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그 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았으면 좋겠다

<중독>에 관한 이야기 ㅣ 김연정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5-11 오후 1.52.32.png 디자이너


즐거운 감정은 빨래가 마르듯 금방 날아가 버리고, 우울한 감성, 생각들은 언제나 침전하여 남아있음을 느낍니다. 우울함, 불안함, 슬픔, 좌절감에 예민하고 행복에 예민하지 못한 제 자신이 조금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지지만, 아직까지는 수면 위 햇살보다는 우울한 바다 쪽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어두운 것들이 가라앉아 있는 심해心海 속을 당분간 탐구하면서 글을 써 볼 예정입니다. 언젠가는, 나를 힘없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예민함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게로 자리를 옮겨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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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낯선 남자가 나와 파스타를 먹다가 뜬금없이 DSLR을 꺼낸다. 카메라로 음식 사진이라도 찍으려나 했는데 왠지 좀 이상하다. 파스타를 오물거리다 고개를 들어봤더니 대포만 한 카메라의 렌즈가 나를 향해있다.



“뭐에요?”

찰칵찰칵.

“지금 저 찍으시는 거예요?”

“예뻐서 찍는 거에요. 이거 봐요, 예쁘죠?”



씹고 있던 면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간신히 붙들었다. 이렇게 대놓고 외모에 대한 칭찬을 받아보는 것도 처음인지라 영광스러울 법도 한데 민망하고 당혹스러운 마음이 더 크다. '허허허'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굳어버린 내 모습을 보고도 태연히 카메라를 들이대는 소개팅남 때문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씹고 있던 면이 입 안에서 제멋대로 나뒹굴고 민망함이 딸꾹질한다.

처음 해본 소개팅에서 예상치 못했던 다음의 상황 때문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1. 나보고 예쁘다고 한다.

2. 진짜라고 한다.

3. 그래서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위를 보다시피 당황스러운 상황도 상황이지만 그보다 골 때리는 것은, 그 남자의 립 서비스를 다큐로 받아들이는 나의 찌질함인데, ‘아, 내가 누군가한테는 어쩜 예쁘게 보이기도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겉으로는 당혹스럽다는 태도를 보이고 속으로는 묘한 흡족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



그 당시의 나는 답이 없었다.

터져버린 민망함은 뒤로하고 식사내내 입발린 소리를 하는 것일 수도 있는 맞은편의 그 남자의 뻔뻔함에 점점 홀려가고 있었다. 파스타를 먹다가 눈이 마주치면 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것을 보면서 ‘이 남자가 정말로 어쩌면.’ 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실 소개팅에 나온 그 남자의 첫인상은 내게도 호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능글거림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여중, 여고를 다니다가 대학마저 여대에 진학하면서 그간 논스톱 등을 보며 꿈꿔왔던 낭만적인 캠퍼스라이프에 대한 기대도 접어야 했는데, 긴장감을 잔뜩 안고 처음 나가본 소개팅에서 호감인 것 같은 남자가 촉촉한 눈을 한 채 예뻐요 연발을 하다니. 그 말을 그토록 믿고 싶을 정도로 자신감이 없어서였을까. 이젠 나도 남자친구를 사겨봤으면 좋겠다는 열망 때문일까. 순진해서였을까. 사랑에 상처받아본 경험이 없기에 경계할 줄 몰랐던 것일까. 누군가 눈빛은 진리라고 했었고 그 자리에서 내가 봤던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솔직해 보였기에 그만 안심하고 마음을 무장해제 해버렸던 것 같다.

그는 그 때 이후의 만남에서도 여전히 능글거렸고 뻔뻔했다. 그가 나를 만나오는 동안 내뱉은 달콤한 말들, 그리고 또 씁쓸한 말들은 내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돌진해왔다. 뜨거우면 ‘앗 뜨거!’ 라고 내뱉을 줄 몰랐던 나는 그 말들에 장단을 맞추지 못하고 대신 속으로, 마음으로 그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얼마 전,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봤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같은 상황에서 정재영(함춘수 역)이 행동을 달리했다면 어떻게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구성을 띄고 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2부에서 정재영이 김민희와 술을 마시는 장면인데, 정재영이 김민희에게 ‘너무 예쁘세요’를 남발하며(솔직하다 못해 찌질해보이기 까지 하는 눈빛을 장착하고)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유부남이고 애가 둘이나 있어서 당신과 결혼을 할 수 없다며 눈물까지 짜낸다. 이에 김민희는 소주를 들이키며 참 솔직해서 좋겠다고 말하고 (결혼해서) 아쉽다고 한다. 그러자 정재영은 김민희가 자신이 유부남이란 사실에 아쉬워하는 것이 너무 기쁘다며 갑자기 실실 쪼개기 시작한다.

진상이 따로 없다. 울다 웃는 표정이 가관이다.



길에서 주운 반지로 지금 당장 결혼을 하자고 하고, 이런 마음을 알게 해줘서 너무 감사하며, 평생 이 마음을 잊지 않겠다고 꽤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취기가 오른 김민희의 눈에 정재영이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은 웃겨서 죽을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제정신인가 싶다. 취중진담이라기보다 취중오바가 아닌지 염려스럽다. 저렇게 행동해서 잘 풀릴까 싶은데 의외의 상황이 전개된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김민희는 정재영에게 마음을 여는 것처럼 보인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김민희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는 모습들로 알 수 있다. 포옹을 한다거나 가벼운 키스를 하는 것 정도의.



도대체 어떤 작업방식이 그녀에게 통한 것일까. 진솔함?

아니. 나는 정재영이 내뱉은 그 당혹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표현들이 관계에 있어서 진지함의 옷을 입은 것처럼 비춰지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감탄사스런 마음, 말들과 표현들이 이성관계에 있어서 꽤 매력적일 수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너무나 솔직한 나머지 더우면 덥다고, 모르는 이들 앞에서(아무리 취기가 올랐다지만) 스트립쇼를 할 정도의 남자. 그가 김민희를 보고 예쁘다고 감탄한 것은 마치 여행을 가서 난생 처음 본 이색적이고 황홀한 풍경을 보고 ‘우와~~!!’ 하며 감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못 볼 이 풍경을 생각하면 얼마나 눈물이 앞을 가리는가. 그 아름다움을 면전에 두고 감탄하지 않고 속으로 삭히는 것은 마치 기가 막힌 술 한 잔을 마시고 ‘크-’하고 내뱉지 않는 것과 같으며, 귀여운 강아지를 앞에 두고 쓰다듬지 못하는 것과 같다. 힘겹게 산의 정상에 올라 소리를 외치지 않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영원을 보장하지 않는 깃털같은 말들이 외로움의 물을 잔뜩 머금은 그녀에게 날라와서는 습기를 단단히 먹어버렸다. 그녀를 무겁게 내리누른다. 누군가의 감탄과 함께 쏟아진 물줄기가 어떤 이에게는 생명수처럼 작용해 버렸다. 솔직함의 갑옷 뒤로 그가 이미 기혼자라는, 그녀가 감당해야 할 사실들이 숨어버렸다. 그 갑옷은 빛나고 매우 특별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입은 남자. 그 사람으로 인해 마치 ‘나'에게도 특별함이 전이되는 것 만 같다.



특별하다는 것.

누군가 나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뜻을 품은 듯 보이는 말들. 꽃씨라도 불 듯 날라 온 그 말에 마음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중독일까.



“당신은 내게 특별해요.”라는 말을 오랫동안 갈고 닦아와 마침내 내뱉는 사람의 말과 이 순간 당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감탄사처럼 내뱉는 말이 투명한 지렛대에 동시에 올려진다.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는 시간을 두고 확인해 봐야 알 길이다. 누군가의 지렛대 위는 점점 가라앉고 어떤 이의 것은 민들레 홀씨가 날라 가 버리듯 점점 가벼워진다. 무거운 쪽도 진심이고 가벼운 쪽도 진심이다.



“보고 싶다”

“너랑 있으면 좋아”

“나랑 만날래요?” 와 비슷한 말들.

어느 날 갑자기 훅 들어오는 상대 앞에서 두근거리면서도 제자리에서 머뭇거린다. 끌리는 사람 앞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일관한다. 어쩌면 진심을 담아 던진 말들도 왜곡되거나 효력을 잃고 무의미해진다. 내가 던진 말들도, 상대가 던진 말들도.

예전에도 틀렸으니 지금도 틀릴 거라는 생각. 결국, 상처받는 것으로 끝날 수 있을 관계라는 계산. 그런데도 이번에는 정말로 예전과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 나에게 하는 말들이 영화 Her의 사랑스러운 사만다의 목소리처럼 수많은 이들에게 소모되어 버린 것은 아닐 거라는 믿음.

나는 그런 특별함에 중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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