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쇼윈도 모녀생활

<소통>에 관한 이야기 ㅣ 한수영

by 한공기
Na1464489906924.jpg 작가지망생
나를 지탱해줄 힘은 오로지 글쓰기가 될 거란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는데...급 슬퍼지는 건 왜일까요?


작가 프로필 ㅣ 한수영


키워드: 아빠,할아버지,책,글쓰기,여행






소통이라는 주제를 처음 들었을 때 엄마가 떠올랐다. 우리 모녀는 오랫동안 소통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나는 나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각자의 세계관에 빠져 점점 멀어졌다. 그 시점이 중2병에 걸린 그때쯤, 아니 그 이전 일수도 있겠다. 그 이전이라면, 피아노 학원을 등록하던 그날. 아~ ,그날부터였던 거 같다. 다섯 살 무렵, 목동아줌마 딸이 선화예중에 입학하면서 엄마는 고사리 같은 내 손을 잡아끌며 피아노며, 발레며, 수영, 미술, 하다못해 국악학원까지 등록시키며 뭐 하나라도 걸려서 예술가로 키워보겠다는 망상을 하던 그 시점. 그것이 발단이 된 거 같다.

나는 피아노 보기가 편치 않다. 아직도 30센지 자로 손등을 때리며 ‘손가락 예쁘게 오므리랬지?’하며 날카롭게 고막을 찌르던 학원선생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거 같다. 어디 그뿐인가, 5살 몸으로 유연성이 없어 다리 찢기가 안 돼 개망신을 당했던 발레학원은 그야말로 지우고픈 흑역사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나는 찍소리 못하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모든 학원을 다녀줬다. 물론 중간에 내 의견을 피력도 해봤다. 돌아오는 레퍼토리는 이랬다. “엄마는 다니고 싶었어도 못 다녔어. 고마운 줄 알아.” 한마디로 벽.창.호. 말하는 내 입만 아팠다. 나는 본전도 못 찾을 걸 차라리 대꾸하지 말자고 그때쯤 마음을 고쳐먹었던 거 같다.

사람이 순수성을 잃고 환경에 맞춰 교묘하게 바뀌는 건 언제부터일까? 지금도 의문이다. 나를 위해서 그랬는지 아님, 정말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언제부턴가 겉으로 보기엔 복종하는 모범생 딸이었지만, 나는 영악하게 엄마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이 말인 즉, 엄마는 나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전제하에, 엄마가 뛰면 나는 새의 날개라도 꺾어 달아 더 멀리 가겠다는 무서운 의지를 다진 거였다. 실제로 엄마는 결혼 허락 빼고는 나한테 다 졌다. 다만, 엄마만 모르고 있을 뿐…….

한 가지 예로, 엄마는 나를 예술가로 키우고 싶어 했다. 나는 죽어도 싫었다. 재능도 없었고, 흥미는 더더욱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학원을 다니는 내내 지각, 결석, 조퇴를 하지 않았고 누구보다 근면 성실하게 임했다. 문제는 성실만 했다는 것이다. 단편적으로 보면, 영락없이 노력하고도 안 되는 안타까운 둔재처럼 보였다. 내가 짠 각본대로 흘러간 거다. 시간은 흘러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학업이냐 예체능이냐 드디어 결정을 내려야할 때가 온 거다. 엄마는 확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계속 예체능을 시킬지 말지. 다행히 내가 다녔던 학원선생들 중 누구도 몇 년을 배워도 늘지 않는 둔재인 나에게 ‘예술방면으로 소질이 있으니 그쪽으로 밀어주세요!’라고 말할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엄마가 꿈꾼 나의 미래와 나는 점진적으로 멀어질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엄마는 나를 대신해 내 미래를 꿈꿨다. 내가 중학교 땐 외고를 꿈꿨고, 고등학교 땐 해외유명대학과 스카이를 꿈꿨고, 대학 땐 5급 공무원과 기자를 꿈꿨다. 나는 저 많은 엄마의 꿈들 중 단 한 번도 ‘싫어요.’를 외친 적이 없다. 중학교 땐 꾸역꾸역 외국어랑 특목고 학원을 묵묵히 다녔고, 고등학교 땐 스카이 가기엔 부족한 수학 때문에 구리에서 강남까지 주 3일을 왕복했으며, 대학 3학년 땐 노량진에서 고시원 생활을 하며 공무원학원을 다녔다. 그 시간들이 지옥같았냐? 아니다. 그 어떤 일보다 편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내 몸은 편했다. 다만, 몸은 시키는 대로 하되, 뇌가 따로 노니 딴 짓만 하게 되었을 뿐. 결국 엄마는 이런 나한테 깜박 속아 헛돈을 쓴 것이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앙금이 쌓여 엄마와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그 벽은 시간이 갈수록 더 단단해지고 견고해졌다. 이젠 도저히 장비를 부르지 않고는 깨부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 거다. 나는 답답했다. 왜 내 엄마인데 나를 모를까? 엄마도 내 자식인데 왜 내 맘을 이리도 몰라주나 싶었을 테다. 거의 쇼윈도 모녀생활을 할 때쯤, 나는 영국으로 유학생활을 자처하며 엄마 품을 떠났다. 그 선택은 최고의 소통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는 엄마와 소통하는 방법 중 거리를 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매일 서로 부딪히며 답 없는 대화만 할 것이 아니라, 서로 떨어져 객관적으로 서로를 바라보자는 의미에서였다. 근데, 그리움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내 이론을 흔들고 말았다. 결국, 그 변수로 인해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귀국 직후 반가움이라는 감정 덕에 잠시잠깐 엄마와 소통을 했었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도로 아미타불이 됐다. 이젠 거의 자포자기 수준이다. 내가 한 발짝 물어나 딸로서 엄마를 이해하면 해결될 문제이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소통은 일방적으로 하는 게 아니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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