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군밤

시시콜콜 이야기 ㅣ 이정민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2-03 오후 2.30.52.png 대구아가씨
전 건망증이 심해서 병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전 10시반에서 11시까지 무엇을 했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물은 몇 잔을 마셨는지...흘러간 시간 속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감정들까지도 세세하게 기록하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이정민
직장인. 성격이 무척이나 쾌활한데 힘든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과장일지도 모름.




군밤


집에 가는 길에 시장이 있다. 시장에 나오는 물품들로 계절을 알 수 있다. 서울만큼 큰 도시는 아니지만 논밭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시골은 아니라서 계절을 피부로만 느끼지만 계절이 시장에 숨어있다.

파란 가을 하늘아래
단풍 잎을 밟으며
바구니 끼고서 밤을 줍네
가을도 밤처럼 익어가네

파란 가을 맑은바람
따스한 햇빛 받으며
장대를 들고서 감을 따네
가을도 감처럼 익어가네

사람들한테 가을은 한여름 뜨거운 햇볕 아래 허덕허덕 거리다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한 숨 돌리는 때부터이지만 나한테 가을은 시장 바닥에 반질반질한 밤이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내 친구 미영이한테 봄은 시장에 멍게가 나올 때부터이다.) 반 되에 3천원, 한 되에 5천원인데 식재료를 조금씩 사는 것이 버릇이 되어 반 되씩 사곤 했다. 작년도 올해도 밤 수확이 끝나 저장에 들어가서 밤 값이 오르면 가을은 끝난다.

작년에는 밤을 쪄먹었다. 삶아 먹으면 왠지 밤의 영양분이 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아 시간이 조금 더 걸리지만 수증기로 쪄 먹었다. 갓 찐 밤을 손가락 열개로 앗뜨 앗뜨하면서 칼로 궁둥이부분으로 벗겨내면 포유동물의 가죽같은 율피가 나온다. 율피와 밤 속살 사이에 틈에 오른쪽 엄지손가락 손톱을 잘 집어넣으면 율피가 홀라당 까진다.

사실 밤은 다른 껍질 까는 과일들에 비해서 정말 손이 많이 간다. 요즘 애들은 사과 껍질 깍아먹기도 귀찮아서 안 먹는다는데, 밤은 매끈매끈하고 딱딱한 껍질이 사과보다 깍기도 어렵고 다 깍아도 남는 건 손가락 두마디 정도이다. 입에 넣고 뜨거운 김을 후후 불면서 먹으면서 다음 밤 껍질을 까면 어느새 다 먹었는데 손은 아직도 밤을 까고 있다. 입맛을 다시며 까다 보면 오히려 그래서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작년에 아는 선배가 직화냄비로 군고구마 해먹는 방법을 알려주어서 작년 겨울부터 올해 초까지 군고구마를 한참 먹었다. 직장에서 일 마치고 바로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했는데, 밥을 먹기엔 속이 부담스럽고 그냥 가자니 아쉬워서 아침에 고구마를 구워서 저녁에 두유와 간단한 저녁으로 먹었다. 군고구마는 삶은/ 찐 고구마보다 훨씬 맛있다. 물로 양분이 새어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찐 고구마와 다를 바가 없지만 군고구마 특유의 불맛은 물로 익혀지는 고구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올해의 가을이 시작되고, 군고구마 해먹던 생각이 나서 혹시나 군밤도 ? 라는 생각에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봤더니 직화냄비로 집에서 군밤해먹는 사람들이 역시 있었다. 주의사항 한가지는 칼집내기. 칼집없이 구우면 밤이 터진다고 했다. 펑 ! (지역신문에 '독거녀, 집에서 군밤해먹다가 밤이 터져 깜짝 놀라.. '하는 기사가 뜰 듯) 인터넷의 고수들은 목장갑과 빵칼을 준비하여 빵칼로 톱질하듯이 칼집을 내라고 했다. 집에 가는 길에 당장 칼을 샀다.

빵칼을 사려고 갔는데 톱처럼 생긴 과일칼 밖에 없었다. 사실 톱에 대한 무서운 기억이 있다. 옛날에 일하면서 톱질을 하다가 내 왼쪽 팔을 톱으로 찍은 적이 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는데 그 땐 열정페이 받으면서 열정이 넘칠 때라 왼손으로 오른쪽으로 나 있는 나무를 잡고 그 위로 톱질을 했다. 톱질이 편하려면 톱질한 면에 톱이 다니기 쉽도록 나무를 벌려줘야 하기 때문에 두 손이 교차되있는 상태였고, 열심히 톱질하면서 톱질이 끝나 그 나무가지를 다 베어서 '오예!' 하는 찰나에 내 오른손에 있던 톱이 중력과 내 힘에 의해 내 왼 팔에 꽂혔다. 사실 큰 상처는 아니었는데 톱의 칼날이 그래도 한 3미리는 되지 않을까 ? 왼팔에서 피가 옹달샘에 물이 솟아나듯이 퐁퐁 솟아났다. 내 인생에서 가장 깊은 상처였다. 충격적이었다. 톱니 3개의 흉터가 아직 왼팔에 있다.

쪄 먹으면 칼집 낼 일이 없는데 구워 먹으려고 칼집을 내려니 굉장히 귀찮았다. 그리고 군고구마와 마찬가지로 중간중간 밤을 뒤집어 줘야 했다. 빨갛게 달궈진 냄비 안의 뜨거운 밤들을 위 아래로 뒤집어 주려고 집게를 들고 뒤집다보니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열에 강해진 것 같다. 껍질을 까면서 엄지손가락 손톱도 강해진 것 같다.

뒤집으면서 군밤이 먹고 싶으니까 개 중에 작은 밤을 먼저 꺼낸다. 굽기 전에 내 놨던 칼집으로 접근해서 그 사이로 보이는 밤 속살의 색을 확인한다. 노란색이면 백점. 연두빛이 살짝 도는 노란색이면 80점. 갈색, 검은색이면 냄새를 맡아본다. 무슨 냄새인지 형언하기는 어렵지만 최초인류라는 루시로부터 이어온 먹이에 대한 감각을 총동원해서 먹을수 있을까 없을까를 판단해서 냄새가 영 아니면 구웠지만 쓰레기통으로 직행. 까는 수고가 아깝다.

가끔 색깔은 괜찮은데 안에 애벌레가 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옛날에는 뭔가 불쾌한 일에 당첨되는 것 같아 무서웠는데 요즘은 '아이구 내가 애벌레도 구웠네' 그런 생각을 한다. 옛날에 산으로 채집하러 갔을 때 아는 선배가 밤바구니가 이마에 앉으면서 주둥이로 자기를 찍었다고 했다. 그 땐 그냥 웃어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밤껍데기를 뚫을 정도인데 이마를 찔렀으면 진짜 아팠겠다는 생각이 든다. 밤바구미 니나 내나 밤이 맛있구나.

내가 이렇게 밤을 즐겨 먹는 것을 남자친구는 통화로 알고 있다. 평일 저녁이나 쉬는 날 나한테 전화해서 '뭐해?' 물어보면 밤 까먹고 있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밤을 몇 키로씩 까먹지는 않는다. 나는 밤바구미가 아니다. 잡식성인 인간이다. 그만큼 밤 까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내 여가시간에 많은 부분을 밤까먹는 데에 보낸다. 군밤까먹기가 적막하면 팟캐스트도 튼다.

남자친구 태몽이 알밤이라고 했다. '내 태몽이 알밤이래, 너가 밤을 그렇게 좋아하니까 나랑 만나나봐' .. 이건 무슨 결정론적인 이야기이지 ... 하지만 남자친구가 좋으니까 내색은 안하고 '오호호' 하고 말았다. 그런데 남자친구에 대해서 내 리액션의 디폴트가 '꺄르르'라서 남자친구가 만족하지 못했는지 얼마 전에 그 얘기를 또 꺼냈다. 또 '오호호'했다. 남자친구 태몽이 용이나 호랑이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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