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뉴욕 뉴욕

단편소설 ㅣ 화이

by 한공기
화이 프로필.jpg 땅고댄서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희정은 입이 뾰루퉁하게 나와 있었다. 세연과 지욱이 가이드 책을 보며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는 브루클린 다리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11월 넷째주의 뉴욕은 생각보다 너무 추워서 관광을 즐기기에는 썩 좋은 날씨라 할 수 없었다. 햇볕은 화창했지만 오늘부터 영하로 떨어진 날이었다. 그런데도 많은 관광객들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도 사진을 찍으며 오고 가느라 벅적거렸다. 기철은 세연과 지욱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면서도 연신 희정의 눈치를 살폈다.


"이게 다 자기 때문이야."


입이 주먹만큼 나온 희정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기철은 못들은 척 했다.

브루클린 다리는 철제 구조물로 중후한 느낌을 주었다. 다리 바닥은 널판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리 난간 밖으로는 철조망이 꼼꼼이 쳐져 있었고, 다리 아래에도 철골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게 뉴욕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래. 1883년에 지어졌는데 만드는 데만 16년이 걸렸대."
"진짜, 아래층은 차가 다니고 위층은 사람이 건너는 다리네. 특이하다. 보통 다른 다리들은 인도가 차도 옆에 있는데 말야."


세연과 지욱의 말에 희정이 퉁명하게 대답했다.


"근데 이렇게 철조망처럼 다 막아놔서 풍경도 제대로 안보이네. 저 옆에 맨하튼 브릿지가 더 예쁘다 뭐."


기철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사진기를 들면서 말했다.


"자자, 그러지 말고 그 앞에 서 봐. 사진 찍자. 세연이랑 지욱이 먼저 찍어줄께."
"아, 그럼 저 앞에 탑도 잘 나오게 찍어줘."


다리가 시작되는 부분에 높이 솟은 고딕 양식의 벽돌 타워가 있었다. 그 탑을 중심으로 철골 파이프와 강철 케이블들이 얼기설기 엮여있는 디자인이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 희정이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온통 쇠파이프 말고는 보이는 게 하나도 없어. 풍경도 가려져서 안나오잖아.


계속 저기압인 희정에게 기철이 한마디 하려다가 참았다. 희정의 기분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이런 분위기면 모두가 힘들었다. 기철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뉴욕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자유의 여신상 중 하나만 보라고 하면 난 자유의 여신상을 택하겠어!"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닌 범석이 결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희정은 들떠서 이렇게 외쳤었다. 대학 동창인 세연과 지욱, 희정과 기철은 범석의 결혼식을 핑계로 짧은 뉴욕 여행을 계획했다. 그리고 남은 단 이틀동안의 자유시간에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가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결혼식장에서 만난 범석의 친구들은 그들을 만류했다.


"난 뉴욕에 산지 4년째인데 한번도 자유의 여신상 보러 간 적이 없어."
"음... 꽤 추울텐데... 별로 볼 것도 없고...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


미국 동부의 11월은 해가 4시정도면 지기 시작해서 5시만 돼도 벌써 8시쯤 된 느낌이었다. 친구들은 자유의 여신상을 보려면 페리를 타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엄청 추울테니까 가려면 중무장을 하고 가라며 겁을 줬다.


"희정아, 진짜 자유의 여신상 꼭 보고 싶어?"
"응! 뉴욕 하면 자유의 여신상이잖아. 여기까지 와서 자유의 여신상을 안 보고 가면 파리 가서 에펠탑 안 보고 오는거랑 뭐가 달라?"
"그치만 엄청 춥다잖아. 다들 비추한대고. 너 추위 많이 타는데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래도...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희정은 춥다는 말에 살짝 망설였다. 기철이 희정을 설득했다.


"그럼 페리 타기 전에 그 앞에 있는 공원에서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면 사진만 찍고 그냥 오자. 안 보이면 배 타고 들어가고..."
"... 알겠어."

결혼식 다음날, 넷은 느즈막히 일어나서 점심을 여유있게 먹고 지하철을 타고 페리 선착장으로 갔다. 마침 날씨가 약간 풀려서 따뜻하고 하늘도 구름이 많지 않은 쾌청한 날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공원에 도착했다.


"에? 이게 무슨 공원이야? 너무 휑하잖아?"
"야야, 자유의 여신상 저 멀리 깨알만하게 보인다."
"너무 멀어서 안보인다. 어떡할까?"
"그럼 그냥 페리 타고 들어가자."


매표소가 어디에 있는지 안내가 되어 있지 않아 넷은 한참 우왕좌왕했다. 마침 출발한 지 얼마 안 되는 페리 한 척이 보였다. 출발지를 가늠해서 매표소를 찾아가니 아무도 없고 창문도 잠겨 있었다.


"어? 매표소가 여기가 아닌가 봐."
"아냐, 여기 맞는거 같은데... 이상하네."
"여기 말고 어디 딴 데 파는데가 또 있나 보지. 찾아보자."


하지만 공원 근처를 다 돌아봤어도 표 파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어, 저기 배 들어온다."


세연이 외쳤다. 마침 페리 한척이 들어오고 있었다. 네 사람은 아까 매표소로 보였던 곳으로 갔다.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 중 선원처럼 보이는 모자를 쓴 사람이 보였다. 네 사람 중 영어에 가장 자신이 있는 기철이 다가가서 물었다. 기철은 곧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어쩌지? 오늘 페리 영업이 끝났다는데? 마지막 배가 3시에 떠났대."
"지금 몇시야?"
"3시 반. 아까 우리가 본 배가 마지막 페리였나봐."
"아앙... 난 몰라."


희정은 곧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뭐야.... 뉴욕에서 오로지 진짜로 보고싶었던건 자유의 여신상 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하나도 안보여...! 이게 뭐야...."
"자기야, 아까 보니까 여기 워터 택시라고 있더라. 그거 타면 호수 한바퀴 돌고 시내에서 내릴수도 있대. 그거라도 탈까?"
"그건 얼만데?"
"한 사람당 3-4만원 정도?"
"싫어. 너무 비싸고 추운데 그렇게 빙 돌고 싶지도 않아. 그냥 자유의 여신상만 보고 싶다구...!"
"그럼 내일 다시 오자. 내일은 일찍 오자."
"됐어, 뭐하러 또 와? 한번 왔으면 됐지..."


희정은 단단히 삐져서 내내 심술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다시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가자는 기철의 설득에도 시큰둥한 바람에 브루클린 다리도 오후 두시가 넘어서야 나오게 되었다.

해가 이미 기울기 시작하는 뉴욕의 오후는 강바람에 코와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이미 오전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다녀온 세연과 지욱은 애써 희정과 기철 사이의 냉기류를 무시하며 마지막 뉴욕에서의 오후를 만끽하는 듯 했다. 천천히 다리를 건너는데 해가 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노을과 빌딩 숲 사이로 자유의 여신상이 보였다. 잠시 멈춰서 그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던 희정이 기철이 들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를 나꿔챘다.


"나 저 앞에 먼저 가 있을께!"


희정은 다리 앞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무 널빤지로 된 다리가 불안한 듯 투박한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리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 사이를 비껴가며 희정은 계속 달렸다. 다리는 사진을 찍어도 풍경 안에 강철 케이블들이 촘촘이 들어와 예쁘게 찍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리 시작지점에 있었던 타워 옆으로 1.5미터 정도 구조물이 없는 공간이 있었다. 다리는 대칭으로 지어지니까 아마 반대쪽에도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을 것이었다. 하늘은 이미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해는 아마도 5분 정도면 져 버릴 것이다. 다리 널빤지 사이로 다리 아래의 철골들이 보였다. 만약 널빤지가 부서져서 여기서 떨어진다면 저 철골에 부딪혀 굉장히 아프겠다고 희정은 생각했다.

어느덧 희정은 다리 끝에 도착했다. 역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아뿔싸, 메모리가 다 찼다.


"아이 참, 하필 이럴 때..."


희정은 초조하게 중얼거리면서 급히 사진 몇 장을 골라서 삭제했다. 그리고 황금빛 노을과 검은 실루엣의 빌딩들, 그리고 그 중앙에 점처럼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마지막 셔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해가 구름 속으로 숨었다. 희정은 그제서야 숨을 몰아 쉬었다.


"뭐야? 왜 갑자기 막 뛰어간거야?"


기철이 어느 새 다가와서 물었다. 희정은 대답 없이 씨익 웃었다. 어제 저녁 이후로 처음 보여주는 미소였다. 기철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희정의 마음이 풀린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희정은 혼자서 싱글싱글 웃었다. 한참을 뛰어 온 덕분에 몸이 훈훈해져서인지 매섭던 강바람이 그리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해가 숨어버린 붉어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세연과 지욱이 도착했다.


"아, 춥다. 벌써 해가 져 버렸어."

"이 근처에 맛있는 초콜렛 집 있대. 가보자."


코와 뺨이 빨개진 세연이 지욱의 팔짱을 낀 채로 모직 장갑을 낀 손을 비비며 말했다.

네 사람은 브루클린 다리 밑에 있는 덤보 지역으로 걸어갔다. 파르스름한 골목에는 벌써 가로등과 가게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제키스 토레스라는 작은 가게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따뜻한 오렌지빛의 조명과 짙은 초록색의 인테리어가 잘 어울렸다. 선반에는 초콜렛 박스가 가득했고, 몇몇 아이들이 초콜렛을 꺼내 들고 엄마를 조르고 있었다. 각종 넛트가 믹스된 수제 초콜렛도 진열장에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초콜렛 만큼이나 달콤해 보이는 커플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핫 초콜렛 네 잔을 시켰다. 초콜렛은 아주 진하고 뜨거웠다.

"희정아, 이제 기분 다 풀렸어?"


세연이 물었다. 희정은 핫 초콜렛을 한 모금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는 함빡 웃음이 걸려 있었다.


"뉴욕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구나. 좀 아쉽다."
"자유의 여신상, 결국 못봤네. 어쩌냐?"


지욱이 놀리듯 물었다. 희정은 다리 위에서 찍었던 마지막 사진을 떠올렸다. 어쩐지 자유의 여신상을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희정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사진이나 영화에서 많이 봤는데 뭐. 그것보다 이 집 핫 초콜렛 진짜 맛있다."


세연이 맞장구를 쳤다.


"응, 엄청 진하다. 물에 타서 먹는 코코아랑은 차원이 다른데? 진짜 초콜렛 녹여서 만드나 봐."
"아, 완전 좋다."

희정은 머리 위로 팔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브루클린 다리 위에서의 매서운 바람에 얼었던 뺨도, 어제의 심술까지도 다 녹아버린 기분이었다. 문득 이제 겨울이구나 깨달았다. 곧 12월이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뜨겠지. 희정은 올 크리스마스는 번잡하지 않고, 이렇게 조용하고 편안하게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학때부터 늘 함께였던 세윤, 지욱, 기철과 말이다. 기철.... 희정은 옆에서 핫 초콜렛을 후후 불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테이블 아래로 팔을 뻗어기철의 손을 잡았다. 기철이 손바닥의 살집 만큼이나 부드러운 눈빛으로 희정을 바라보았다. 희정은 미소 지었다. 고맙고 따뜻하고 행복했다.



P1040011.JPG?type=w740

[출처] [단편소설] 뉴욕 뉴욕ㅣ 화이 (비공개 카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선 위의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