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적 관찰일기 ㅣ 최미애
명상을 하면서 '관찰'이 취미가 되었어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촉감을 느끼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파악하는 관찰 작업을 수행하고, 그렇게 관찰하고 있는 자신을 순간 순간 깨달을 수 있도록 뭔가를 좀 써봐야 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작가 프로필 ㅣ 최미애
IT 9년차 직장인.
불교와 명상에 관심이 많아 경전을 읽으며 '집중'과 '관찰' 수행을 하고있다.
자신의 특기를 이용해 세상에 관한 '관찰일기'를 쓰려한다.
인디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 중에는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라는 곡이 있다. 보컬이자 베이시스트인 덕원이 대학교 때 있었던 교양 수업의 이름을 따서 지은 노래라고 한다. 어떤 내용을 가르치는 과목이었을까? 그 학교 학생이었으면 들어보고 싶었을 법한 강좌명이다. 노래에서는 한참을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는 사람과 상황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다가 1절과 2절이 '말 같은 말을 들어 보고 싶어/해 보고 싶어' 라는 가사로 끝난다.
말 같은 말이라니, 그게 도대체 뭐길래? 말 같은 말이고 말 같지 않은 말이고 잘 입 밖에 낼 줄 모르는 터라, 나에게 있어서 커뮤니케이션, 혹은 소통은 마음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단어였다. 나는 왜 다른 사람에게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결정적으로 상처 입히는 말을 골라 하는지? 왜 다른 사람들은 내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지? 내가 핵심, 혹은 알맹이 없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기 때문인지? 혹은 그렇게 말을 끊는 사람들의 인성이 별로여서 인지? 나는 왜 일상적이고 무해한, 친교를 위한 대화를 할 줄 모르는지? 그런 의문들은 항상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을 어둡게 만들곤 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다른 사람의 말이나마 잘 들어주고 잘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그마저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집중력이 떨어져 타인의 말의 서두 부분을 잘 듣지 못해서 중간 이후의 내용을 통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유추하는 일이 늘어 났다. 원래도 귀가 그다지 좋지 않아서 말하고 있는 것을 눈으로도 잘 지켜보던지, 혹은 말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능한 귀를가까이하고 있어야 말을 알아듣곤 해서 청각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어째서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이 나이 먹도록 이렇게 서툰걸까 싶어서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본다. 우선 말하기의 서투름에 대해 반추하다 보면 곧잘 콘텐츠없는 삶이라던가 공허한 내면이라는 자기 비하적 결론에 이르기 십상이다. 다른 사람의 말도 잘 못 듣는 것도 결국은 남에게 관심이 없는 이기적이고 차가운 사람이라 그런 모양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런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이 언제나 괴롭다 보니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일단은 나에게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하기로 하자.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인간이라 커뮤니케이션이 서투르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결론을 거기서 내버리면 더 쓸 내용도 없어지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보자. 다른 사람과 일상적인 대화 주제를 잘 이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무언가 그러지 못하게 만드는 강박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대답은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른 이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쉽게 '말 같은 말'에 집착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말 같은 말'을 하는 훌륭한 사람이고 싶고, 다른 사람도 '말 같은 말'을 하는 인격자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우주 안에 불완전한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거의 대부분 '말 같은 말'은 하지도 듣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사는 것 같은데, 나는 그다지 그런 불완전한 자신과 타인 모두에 적응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들 적응하고 살아가는 거지? 서른두 해 동안 부지런히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다 보통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는데, 이대로 아집만 쌓여 나이가 들고 비뚤어진 채로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무섭다. 그런 두려움이 몰려오는 밤에는 친한 친구가 몇 달 만에 걸어 준 전화도 받지 않고, 카톡에 1이 없어지지 않게 하려고 비행기 모드를 켜고 몰래 나의 카톡 대화방을 훔쳐 보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는 말 같은 말을 잘할 자신도 없고, 말 같지 않은 말만 늘어놓는 타인을 혐오하지 않을 자신도 없다. 하지만 그 숱한 말 가운데 어색하고 불편했던 자리를 깨트리는 누군가의 농담 한마디나, 너무 일에만 미쳐 사는 나를 걱정해 주던 직장 동료들이 나지막이 건네는 위로나 조언은 마음에 남아 때때로 미소 짓게 한다. 그리고 재밌게 읽었던 소설이나 너무나 마음을 흔들었던 여행지의 기억을 온 정성을 다해 친구에게 설명하던 그 느낌은 소통에 대한 희망 비슷한 것을 갖게 한다. 굳게 닫혀 있는 나의 마음도, 그리고 그다지 열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이는 타인의 마음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 닿기를 바라는 간절함. 형식을 떠나 결국 소통이란 것이 그러한 간절함의 전달이라는 사실을 느낄 때, 1년 열두 달을 냉동실에 갇혀 있던 명태 마냥 뻣뻣하고 차가웠던 나조차도 감동하고 만다. 불완전한 우리가 충족됨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 '와 닿음' 혹은 '가 닿음'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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