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정복이야기 1

알콜홀릭 ㅣ 카르멘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2-05 오후 5.06.42.png 주류제조가


취미로 술을 만들어요. 알콜이 주는 위로와 행복에 대해서 함께 공유하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카르멘

학부 때는 일본어를 전공하고 대학원은 일본지역 전공을 했지만 서울에 삽니다. 잘 닦여진 아스팔트 같은 순탄한 인생을 살았지만, 같이 걷던 사람들도 이정표도 사라진 길 위에 홀로 서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이 길이 맞는지 고민이 됩니다. 아마도 지금은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돌아봐야 하는 시간 같아요.







늙은 여자가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어제만 해도 병실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얼른 퇴원해서 계곡으로 피서를 가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는데, 오늘은 홀로 인공호흡기에 목숨을 의존한 채 거친 숨만 몰아쉰다. 늙은 여자의 의식은 분명 또렷했지만 병원에서는 진정제를 써서 재웠다. 깨어있으면 목을 뚫어 끼워 넣은 인공호흡기를 밀어내는 터라 그 편이 ‘안전’하다고 했다. 혹시라도 비몽사몽한 환자가 주의 소리를 듣고 깨어 발버둥이라도 칠까 손목과 발목은 누런 천으로 동여맸다.


주글주글 살갗이 메말라버린 퉁퉁 부은 손과 멍이 들어 시퍼런 발목에는 손가락길이 만한 주사바늘 대여섯 개가 꽂혀있다. 이미 온 몸으로 퍼져버린 곰팡이균을 죽이기 위한 항생제와 혈압을 높여주는 승압제, 수액과 영양 주사를 넣어주기 위한 바늘이다. 목에는 투명하고 굵은 줄이 꽂혀있다. 혈관에서 피를 뽑아 냉장고만한 기계에서 노폐물을 걸러 다시 몸속으로 넣어주는 줄이다. 인공호흡기와 연결된 콧줄은 표정 없는 정복의 얼굴에 걸쳐있다. 목숨줄이다.


젊은 의사가 와서 말한다. 이런 말을 전해서 몹시 안타깝지만, 저기 저 속절없이 누워있는 늙은 여자는 며칠을 못 넘기고 곧 죽을 거라고. 곰팡이균이 너무 퍼져서 이미 한쪽 폐는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며칠 내로 다른 한 쪽의 폐도 그 기능을 상실할 거라고. 그렇게 되면 조만간 호흡곤란이 오고 심정지가 올 텐데, 심폐소생술에 동의하시냐고.


늙은 여자의 이름은 정복이다. 성은 한 씨인데 원래는 이 씨였다고 한다. 육이오 때 남편을 잃고 어린 정복만을 들쳐 메고 남으로 피란 온 어머니가 재가한 계부의 성을 따른 것이다. 올해로 66세가 된 정복에게는 서른 중반 줄이 된 아들 둘이 있었다. 큰 놈은 지 애비를 닮아 눈이 크고 서글서글 멀끔하게 생겼고, 작은 놈은 정복을 닮아 수더분하게 생겼지만 어딘지 다부진 구석이 있었다. 두 놈 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 어디를 가도 아들 잘 키웠다는 칭찬 일색이라 보잘 것 없는 정복의 인생에 큰 자부심이었다.

가난과 알코올에 절어 사는 남편. 정복에게 지워진 생계. 하루 종일 계속되는 미싱질과 집안일. 정복의 인생에는 수십 개의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픈 가시는 ‘자식’이었다. 하루 16시간을 꼬박 일했지만 살림은 항상 어려웠고, 어려운 살림에 금쪽같은 아들 둘을 ‘남들 다 하는 것’ 중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해주지 못했다. 그게 늘 시리고 아팠다. 곰보 얼굴에 구부정한 어깨, 초라하고 남루한 행색이 행여나 자식 앞길에 흠이 잡힐까 공부 잘하는 둘째 놈 학교 선생님이 불러도 늘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그럼에도 아들 둘은 크게 엇나가지 않고 잘 자라주었다. 공부에 소질이 없던 큰 놈은 전문대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작은 회사에 취직을 해서 돈을 벌었다. 큰 아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가난과 가정불화와 알코올로 범벅된 집에 처음으로 희망이 비쳤다. 아들이 한 달을 꼬박 일해서 받아온 첫 월급으로 가족 넷이서 처음으로 외식다운 외식을 했다. 동네 귀퉁이의 작은 일식집에서 식구 넷이 사시미 소(小)짜와 초밥 삼인분을 주문했다. 큰 아들은 돈이 넉넉하다고 더 시키자고 했지만 충분하다며 마다했다. 아들이 벌어온 돈은 괜스레 더 아까웠다. 스끼다시며 매운탕이며 이것저것 많이 나왔다.


작은 놈은 기특하게도 제 형보다 먼저 장가를 갔다. 학원 한 번 보내지 못했지만 혼자서 대학을 나오고 사법고시를 붙어서 변호사가 된 작은 놈은 재작년에 철부지 며느리를 데려왔다. 음식도 못하고 살림에는 영 젬병이지만 복슬복슬 싹싹했다. 해준 것 없이 어른이 되어버린 아들이라 며느리에게도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얕잡아 보일까 신경이 여간 쓰였다. 그래도 시부모라고 괜찮은 식당에도 데려가주고, 제주도도 데려가주고 아들보다 살가운 게 딸같이 예뻤다. 큰아들만 짝을 찾아주면 남은 인생은 그래도 재미난 일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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