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취미를 시작하다 ㅣ 이승철
독립출판도 3권 출판 했고, 지인들과 그림 전시회도 했습니다. 요즘엔 꾸준히 1주일에 한장씩 드로잉을 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는 아니고 그냥 모두 취미로...
작가 프로필 ㅣ 이승철
넓고 얕은, 호기심 많은 유부남
모토는 "일단하자!"
문득 걷고 싶었다. 바쁜 출장이 끝나고 생겨난 여유를 어떻게 소비할까 고민하다 갑자기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휴가는 급하게 제주로 정하고 숙소와 비행기를 예약했다. 사실 이번 휴가는 집에서 편하게 쉬고 싶었다. 웬만한 여행지는 성수기 특수를 놓치지 않기 위해 거품 끼인 가격으로 배짱장사를 하고 있어서 마음 편히 다녀오기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런 여행 계획을 세우지 않았기에 급하게 제주도행 항공권과 2박 3일의 숙소를 부랴부랴 예약했다. 누가 제주도 가는 비행기 표가 없다고 했던가. 비싸게 주면 다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숙소도 평소와 비슷하게 제값을 받는 부티크호텔을 예약했다. 혼자 걷고 혼자 여행하는 거라면 계획 없이 아무렇게나 다녀오면 되지만, 각시와 함께해야 하는 여행이라 준비를 안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걷고 싶은 계획 자체를 바꾸고 싶지는 않아서 이번 여행에는 차량 렌트를 하지 않고 대중교통과 도보로만 여행하기로 사전에 합의를 보았다.
최대한 가방을 줄여야 했다. 첫날 길어야 서너 시간밖에 안 걷지만, 문제는 그 걷는 때가 12시부터라는 것이다. 아침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중문까지 내려간 뒤 점심을 먹고 나면 대략12시가 될 것이다. 중문에서 우리 숙소가 있는 대평포구까지 약 3시간 남짓 걸린다. 우리는 한낮에 태양이 가장 높이 있는 시간에 올레 8코스를 걷게 되는 것이다. 나 혼자 걸으면 어찌어찌 걷겠지만, 함께 걸어야 해서 책임감 있게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과감히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출발 전날 배낭에서 뺐다. 새로 산 망원 줌이 달린 카메라를 빼야 했고, 별을 찍고 싶어 해서 넣어놨던 삼각대도 뺐다. 이번 여행에는 카메라 없이 드로잉북과 채색을 위한 고체물감까지만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모든 것은 계획 되로 되었다. 아침에 늦지 않게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늦지 않게 비행기에 탑승했으며 약 20분가량 늦게 출발을 했음에도 우리는 12시 즈음에 올레 8코스를 걷고 있었다. 중문부터 걷기 시작하면서 렌터카로 이루어진 차량부대를 지나치며 지난번 각시와 함께 왔던 제주도 여행을 떠올렸다. 그때는 차를 빌려서 제주도 해안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도는 코스였다. 그때는 날씨가 추웠던 때였는데 우리 차 옆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대단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막상 반대의 입장이 되어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저 차에 있는 사람들은 우릴 보며 얼마나 미련하다고 생각할까?’라는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차들이 지나치는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길로 접어들면서부터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우릴 미련하게 보는 사람도 없고, 차의 뜨거운 열기도 없고, 한적하니 둘이 걸으니 왠지 낭만적이고 해서 크게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가끔 나오는 다리 밑 그늘에서 땀을 말리고 중간에 왜 만들었는지 모르는 정자에서 쉬면서 이번 걷기는 쉽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편안함은 해안에 와서 무참히 깨지고야 말았다. 흙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가면 나오게 되는 해안도로는 우리에게 멋진 풍경을 보여주기 전에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뜨거움을 선사해주었다.그때 알게 되었다. 험난한 산길보다 평탄한 아스팔트 길이 도보 여행자에게 더 큰 시련을 준다는 것을.다행히 둘 다 퍼지기 직전에 빙숫집을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우린 콜택시를 부를 뻔했다. 빙숫집에서 숙소까지 차로 5분 거리였다. 5분이란 단어로 각시를 다독거렸다. 하지만 이 5분이란 단어의 마력은 얼마 가지 못하였다. 걷기 10분 만에 우리 각시는 기존의 걷기 코스를 무시하고 가로질러가는 지름길을 선택하였다. 올레길에서 얻을 수 있는 멋진 풍경과 여유 이런 것보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샤워가 더 큰 행복을 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로질러가도 결국은 걸어서 가야 하는 법. 마지막 2분을 남기고 각시는 주저앉았고 모든 사고의 회로가 멈춘 채로 ‘차로 5분이라며’란 말만 되새김질하며 계속 내뱉었다. 마지막 최후의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여기 코너만 돌면 숙소야’ 마치 등산할 때 좀만 더 가면 정상이 있다는 말에 희망을 얻는 것처럼 나는 그동안 아꼈던 그 말을 사용하였다.그렇게 3시간보다 더 길게 느꼈던 2분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숙소의 방문을 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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