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편에 서라
진심을 담아 나마스떼~
안녕하세요 도피성 낭독회 진행자 '마음탐정'입니다.
지난주 수요일 데미안 세 번째 낭독을 진행하면서 '인연'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낭독회원 사이에도, 싱클레어와 데미안 사이에도, 분명 어떤 '인연'이 있었습니다.
저 역시 지금 데미안을 다시 만난 것은 매우 특별한 행운입니다. 소설 속의 가상 인물이지만 지금 그는 저의 세계를 송두리째 흔들어놓고 있습니다. 체제에 순응하느라 억압되었던 욕망을 눈뜨게 하고 그것이 사회와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데미안을 읽고 계시는 분이나 후기를 통해 낭독회를 간접 경험하시는 분들 모두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욕망의 세계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Desire World
그럼 이제부터 저와 함께 데미안을 만나러 가볼까요?
1부 낭독의 시간
<챕터 3: 예수 옆에 달린 도둑> 요약
나(싱클레어)의 안락하고 사랑스럽게 환한 세계에 충격을 준 것은 다른 세계로부터 왔다. 그것은 늘 혁명적이었으며 두려움과 강압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했다. 허용된 밝은 세계에서는 숨기고 은폐해야 하는 하나의 원시적 충동이 나 자신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천천히 눈뜨는 성(性)에 대한 감정이 나에게도 하나의 적이자 파괴자로, 금기로, 유혹과 죄악으로 들이닥쳤다. 그것은 내 유년의 평화에 감싸인 행복감에는 맞지 않았다. 내 의식은 집안의 허용된 세계 속에 살았으며 어렴풋이 솟아오르는 새로운 세계는 부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꿈, 충동, 은밀한 소망들 속에 살았다.
싱클레어의 부모님은 싱클레어의 의 생명의 충동을 모른 척 한다. 여느 부모님들처럼 그것에 대해 도움이 되어줄 수 없었다. 싱클레어가 자신의 욕망을 대면하는 것은 한없이 고독한 길이었다.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도움이 되어줄 수 없었다. 우주 속을 홀로 유영하는 기분... 그리고 어느 날 외계인 같은 존재 '데미안'이 그에게 다가왔다.
크로머 사건이 있은 지 몇 년 후 크로머는 싱클레어 주위에서 사라졌지만, 데미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피했고 데미안은 굳이 싱클레어를 쫓지 않았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멀리서 관찰하곤 했다. 학생들 무리에서 낯설게, 외롭고 고요하게 거닐고 있었으며 아무도 데미안과 친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누구의 마음에도 들려고 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철저히 혼자였다.
어느 날 싱클레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어가는 말을 본 적이 있다. 말은 피를 흘리며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고 학생들은 말 주변에 에워 싸 구경하고 있었다. 싱클레어는 메스꺼워 시선을 돌리다가 무리들 사이에서 데미안을 보았다. 그는 말 머리에서 시선을 띄지 않고 매우 주의 깊게 보고 있었으며 그의 얼굴은 어른의 얼굴로 보이기도 하고 여자의 얼굴로 보이기도 했다. 그 얼굴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며 어른도 아니고 아니도 아닌 다른 시대의 인장이 찍힌 듯 보였다. 마치 한 마리의 짐승 같기도 하고 유령 같기도 했다.
몇 년 후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견진성사를 같이 받게 되었다. 견진성사를 위한 수업시간에 신부님은 '카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싱클레어는 그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데미안과 눈이 마주쳤다. 데미안 역시 신부님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 표정이었고 싱클레어는 자기도 모르게 데미안과 연대감을 갖게 되었다. 며칠 후 데미안은 싱클레어 옆자리에 앉았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목덜미에서 나는 향긋한 비누냄새에 깊은 인상을 갖는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늘 같이 앉게 되었는데 싱클레어는 묘한 기대감과 설레임을 느낀다.
데미안은 사람들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손가락으로 어떤 학생을 가리키면 그 학생은 잠시 후 목덜미를 긁었다. 어느 날은 신부님이 교리문답의 한 단락을 말하게 할 학생을 찾고 있었는데 싱클레어와 눈이 마주쳤고 싱클레어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다가 그의 표정이 불안해지더니 옆자리의 데미안에게 가서 뭔가 물으려 하다가 기침을 하고 다른 학생을 시켰다.
싱클레어는 하굣길에 데미안에게 어떻게 다른 사람을 조종한 것이냐고 묻는다. 데미안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며 다만 누군가를 오랫동안 관찰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데미안은 어떤 예를 들어준다. 어떤 나방이 있는데 암놈이 수놈보다 훨씬 수가 적어서 수많은 숫나방들이 몇 킬로 떨어진 암나방에게 몰려든다고 한다. 수놈은 오직 자신의 본능으로 암놈을 감지하고 추적한다고 한다. 그것은 환경조건이 수놈의 그런 능력을 키운 결과라고 한다. 그리고 어떤 짐승이나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주의력과 의지를 특정한 일로 향하게 하면 그것에 도달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데미안은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하고 싱클레어는 어떻게 자유의지가 없는데 자신의 의지를 무엇에 확고하게 쏟을 수 있냐고 묻는다.
싱클레어의 질문에 데미안은 매우 기특한 질문이라며 설명해 준다. 나방의 행동은 자유의지에서 나온 게 아니라 철저히 환경에 의해서 깨어난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은 동물보다 활동의 여지가 많은 것이고 관심사도 더 많겠지만 결국 좁은 테두리에 매여 있고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만약 갑자기 북극에 가고 싶다면 그것에 대한 소망이 온전히 마음속에 꽉 차있을 때 내면의 본능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데미안이 싱클레어 옆자리에 앉게 된 것도 그가 그것에 대한 본능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는데 마침 아파서 등교하지 못했던 아이가 학교에 나타나 데미안은 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면서 자연스럽게 싱클레어 옆자리로 이동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즉 기회를 포착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한 번에 싱클레어 옆자리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몇 번 앉다가 순차적으로 다가 온 것인데 그 이유는 처음부터 싱클레어의 옆자리에 앉고 싶다는 자신의 본능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해서라고 한다. 그렇게 떠도는 도중 싱클레어의 의지가 데미안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그 후 싱클레어는 자신도 시험을 해본다. 자신의 의지를 무엇인가에 틀림없이 도달하도록 한데 모아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데미안은 어느 날 또 싱클레어에게 매우 충격적인 말을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대목은 싱클레어가 성경에서 가장 감동하고 비통해하며 무서워하는 부분이었다.
싱클레어, 저기엔 뭔가가 있어, 내 마음에 안 드는 맥 빠진 맛이 나는 무언가가 있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거기 언덕 위에 십자가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굉장하지! 하지만 우직한 도둑들에 대한 감상적인 선교 전단용 이야기야! 도둑은 처음에 수치스러운 행위를 저지른 범죄자였어. 신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어. 그런데 왜 막판에 와서 마음이 누그러져 그런 회개의 징징거리는 축제를 하는 걸까? 무덤에서 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하는 그런 회개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엉터리 신부님의 설교일 뿐, 달착지근하고 부정직하고 지극히 교화적인 배경에다 측은지심의 엿기름을 곁들인 거지. 만약 네가 오늘 그 두 도둑들 중 하나를 친구로 택해야 한다면 그건 분명히 징징거리는 개종자 쪽은 아닐 거야. 다른 쪽이야. 회개하지 않은 그 도둑이야말로 사나이잖아. 개성이 잇고 말이야. 그는 개종 따위를 우습게 알았어. 그런 건 그의 처지에서는 그저 듣기 좋은 말이겠지. 그는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갔어. 그리고 자신이 거기까지 가도록 도와준 악마로부터 마지막 순간에 비겁하게 도망가지는 않았어. 그는 당당한 개성을 가졌어. 성서 이야기에서는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손해를 보지. 어쩌면 그도 카인의 후예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싱클레어는 머리가 하얘진다. 지금껏 십자가 수난 이야기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 얼마나 개인적인 사유 없는 수동적 믿음이었는지 깨닫는다. 하지만 데미안의 생각은 싱클레어의 세계를 송두리째 전복시키는 위협이었다. 카인은 그렇다 치고 이제 지고지순한 성인까지 흔들어놓다니 말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표정만 보고도 싱클레어가 얼마나 불편해하는지 알고 있다.
심각할 거 없어! 하지만 네게 뭔가를 말하고 싶었어. 여기에 종교의 흠을 아주 똑똑하게 볼 수 있는 점 하나가 있는 거야. 중요한 건 온전한 유일신이 탁월한 분이기는 하지만 원래 그가 표상하는 그런 신은 아니라는 점이야. 그는 선, 고귀함, 아버지다움, 아름답고도 드높은 것, 감상적인 것이지. 옳아! 그러나 세계는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다른 건 되다 그냥 악마한테로 미루어지는 거야. 세계의 이 다른 부분이 똥째로, 이 절반이 통째로 숨겨지고 묵살되는 거야. 바로 사람들이 신을 모든 생명의 아버지라고 기리면서도, 생명이 거기에 근거하는 성생활은 간단히 묵살하고 어쩌면 악마의 일이며 죄악이라고 선언하는 거야! 이런 신을 여호와라고 존경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존경하고 성스럽게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분리시킨 이 공식적인 절반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 예배도 가져야 해. 그게 올바른 일인 것 같아. 혹은 예배를 하나 더 만들어내야 할 것 같아. 악마도 그 안에 포함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세상 일들이 일어날 때 그 앞에서는 눙르 감지 않아도 되는 신을 위해서 말이야
데미안은 평소답지 않게 격해졌지만 곧 다시 미소를 띠었고 더 이상 싱클레어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데미안의 말은 싱클레어의 마음을 적중하고 있었다. 그동안 싱클레어가 느낀 세계의 모순과 혼란을 건드린 것이다. 두 세계가 상정된다.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두 세계는 모두 인간의 세계 안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우린 상정된 빛의 세계만 강요받고 어둠의 세계에 대해서는 도망치고 버리라고 말한다. 그 어둠의 세계에는 나의 육체도, 성에 대한 갈망도, 원초적인 욕망도 포함되어 있다. 즉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은 어둠의 세계도 명백히 나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혼란을 느끼며 데미안에게 항변한다. 그 어둠의 세계에는 실제로 금지된 추한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살인이나 별별 악덕들을... 그런데 그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도 살인을 해야 하는 것인지... 데미안에게 묻는다.
데미안은 흥분한 싱클레어의 기분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대답한다.
널 더러 누굴 쳐 죽이라든지 소녀를 강간 살인하라는 게 분명 아니야, 하지만 <허용되었다> <금지되었다>라는 것이 사실 무엇인지 통찰할 수 있는 곳에 넌 아직 가보지 못했어. 비로소 하나의 진실을 느낀 것뿐이야. 다른 것이 또 올 거야. 그것에 자신을 믿고 내맡겨봐! 예를 들면 넌 지금 일 년 전쯤부터 네 속에서 다른 모든 충동보다 강한 하나의 충동을 느끼고 있을 거야. 그런데 그건 <금지된> 것으로 간주되지. 그리스인들 그리고 다른 많은 민족들은 반대로 이 충동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큰 축제를 벌이며 그것을 기렸어. <금지되었다>는 것은 그러니까 영원한 것이 아니야, 바뀔 수 있는 거야. 오늘도 누구든 어떤 여인과 함께 신부님 앞에서 결혼하고 나면 동침해도 돼. 다른 민족들에게서는 달라, 오늘날도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들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 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 자기에게 금지되어 있는지. 금지된 것은 결코 할 수 없어. 금지된 것을 하면 대단한 악당이 될 수 있지. 거꾸로 악당이라야 금지된 일을 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야. 사실은 그것은 그냥 편안함의 문제거든! 지나치게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 속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 늘 그럭 게 마련이듯이 그런 사람은 살기가 쉬워. 다른 사람들은 운명을 자기 속에서 스스로 느끼지. 그들에게는 어느 명예 있는 남자건 날마다 하는 일들이 금지되어 있어.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폄하되는 다른 일들은 허용되어 있어. 그러니 누구나 자기 자신 편에 서야 해.
데미안은 그 이야기를 할 때 정말 완벽히 진지했다. 견진성사가 다가오고 견진수업은 최후의 만찬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신부님에게 배운 것보다 데미안에게 배운 것으로부터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데미안은 이런 얘기를 했다.
똑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전혀 가치가 없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날 뿐이야.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건 죄악이지 자기 자신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어갈 수 있어야 해. 거북이처럼
싱클레어는 어느 날 수업시간에 명상을 하는 데미안을 발견한다. 그는 여느 때와 달랐다. 눈을 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눈을 뜨고 있었고 그 눈은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았다. 내면을 향하여 혹은 아주 먼 곳을 향하여 있었다. 마치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의 입은 나무나 돌로 깎아놓은 것 같았다. 그는 피곤해 보였지만 맥없이 늘어진 것은 아니고 숨겨진 강한 삶을 에워싸고 있는 단단하고 훌륭한 껍질 같았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죽었다!라고 생각하기 까지 했다. 죽었는데 남모르게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었고 고요한 공허가 느껴졌다. 그는 와넞ㄴ히 자신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싱클레어는 집에서 데미안처럼 명상 연습을 해보지만 오래 버틸 수 없었고 피곤하고 눈꺼풀에 심한 경련까지 났다.
드디어 견진성사가 끝났을 때 싱클레어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익숙했던 과거의 것들이 달라보였고 더 이상 자신의 정원에서 향기가 나지 않았다. 데미안은 여행을 떠났고 싱클레어는 이제 완전히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2부 토론의 시간
각자 읽는 느낌을 얘기해봅시다.
- '데미안' 같은 친구가 떠올랐어요. 제가 살던 동네에 판자촌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친구가 굉장히 독립적이었거든요. 우유배달, 신문배달도 하고... 부모님은 그 친구랑 놀지 말라고 했지만 전 왠지 그를 보며 이미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데미안은 '전통적 윤리관'에 맞서는 존재 같아요. 뭐랄까 굉장히 모던하고 자유롭고 이 책이 쓰여진 시기가 1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들었는데 마치 현대소설을 읽는 기분이 듭니다. 데미안은 굉장히 진보적인 녀석이랄까...
- 혼란스럽습니다. 저 역시 아직도 두 세계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욕망과 질서... 가 충돌을 한다고 할까요...
그때 우리는 많은 대화를 했지만... 시간이 너무 흘러 잡탕밥이 되어
그 말이 타인의 말이었는지 나의 말이었는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미안합니다.
채 사장님을 존경합니다. 방대하고 심오한 주제들을 후려치는 그의 기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후려치는 '욕망의 잡탕밥'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욕망... 그 무섭고도 아름다운 단어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살고자 하는 욕망.
그 욕망이 생명의 원천이다.
욕망은 나의 것이 아니다.
거대한 진화의 흐름... 내가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만약 섬에서 혼자 산다면 난 나의 욕망을 마음껏 분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공존하고 있다.
그래 문제의 시작은 '공존'에서부터 나온다.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나의 욕망을 의식해야 하고
또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나를 다스리기 위해 나의 욕망을 억제하기도 한다.
내가 내 욕망을 의식하고 그것과 소통하면서... 발산하거나 다스리거나 그런 조절단계를 경험하기도 전에
우린 쉽게 두 가지 상황으로 몰린다.
첫째, 닥치고 시키는 데로 하는 것
둘째, 내 맘대로의 일탈
그래서일까?
난 이 사회에서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면서, 그것을 건강하게 푸는 동시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그런..
건강한 사람을 별로 만나본 적이 없다.
대신
굉장히 억압되어 언젠가 터질 거 같이 불안한 사람이거나... A타입
정신 줄이 굉장히 풀려있어 그가 원하는 모든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진상---B타입
(A가 술에 취하면 한 순간에 B로 변신하기도 한다.)
을 종종 본다.
이런 극단적인 두 타입에 있는 사람들을 전문용어로 '찌질이'라고 부른다면 나 역시 찌질이라 할 수 있다.
난 어쩌다가 찌질이가 되었는가
나는 30대를 '내가 어쩌다가 찌질이가 되었는가?' 심층 탐구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탐구의 첫 단추는 '부모님'을 탓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날 세뇌했던 부모님...
부모님의 강요로 거세된 유년을 보내고 강요된 미래를 위해 청춘을 통째로 저당 잡혔던 비극적인 성장드라마.
어른이 되었을 때 난 완벽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봉준호 감독 영화 '괴물'처럼 난 주변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또 공허함에 빠지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지? 아무리 반성해도 삶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희망의 빛을 보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틀에서 벗어난, 문학하는 사람들을 만나서부터였다.
그들은 사회를 객관적으로 보려 했고 돈보다 인간의 마음을 중시했다.
그 시절에 책을 무척 많이 읽게 되는데... 아주 우연히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진중권
웅진지식하우스 2007.01.15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이 나를 찌질이로 만들었나 주 원인에 대해 매우 거시적인 분석을 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진중권 씨가 하는 얘기에 제가 좀 간을 보태서 요약한 것입니다.
미셀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충격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흔히 '근대'를 중세의 암흑시대에 대비시켜 찬란한 이성의 시대로 표상하곤 한다. 하지만 그의 묘사에 따르면 서구의 근대화는 잔혹하기 짝이 없어 토론과 대화로 정신을 설득하는 관념론적 과정이 아니라 감시와 처벌의 채찍으로 신체를 길들이는 유물론적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푸코가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시대는 서구에서 정치적으로는 근대국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들어서던 때였다. 새로운 사회 원리가 작동하려면 그에 알맞게 인간의 몸을 뜯어고쳐야 한다. 그래서 학교와 공장에는 군대식 규율이 강요되고, 사회의 모든 곳에 감시의 눈길이 미치며,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반사회분자'라 하여 격리되거나 심지어 체벌까지 받았다. '근대인'이란 이런 권력의 '생체공학'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푸코의 논리를 한국인에게 적용해보자.
우리의 근대화는 일본 식민지 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인들은 조센징을 더럽고 게으른 존재로 표상했다. 더럽다는 것은 근대적 위생관념이 없다는 얘기고 게으르다는 것은 근대적 시간관념을 체현하지 못하고 있음이다.
일본인들은 농경사회에 살아왔던 조선인들을 공장 기계와 함께 돌아가는 인공의 속도에 적응한 산업사회의 몸으로 뜯어고쳤다. 몸의 관성이 변하면서 우리의 속도는 점점 가속화되었다.
이후 우리는 의무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교육의 의무'와 '근로의 의무'를 강요받고 놀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 그때부터 '논다'는 개념은 부정적인 기의로 변질되었다.
인구의 다수는 여전히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 아래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대규모 이농 현상이 일어나고 농민들은 군대식 규율에 각인되며 '산업전사'로 변화되었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계절이 교차하는 자연의 리듬에 따라 살던 이들이 햇볕 안 드는 쪽방에서 자며 공장에서 18시간씩 일하는 일벌레로 바뀌는 과정은 마냥 평화로울 수 없었다. 전태일의 분신은 그 과정의 잔인함을 증언한다. 이런 폭력적 과정을 통해 한국은 서구에서 수백 년이 걸린 산업화를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이루어냈다.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인간의 몸을 뜯어고치는 것은 국가권력의 힘을 빌려서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인간 개조'라는 구호를 외치며 농경사회의 자연적 신체를 산업사회의 기계적 신체로 바꾸어 놓았다. 한국인은 자기도 모르게 '프랑켄슈타인'이 되어 버렸다.
우린 어느새 노동기계를 넘어서 노동중독자가 되었다. 돈을 벌 수 있다면 야근과 주말 노동까지 자발적으로 강행하며 스스로 쉴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였다. 이 정도면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OECD 주요국의 노동자 1인당 연간 실질 노동시간을 따지면 23개국 평균시간이 1670시간이고 한국은 2351시간이다. 우리는 미국의 1809시간, 일본의 1802시간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
일본인에게 게으르다고 불렸던 조선인의 몸은 몇십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자본주의적 신체가 되었다.
한국인의 기계화는 군대식 훈육을 통해 만들어졌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1970년대에 노동자는 일터에서는 '산업전사'였고 일터 밖에서는 '반공투사'였다. 심지어 대학에서는 교수들의 차량이 들어올 때마다 군대식 거수경례를 붙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을 들을 때 우린 운동장에서 군대식 도열을 해야만 했다. 떠드는 것은 물론이고 작은 움직임도 허락되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것의 연장이 세월호의 '가만있어라'가 아닐까? 기성세대들은 다음 세대들의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음에도 여전히 자신들에게 복종하길 원한다. 이런 군사문화는 시장에서도 통용된다. 회사에서도 사원들은 군대식으로 길들여진다. 심지어 연수 프로그램에도 극기훈련이나 행군을 도입하여 연수중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다. 이는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가면서 과거에 국가에 바치던 충성의 의무가 고스란히 회사로 옮겨감을 드러낸다. 그래서 일본과 한국 외에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회사인'이라는 개념이 도입된다. 한국의 회사인은 회사에 노동력만 파는 것이 아닌 전인격을 팔게 된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회사원의 모든 불상사(심지어 죽음까지도)는 개인이 감당하게 되었다. 회사는 '강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회사원들 역시 함부로 저항하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순응한다. 특히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더욱더 스스로 알아서 제 몸을 기업의 요구에 맞게 뜯어고친다. 언뜻 자발적으로 보이나 이 '존재미학'은 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강요한 '생존미학'일뿐이다.
2005년 고려대학교에서는 이와 관련해 기념비적 사건이 벌어졌다. 학교 측이 큰 건물을 지어준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려 하자, 몇몇 학생들이 거기에 항의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다음날 거의 전교생이 시위학생들을 질타하며 하예 총학생회까지 탄핵하겠다고 나섰다. '회사인'의 이상이 입사도 하기 전인 대학생들의 신체와 정신을 완전히 장악해버린 것이다. 이제 한국사회에서는 '인권'이나 '윤리', '철학'에 대한 교육이 배제되어가고 오직 '입시교육'만이 팽배하면서 교육의 본질이 사라진다. 대학은 더 이상 지성과 학문을 위한 금자탑이 아니라 대기업을 연결해주는 다리가 된다. (실제 많은 대학에서 인문계열 전공이 사라지고 있다.) '경제'가 '인간의 존엄성'보다 위에 있는 것이 당연한 논리가 되고 '개인의 이익'이 '전체의 공존'보다 위에 있는 것이 당연히 되어버리는 실정에서 이제 '정상'과 '비정상', '논리'와 '비논리'는 서로 자리바꿈을 하게 된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개인'이란 존재할까? '개인'이 스스로 '개인'이라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인권과 존엄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 우린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 '국가주의 코드'에서 자라 왔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한국보다 GDP가 낮은 나라 국민들을 무시하고 GDP가 높은 나라 국민을 우러러 본다. 즉 한국인에게는 개인이 완벽하게 국가와 일치한다. 그래서 국가는 언제나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 나라는 여전히 보수주의, 독재주의, 전체주의 코드로 유지된다.
그 코드는 국민 전체를 '속도전'으로 밀어붙인다. 성장 속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아귀다툼'을 하는 군중의 일원이 된다. 그것은 회사에서도 지하철에서도 버스에서도 엘레베이타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모두를 위해 질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경쟁에서 밀려나는 불안감을 갖게 된다. 심지어 한국의 슬로푸드는 미국식 패스트푸드보다 더 빨리 나오고 한국인의 평균 식사시간은 단 10분에 육박한다. 이런 시간에 대한 강박은 '기다림의 철학'과 '여유의 철학'을 잊게 만든다. 기다리고 쉬는 시간이 되면 그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불안해진다. 하지만 사실 한국에서 빠른 것은 정신의 속도가 아니라 신체의 속도이다. 공장 안의 속도가 공장 밖까지 정복해 버린 것이다. '빨리 빨리'문화는 원래 한국인의 고유문화가 아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느긋했고 여백의 미를 즐겼다. 그런 전통이 어느새 깡그리 소멸되고 이제 '여유'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 우린 이런 비극적인 문화를 '다이내믹 코리아'라며 미화시킨다. 물론 외국 관광객들은 한국의 이런 문화를 신기해하고 편리성과 밤늦게까지 놀 수 있는 유흥성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국민의 슬픔이 밑 바탕되어 있다. 그 슬픔의 본질에는 우리의 속도 발전이 '질적 성장'보다 '양적 성장'에 치우쳐있음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보다 잘 사는 서구사회의 느림은 게으름도 아니고 비효율도 아니고 경쟁의 배제도 아니고 역동성의 결여도 아니다. 그들의 가속성은 양적인 속도보다 질적인 속도에 외연적인 속도보다 내포적 속도에 치우쳐있다. 결국 우리는 행복한 삶보다 피곤한 삶을 살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가 피곤한 이유는 존재의 초점이 정신보다 신체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의 과정이 인문학적인 내면적 성장보다 부자나 계급 상승의 외면적 성장에만 몰입하고 있다. 심지어 천박한 오징어 담론(남자친구와 극장에 갔는데 스크린 속의 원빈을 보다가 남자친구를 보니 남자친구가 오징어처럼 보이더라)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일반화되고 있다. 신체는 어느덧 자본화되고 성형 열풍, 운동 열풍이 불면서 얼짱 몸짱이 아니면 열성존재가 되어버리는 문화를 양상 했다. 관심이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것에만 쏠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껍데기 같은 존재가 되어간다. TV, 인터넷 미디어도 그것에 한몫하고 국민 전체와 쌍방의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난독증이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글자 언어에 무감각해지고 시각 언어만 발달하여 끊임없이 타인을 껍데기로만 판단하고 있다. 이런 비극적인 '신체의 자본화 문화'에서는 당연스럽게 벌어지는 현상은 '집단 소외현상'이다. 예쁜 사람과 못생긴 사람,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후자를 소외시킨다. 문제는 자신이 후자에 속하면서도 전자가 되기 미치도록 갈망하면서 자신의 현존을 소외시키는 것, 즉 나없는 내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이런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이 철저히 소외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한국사람에게 장애인은 불편한 존재가 되고 만다. 또 한국보다 저 성장 국가의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와 혼혈아들도 열성으로 간주되어 소외되고 만다. 이런 전체주의적 발상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단지 그렇게 길들여진 것뿐이다. 이렇게 개인의 비판적 능력이 상실된 채 패거리 문화, 냄비 문화, 갑질문화, 님비현상이 팽배하게 된 것도 우리의 문명화 과정이 식민주의에 의해 단절된 결과이고 한국전쟁, 독재주의, 빠른 근대화 과정을 통과하면서 얻어진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젠틀맨'으로 상징되는 진정한 문명화 과정은 단 시간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구의 부르주아들도 오랜 시간에 걸쳐 궁정에서 귀족문화를 접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가 교양을 갖추는 데에는 몇 세대가 걸리는 법이다. 하지만 고속 성장을 통해 급하게 부상한 동양, 특히 한국의 부르주아들은 미처 교양과 예법을 갖출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의 경제적 상류층마저 천박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사회 전체가 졸부들의 천민자본주의라는 대단히 야성적인 특징을 갖데 된 것이다. 본받을 만한 지표가 없는 우리의 지성은 갈길을 잃어 카오스 상태에 이르고, 무엇이 진정 옳고 무엇이 틀린지 구분하는 판단력마저 잃어버렸다. 그저 '성공'하고 출세하면 모든 것이 면죄부를 얻은 양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또 대출이나 카드빚을 통해 성공의 망상을 현재에 끌어당겨 누리면서 자연스럽게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한시도 돈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돈걱정이 나의 실존이 되어 버려 모든 시간을 어니 내 삶 전체를 돈으로 환산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이런 망상의 극대화가 이성적 합리성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모두가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게 되었다. 논리적인 설득보다 정서적 감동이 앞서게 되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의 진정성 없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곤 한다. 정념이 풍부했던 서구인들이 냉정하며 계산적인 합리적 존재로 바뀐 것은 이른바 '문명화 과정'이라는 것을 통해서였다. 한국인에게 감정이 풍부한 것은 근대화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이를 간단히 역사적 후진성으 징표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아직 팔팔하게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의 표출일지 모른다. 한국인의 풍부한 감정에서 미래의 경쟁력, 즉 예술성과 창의성을 읽는 견해도 있다. '한류'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이런 담론이 가끔 등장하는데 사실 예술성과 창의성은 '격정'과는 별 관계가 없다. 예술의 토대인 '미적 취향'은 격정을 억제하고 지각을 섬세화 하는 과정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뜨거운 정열과 열정 이면에는 반드시 차가운 이성이 존재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박정희 덕에 먹고산다'는 어법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를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여기고 그 신화를 여전히 믿고 있다. 하지만 영웅과 카리스마에 대한 우리의 열망은 그만큼 우리가 '자율적 주체'가 되지 못했음을 뜻한다. 성인이 돼서도 판단과 행위의 자율성에 도달하지 못한 미성숙한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정신을 대신하여 판단해주고 자신의 신체에 명령을 내려줄 카리스마를 요구하게 된다. 이는 아마 한국식 '근대화'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한국에서 근대화는 개개인을 자율적 주체로 세우는 게 아니라 명령에 복종하는 병사 집단으로 묶어내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카리스마를 열망하는 것은 과거 국가 주도하에 노동력의 단순 투입으로 생산력을 향상시키던 시절의 추억이다. 저발전 상태를 전제하는 고도성장의 시대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경제도 민간 주도로 바뀌면서 개개의 경제주체의 창의성이 중시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독립적인 존재가 되려면 자신의 편에 서야 한다. 자신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나의 욕망을 대면해야 한다. 사회에 억눌려 억제되어있지 않은지... 사회에 부채질되어 끌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일그러져있지 않은지. 내가 나의 욕망을 인정하고 타인과의 거리를 주시하며 그것을 합리적으로 컨트롤할 때, 타인과 소통하며 욕망이 순환될 때... 내가 자유해지며 진정한 카리스마가 발휘된다. (마치 데미안처럼...)
-끝-
여기까지가 이 책의 절반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사서 직접 보셨으면 합니다.
제가 이런 수고를 자처한 것은 우리의 지질함이 전적으로 우리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음에서 입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맷 데이먼이 로빈 윌리암스한테 "It's not your fault"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억눌려있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펑펑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그의 삶을 변하게 합니다.
저도 이 책을 보고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부모님도 원망하지도 제 자신을 미워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전 여러분이 이 책을 꼭 사서 꼭 보셨으면 합니다. 전 세 번 읽었습니다.
자신을 인지하는 거시적인 관점을 키워줄 것입니다.
전 이제 제 욕망을 투명하게 보려 합니다.
그 자체를 인정하려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어떤 욕망을 타 부시 할수록 더 그것에 얽매인다고 합니다.
오히려 인정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시킬 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라.
그것이 너의 시작이다
마지막으로 회원들과 '욕망'을 주제로 창의적인 끝말잇기를 했던 내용을 공개합니다.
(창의적인 끝말잇기란 보이지 않는 관념을 보이는 것과 연관시키면서 각자 창의적으로 정의하는 놀이)
주제: 욕망
욕망은 맥주이다
맥주는 마시면 시원해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탄산이 있어서 마실수록 목말라진다.
욕망은 주전자이다.
주전자처럼 곡선 형태의 주둥이가 있지 않으면 넘치는 욕망이 콸콸 쏟아진다. 욕망이 날로 새어나오면 많은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합리적 이성을 통해 컨트롤하면서 조절할 필요가 있다.
욕망은 자전거이다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어떤 낚시꾼이 걸어놓은 낚싯바늘이 바람에 날려 얼굴 바로 앞을 지나갔다. 하마터면 얼굴에 흠집 날 뻔했다. 타인의 욕망이 나를 헤칠 수도 있고 나의 욕망이 타인을 헤칠 수도 있는 것이니 주의하자.
욕망은 거미줄이다
곤충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걸려 더 이상 앞으로 못 나갈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을 인식하지 못하면 계속 발버둥 쳐도 결국 정체되어 있는 것이다.
욕망은 줄넘기이다
줄넘기는 줄을 뛰어 넘어야 하는 놀이다. 하지만 넘지 못하고 줄이 걸렸을 때 속상하다. 욕망도 그것이 일어날 때 어떤 방식으로든 뛰어넘지 못하면 해소되지 못하고 찜찜하고 속상하다. 자신의 욕망을 무시하지 말고 인지하고 인정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시켜 해소해줄 필요가 있다.
욕망은 기차이다
기차여행은 과정이 중요하다. 창밖을 보며 풍경을 감상하기도 하고 달걀과 사이다를 먹기도 하고 옆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할 수도 있다. 목적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그 목적지의 의미가 생긴다. 욕망도 마찬가지이다. 욕망의 결과에만 집착하지 말고 욕망을 분출하는 과정을 즐기자
욕망은 차선이다
초보 운전자는 차선을 쉽게 변경하지 못한다. 하지만 점점 운전에 익숙해지면 차선을 변경해보는 걸 시도해보는 것도 좋다.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주어진 하나의 차선으로 계속 가는 것과 같다. 차선을 옮기는 것이 물론 겁이 나고 두렵지만 용기를 내어 조금씩 변경하다 보면 자신이 진정 원하는 차선이 어떤 것인지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