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이야기 ㅣ 이정민
전 건망증이 심해서 병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전 10시반에서 11시까지 무엇을 했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물은 몇 잔을 마셨는지...흘러간 시간 속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감정들까지도 세세하게 기록하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이정민
직장인. 성격이 무척이나 쾌활한데 힘든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과장일지도 모름.
면회시간에 넉넉하게 도착했다. 큰 티비 앞 의자에 앉아 면회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면회시간이 되기 전부터 중환자실 앞으로 가 서서 기다렸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와 이런 저런 설명을 했고 사람들은 손을 씻었다. 손을 씻는 사람들을 보며 이 사람들이 가지고 온 균과 저기 안에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균 중 어느 쪽이 더 상대 쪽에 위험이 될까 생각했다. 환자 당 두명만 면회가 가능했기에 아버지가 나오면서 주신 이름표를 목에 걸고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은 티비에서 보던 것처럼 밝았고, 생각보다 넓었다. 넓은 병실에서 두리번거리다 곧 같이 간 고모를 발견하고 할머니를 찾았다. 퉁 퉁 부은 발, 하얗게 피부가 일어난 손, 멍든 팔뚝, 목 주위로 둘러진 관들. 점심시간이라 고모가 할머니에게 점심을 떠먹여드리고 있었다. 어른숟가락으로 반입씩, 또 반입씩. 할머니는 우물우물거리며 드시다가 기침을 쿨럭쿨럭 하셨다. 목구멍에서 간질거리는 기침이 아니라 폐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침이었다.
-아유 정민아 내가 왜 이렇게 됬겠노
할머니 손을 한참 잡고 있다 면회시간이 끝나 저녁에 또 오겠다 말씀드리고 나왔다.
아버지는 여기 주위 물회로 유명한 집이 있다며 거기에서 점심을 먹자고 하셨다. 물회집이 저 앞에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차들은 줄을 섰다. 혹여 새치기를 당할까 노심초사하며 물회집 입구에 들어서서 주차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또 줄을 섰다. 나는 주문을 하러 먼저 내렸고 물회집으로 갔지만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번호표 기계에는 54라고 적혀있었고 366번 표를 들고 야외 테라스로 나가 기다렸다. 땀 흘리며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참 듣다 물회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물회에는 회와 오이와 배와 김가루가 뒤섞여 있었다. 아버지는 맛있게 먹으라며 육수를 얹어주었다. 얼음과 육수가 덩달아 섞였다. 오이를 가리는 나는 한참 오이를 가리다가 포기하고 배와 회만 건져 먹었다. 입 안 상처가 매운 물회 육수에 아렸다. 다른 사람들은 맛있게 먹는 것 같았다.
어영부영하다 저녁 면회시간 전에 도착해서 손을 씻고 기다렸다. 점심 면회처럼 아버지 다음으로 병실에 들어갔다. 낮에 갔던 자리로 익숙하게 걸어갔다. 고모가 들던 밥시중은 작은 어머니가 들고 있었다. 할머니가 싱거워서 못먹겠다고 하셔서 작은 어머니는 간장을 좀 들고 올까요 하고 있었다. 입이 깔깔하신지 할머니가 입을 달싹거리셨다. 할머니 아랫입술 안쪽이 헐어있었다. 할머니가 나를 힐끗 보셨다. 한 번 더 할머니 라고 불렀다.
-아이고 장녀야 내가 니를 못 알아봤겠노.. 나는 여기 일하는 사람인 줄 알았네.. 내가 눈이 잘 안보여서 .. 내 니 못 알아봤으면 니 못 알아본다고 얼마나 서운캤겠노
울컥 눈물이 났다. 손녀 서운할까봐 종종거리는 모습이 슬펐다. 언뜻 옛날 생각이 났다. 해가 잘 들지 않는 어두운 부엌에서 할머니와 나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나는 흰밥을 숟가락으로 푸고 할머니는 식은 감자탕 시래기를 손으로 죽 죽 찢어 숟가락 위에 얹어주었다. 할머니는 원래 시래기가 맛있는 거라고 했다. 나는 맛있게 먹었다. 그 밥들을 먹고 나는 이렇게 컸다.
[출처] 나는 이렇게 컸다. (비공개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