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소통의 방식

<소통>에 관한 이야기

by 한공기

하기스 기저귀 광고 하나를 프로이트 이론을 기반으로 분석한 적이 있다. 고민 끝에 나는 그 광고를 '유아의 부친살해 욕망에 소구하는 광고'라고 결론내렸다. 광고의 주연으로 등장하는 아이는 약 3세 정도의 나이대로 프로이트의 성격발달단계 중 남근기에 해당한다. 이 단계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인해 어머니를 이성적으로 사랑하며 아버지에 대한 살해욕망을 갖는 시기다. 광고 초반, 이 아이가 셔츠를 빼입고 멋진 기저귀를 차고 거리에 등장한다. (어머니뻘인)젊은 여성들은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마치 첫눈에 반했다는 표정인데, 멋진 기저귀 하나로 어머니에 대한 쟁취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버지뻘인)젊은 남성들은 그의 등장에 머리를 조아리거나 들고있던 풍선을 놓친다. 꽤나 의미심장하다. 풍선을 놓치는 장면은 거세를 상징하며(그렇다 풍선이 그걸 의미한다) 프로이트 이론에서 거세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에 그는 아버지의 차에 오르는데 옆에는 어머니가 타고있어 어머니를 쟁취했음을 보여준다.


‘영상 제작 및 실습’이란 이름의 강의였던 것 같다. 하기스 기저귀 광고에 대한 프로이트적 분석은 그 강의의 중간고사 대체 발표과제였다. 그래서 교수님 앞에서 발표했다. 교수님에 대한 나의 반항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건 영상제작 수업에 프로이트 강의를 포함시킨 데 대한 반항이었다. 영화를 공부하신 교수님이었기에 그런 비평이 익숙했을 교수님과 달리 나는 그런 식의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프로이트적 분석을 접할 때면 연구방법론 을 떠올리곤 했다. 가설을 제시하고 실험이나 조사를 통해 이를 검증한다. 이 과정이 내가 아는 학문의 방법론이었고 목표 달성을 위한 최선의 수단이었다. 기사를 쓰거나 광고를 기획할 때면 내가 내놓은 결과물이 목적 달성에 얼마나 효율적인지 검증해 보여야 했다. 이와 달리 정신분석학에 기반해 분석되어 나오는 얘기들은 기껏해야 가설수준이었고 검증은 없었다. 검증이 없으니, 그런 해석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의구심이 생기고 곧 반발심이 되었다. 나서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과 권위적인 한국식 교육분위기 탓인지 직접적으로 반기를 들 용기를 내진 못했다. 그러던 중 영상을 하나 정해 분석, 발표하라는 과제가 주어졌고. 나는 내가 품고있는 의구심을 교수님도 갖게 해줄 기회로 여겼다. 참 열심히도 조사하고 분석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교수님은 흡족해하셨고 나는 그 과목에서 A+를 받았다.


후에 미디어 비평관련 수업을 들으면서 분석이나 주장에 대해 검증의 잣대를들이대는 태도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되었다. 특히 픽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콘텐츠를 향유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특정 해석이 엄정한 사실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생각만큼 중하지 않았다. 그 자체가 유희고 즐거움이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기저귀 광고를 내멋대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즐거움은 이런 생각을 강하게 뒷받침했다. 후에 낭독회 활동에서는 이를 더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같은 책을 읽고 나름의 해석을 내놓는다. 서로 의견이 다름에도 논쟁을 하기보다는 생각의 다름을 수용하는 소통방식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취업을 하고 직장생활에서 이뤄지는 소통과는 대조적이었다. 문서를 작성할 때는 모든 요소들이 명확하고 효율적으로 배치되어야 했고 설득력있어야 했다. 고객사와의 메일이나 전화통화는 문장 하나, 말 한마디를 최대한 논리적으로 구성해야 했으며 생각없이 던진 말은 나중에 문제가 되어 돌아왔다. 뚜렷한 목적에 대한 효율성 추구와 이를 위한 논리적 검증은 소통 자체에 피로를 느끼게 했다. 업무상 전달되는 카톡, 전화, 메일이 올 때마다 어떻게 답하고 반응해야할 지 고민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런 소통을 피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은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명대사 중 하나다. 이 대사를 내 방식대로 변용해보면 “목적을 갖고 효율성을 검증하해야하는 소통은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목적없이 표현하고 수용하는 소통은 삶의 목적인거야.” 정도가 되겠다. 영화 속 대사는 후자에 무게를 둔 말이지만 현실에서 전자의 무게는 훨씬 더 묵직했다. 이런 무게 앞에서 두 소통방식을 다른 공간에서 각각 취하려는 전략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삶의 수단이 요구하는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삶의 목적을 취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혹은 아주 적게 주었다). 결국 각각을 따로 취하려는 전략을 포기하고 두 요소가 융합된 형태의 소통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양한 생각에 대해 존중하고 수용하면서도 그 생각들에 대한 명료한 검증이 이루어지는 소통, 삶의 수단이자 곧 삶의 목적이 되는 소통. 이 모순적인 두 요소에서 변증법적 합을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그것이 가능한지에 관한 의구심마저 드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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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통의 방식 (비공개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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