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에 관한 이야기 ㅣ 곽정빈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또 좋아하는 책이 헤르만헤쎄의 데미안입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인간 본연의 양면성을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말을 곧 잘하곤 합니다.
작가프로필 ㅣ 곽정빈
저는 3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 1년간 세계여행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두 눈을 황홀하게 채우는 수많은 풍경들보다도 여태껏 가져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대면해야 했던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채워 왔습니다. 글을 쓸 때 비로소나 나 스스로가 나 다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희미해져만 갔던 나의 자아가 글을 쓰면서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된 제 인생의 2막에서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글을 써나가고자 합니다.
늘상 보는 TV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무심코 채널을 돌리던 중에 강호동과 유세윤이 진행했던 [무릎팍도사]를 본 적이 있다. 흐릿한 기억 때문에 게스트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한 유명 여배우였다. [무릎팍도사]는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스타들의 진솔한 이야기와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는, 그 말미엔 스타의 고민을 듣고 무릎팍도사인 강호동이 나름의 해결을 지어주며 끝을 내는 형식이었다.
그 날의 게스트였던 그 여배우의 고민은 남편과 관련한 것이었다. 남편은 대기업을 다니는 이른바 월급쟁이 직장인이었다. 그리고 여느 다른 회사원과 다를 바 없이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을 하며 늦은 저녁에서야 지친 몸을 이끌고 오는 한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그런 남편이 집에 와서 하는 거라곤 말없이 TV를 보는 것이었다. 오늘 하루 별일은 없었는지, 밥은 제때 챙겨 먹었는지, 이번 주말에는 쉴 수는 있는 건지... 지친 남편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남편과 대화를 하고 싶은 아내의 마음을 과연 알기는 하는 것인지 남편은 오로지 TV에만 열중할 뿐이었고, 그것이 바로 이 여배우의 고민이었다.
[무릎팍도사]에서 빠질 수 없는 감초 역할이 바로 유세윤의 몫이었는데, 이 여배우의 고민 토로가 끝나자마자 유세윤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남편이 TV 보는 것 같죠? TV 보는 척하는 겁니다~"
당시 유세윤 특유의 깐죽거리는 말투와 얄밉고 능청스러운 연기에 정신없이 웃었던 것 같다. 간혹 웃음의 포인트가 너무 공감되면 생각이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전개가 되기도 전에 웃음이 먼저 반응하여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그런 때였다.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여배우의 남편이 초점이 풀린 눈으로 TV를 보는 척 해야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매일같이 정신없이 쏟아지는 업무를 쳐내다 보면 녹초가 된 채로 맞이하는 퇴근 후 늦은 저녁, 좀처럼 깔끔하게 처리되는 법 없이 다음 날로 이어지는 끝이 없는 업무들, 퇴근 후에도 온 정신을 부여잡고 떠나질 않는 다음 날 아침부터 몰아칠 숨 가쁜 업무들... 나 역시도 입사 3년 차에는 끝이 없는 업무와 처리해내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불어나는 업무들 속에서 좀처럼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렇게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난 후에 맞이한 주말에는 어떤 다른 약속도 잡지 않았다. 회사 기숙사로 돌아와 나 홀로 조막만 한 사각의 공간에서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멍하니 앉아 있는 것 말고는 하고싶은 것이 전혀 없었다. 아니 가만 생각해보면 다른 누군가를 만날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에너지가 고갈되었던 것이다.
소통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상대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말을 하게 된 경위와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당시에 느끼는 감정 등의 무수한 인자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화자가 된 경우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을 이해시키고 내 말에 공감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의 배경지식에 맞는 어휘 선택과 말의 빠르기와 적당한 어조, 경우에 따라 적절한 예시와 비유를 통해 상대방을 설득시켜야 한다. 이는 고도의 집중력과 노력이 필요한 노동이다. 게다가 화자와 청자의 경험 차이, 지식수준의 차이, 선호의 차이, 지역과 언어의 차이, 세대의 차이가 클수록 그 노력의 크기는 배가 될 것이다.
우리 각자는 소통에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진전이 되지 않는 대화의 책임을 그저 나와 맞지 않는 상대와의 성향 차이 탓이라고 책임 전가를 하기 마련이다.
'그 사람하고는 말이 안 통해'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냥 나랑 안 맞는 사람인 것 같아'
단 몇 차례의 대화만으로 빠르게 상대방을 지레 판단하고는 점차로 상대방의 말을 흘려 들은 적이 있지는 않은가? 대화 중 갑자기 침묵한 채 내 대답을 기다리는 상대방의 시선을 자각하고 나서야, 스치듯 기억나는 단어들로 내용을 유추하고 짧은 대답과 질문으로 대화를 이어나간 적은 없는가? 결국에는 마음가짐이다. 나와 소통이 되지 않는 상대에게 있는 문제를 찾기에 앞서서, 자신 스스로가 상대와의 대화에 정신적 에너지를 집중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를 반문해야 한다.
물론 소통은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모든 관계에 있어서 소통을 추구할 필요도 아무런 이유도 없다. 소개팅 자리에 나온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맞이한 자리에서 당신은 온 정신을 상대에게 집중할 것이다. 이성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그와의 접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가끔은 거짓말도 보탤 것이다. 반면 회식자리 맞은편에 앉아 온갖 훈시를 하는 꼴불견 상사의 앞에서는 반복적으로 추임새를 넣고 어떠한 판단도 없이 상사의 말을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긍정할 것이다. 각자는 자기 자신만의 주관이 있고 따라서 자신이 원치 않는 관계에서 필요 이상의 노력을 들여서 소통할 필요가 일절 없다. 소통은 절대적으로 개인 선택의 문제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소통은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소통의 부재를 상대에게 돌리는 변명을 하지 않아야 한다. 세상살이에 지쳐서, 흘러가는 시간에 밀려, 필요 이상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내가 진정 소통해야 할 나 자신의 사람들에게 들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성격과 취미와 생활과 가치관이 딱 맞아 떨어지는 인연, 찰나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성과도 같은 그런 인연을 하염없이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매사에 상대에게 온 정신을 집중할 준비와 부단한 연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인연과 진정한 소통을 추구할 것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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