕망'의 역사이긴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찰'이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내가 나의 욕망을 자꾸 외부로 투영하고 그것을 목표점으로 하고 쫓아가는 삶의 연속은 노예상태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요. 욕망의 노예가 되는 거죠. 그리고 그런 삶은 끝없이 공허할 뿐이죠.


-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카잔차스키 묘비명이 어떻게 쓰여졌는지 아세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유다.


- 멋지네요. 전 원하되 바라지 않는 것에 어떤 비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원할 수 있지만... 끊임없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지 그것을 얻는 과정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여유가 필요한 거죠. 즉 '원하다'와 '바라지 않는다'의 이 모순적 감정을 동시에 가지면서 두 사이의 갭에서 '성찰'을 발견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되고 싶다'는 누구나 원하잖아요. 그런데 또 그것을 바라지 않는 거예요. 그럼 내적 갈등이 생깁니다. 부자가 돼서 잘 먹고 잘 살고 싶고 고생 좀 안 했으면 좋겠어! 하는 생각이 들고 반대로 과연 돈이 진정한 행복일까, 돈이 많으면 할 수 있는 게 많지, 난 돈이 많아지면 그 돈으로 뭘 할 것인가, 좋은 일에 써야지, 그럼 정말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그런데 어떤 과정으로 돈을 벌지? 돈 버는 일이 뭐가 있지? 아.. 아냐 내가 지금 돈에 집착하다 보니까 진정 가치 있는 일이 뭔지 모르고 있잖아. 돈을 버리자. 돈은 결과일 뿐이야. 돈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다 보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못 찾는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것을 하다 보면 언젠가 그것이 돈으로 연결될지도...


(이런 사유과정은 꼭 물질적 성공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예로 어떤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치자. 그럼 당연히 그녀를 '원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를 원하는 욕망에 집착한다면 '소유의 프레임'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소유의 프레임'에 갇힌 자는 그녀의 존재 의미를 절대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집착하게 되고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진정 자신이 아님에도 자신을 부풀리며 갖은 노력을 하게 된다. 재밌는 건 이 과정에서 '존재자'가 아무도 없게 된다. 그녀도 없고 나도 없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맺어진다 해도 여전히 그녀도 없고 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바라지 말아야 한다. 그녀를 원하는 동시에 바라지 않게 되면 일단 여유로워지고 '소통'이라는 것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그녀를 발견하는 동시에 나도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통해 발견되어질 때 독립된 두 존재가 진정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일단 멈춰야 한다고 봅니다. 우린 자기도 모르게 엄청난 가속력으로 달려왔어요. 그래서 습관적으로 달리는 것입니다. 노예근성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무게중심을 가지고 스스로 우뚝 서야 합니다. 우뚝 서려면 일단 멈춰야 해요. 내가 끄달리는 것에 거리감을 둡시다. 힘들어도 참아요. 고통을 견뎌내야죠. 일단 그것부터 시작해봅시다.


시간 관계상 우린 더 이상의 대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카인'의 논란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었지만 카페 주인의 눈치를 보며 도피성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녹음실에서 나와야 하는 지대넓얕 멤버들의 심정이 이해 갑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뒤풀이에서 '카인'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 따로 정리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내용 요약'을 잘 살펴보시면 이미 '카인'에 대한 맥락이 잘 정리되어 있음을 느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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