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음을 찾아드립니다 ㅣ 한공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작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의 본질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있습니다. 전 그것을 찾아주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한공기
글쓰기 공동체 '파운틴' 운영자
보통사람의 사소한 일상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송중기처럼 청순한 남자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름도 비슷하다.
꼼장어가 너무도 먹고 싶은 날이 있다. 일년에 세 번 정도 된다. 그런 날은 꼼장어에 소주 한잔 탁! 들이켜 내 안의 더러운 축적물들이 다 빠져나가게 만들고 싶다. 왜 하필 꼼장어일까? 한 때 아르바이트를 위해 건설현장 노가다를 뛴 적이 있다. 그런 날에는 보통 속에 낀 먼지를 빼주기 위해 삼겹살을 먹지 않는가? 돼지 비릿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함께 노동을 한 아저씨들에게 죄송하다며 삼겹살을 못 먹는다고 고백했다. 아저씨들은 괜찮다며 나를 꼼장어집에 데려가 주었다. 숯불에 그을려진 매콤한 꼼장어...너무 매워 자꾸 소주를 들이키다보니 정말 내 안에 쌓여있는 먼지들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날 이후 난 삶의 새로운 시기를 맞이할 때마다 꼼장어를 먹었다.
요즈음 내가 이상하다. 이전에 느껴졌던 삶의 가속도가 점점 줄어들어 거의 제로상태에 가까워졌다. 바쁘니까 제껴두었던 일들 (청소, 빨래, 책읽기, 글쓰기 등등)을 요즈음에는 즐기고 있다. 청소를 할 때 아무 생각하지 않고 묵묵히 하는 것처럼 모든 일상이 묵묵해졌다. 그래서 '침묵'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말하지 않으면 느낄 수 있는 것이 점점 많아진다. 언어는 역시 한계가 있는지...언어를 넘어서는 미묘한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 기분이 든다. (물론 애쓰면 그 세계 조차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하다. 그저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기분을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 언어를 이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돈, 결혼, 성공...그런 단어들이 점점 아득해지고 창밖의 새소리나 빗소리를 음악을 듣듯이 감상하게 되었다. 어쩌면 공사가 중단되었다. 나의 꿈의 타워를 증축하느라 끊임없이 진행되었던 40년 넘게 걸린 공사가 한순간에 멈춰버렸다.
내 마음에 비가 오고있다. 그 비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일꾼들이 공사현장을 떠났다. 감독관인 나도 그저 하늘을 응시하다가 안전모를 벗고 들고있던 망치를 바닥에 내던졌다.
망.했.다
요즈음에 그 단어가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들린다.
내 주변에 애초에 공사를 안 하는 유일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비비...비비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십니까?"
"저요? 그냥 신촌 부근을 산책하고 있어요..."
"저녁을 드셨습니까?"
"아뇨...오늘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왜요?"
"먹을 것이 없으니까요..."
"저랑 꼼장어 드실래요?"
비비는 30분내로 내가 살고있는 홍대부근으로 달려왔다. 워낙 느린 사람이라 평소에 좀처럼 달리지 않던 그의 속도에 다소 놀랐다. 우린 연남동 공원 인근의 허름한 꼼장어집에서 만났다. 아줌마가 꼼장어를 고추장 양념에 버무리는 동안 둘은 숯불에 손을 쬐었다. 그와 이런 저런 애기를 하면서 난 습관적으로 옆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난 카페나 음식점에서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그들이 무엇을 먹는지, 무슨 대화를 하는지...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몰래 훔쳐 보고 훔쳐 들었다. 신기하게도 내 옆 테이블 남녀는 아무 말 없이 꼼장어를 먹고 있었다. 남자는 50대 정도고 여자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남자는 배가 나온 사장님 분위기, 여자는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잘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콧대는 자연스럽지 않게 너무 높았다. 우리의 꼼장어가 다 익고 우리가 그것을 다 먹어치우는 동안 정말 옆자리 커플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난 두 사람의 관계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어떤 서비스와 그에 상응하는 돈만 필요할 뿐 그 어떤 소통도 불필요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 뿐이다.) 내가 이런 분위기에 민감한 이유는 한 때 명동에 오래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편집실은 명동에 있었고 난 명동에 있는 고기집을 자주 들락날락 거렸다. 그곳에서 말없는 커플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남자는 대부분 일본인 중국인 아저씨이고 여자는 젊은 한국 여자였다. 둘은 아무 말 없이 고기만 먹었다. 보통 남자는 긴장을 했는지 많이 먹지 않는다. 여자의 시선은 불판에 고정되어 있다. 맞은편에 있는 남자를 단 한번도 보지 않고 열심히 먹는다. 그럼 남자의 시선은 음식점 구석에 있는 TV화면으로 자연스럽게 이동된다. 지인과 고기를 다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고깃집 옆에 편의점에 갔다가 옆자리의 이상한 커플을 다시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여자는 콘돔과 존슨앤 존슨 베이비 오일을 샀고 남자가 계산을 했다. 두 사람은 편의점 건너편에 있는 호텔로 들어갔다. 그 둘의 뒷모습에서 난 두가지 욕망을 보았다. 남자쪽은 섹스이고 여자쪽은 돈이다. 섹스와 돈이 거래 되면서 두 사람은 결국 윈윈한 것일까?
"그것에 대해 누구도 탓할 수 없죠! 각자의 인생이니까."
"맞아요. 비비님...누구도 그들에게 뭐라 할 수 없어요. 각자의 선택이니까...하지만 전 걱정이 되요."
"뭐가요?"
"혹시나 그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조금 더 미워하지 않게 될까? 죄책감에 들지 않을까?"
"요즘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어쩌면 비비의 말이 옳지 모른다. 요즈음 그런 것으로 고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돈이 되면 무엇이든 팔고, 돈으로 살 수 있으면 무엇이든 사는 세상이니까...그렇게 자유롭게 거래를 하는 동안 어쩌면 우린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와 비비는 꼼장어를 먹으며 매트릭스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비비는 영화 매트릭스를 무려 9번이나 보았다고 한다. 난 그 영화가 개봉한 날 무심코 극장에 들어가 보고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내 옆 자리 남자도 나를 따라 기립박수를 쳤는데 극장 안 불이 켜졌을 때 그가 가수 김창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트릭스 얘기를 하면 항상 나오는 질문이 있다.
" 당신이라면 빨간약을 먹을 것인가? 파란 약을 먹을 것인가? "
내 주변의 사람들 대부분은 파란약을 택하곤 했다. 나는 말로는 빨간약을 택하겠다고 했지만, 난 이미 파란약을 먹은 사람의 삶을 살고 있었다. 1999년에 본 그 영화의 본질을 깨닫게 된 것은 정말 얼마 안되서이다.
난 한참을 인간의 감각과 육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 그 오감은 나와 세상이 만나는 접점이다. 그것을 통한 경험으로 나는 생각하고 판단하는데 그 오감이 완벽한 진실이 될 수 없으니 내 생각과 판단은 끝도 없이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인류는 인간의 오감을 속이곤 했다. 진실보다는 개인의 이익이 중요시되고 특정한 개인은 자신의 돈과 힘을 이용해 가상의 세계를 만들었다. 내가 다녔던 교회, 학교, 직장도 모두 마찮가지였다. 우린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세뇌되어갔고 결국 진실을 외면한 채 내가 믿고싶은 가상을 진실이라고 여겼다. 내가 매트릭스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은 항상 그곳에서 빠져나오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두번 째 질문은 우리가 감각이 주는 쾌감에서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가이다.
인간의 욕망은 쉽게 제어되지 않는다. 좀 더 자극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내게 담배는 점점 기호식품> 친구> 숭배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하루 종일 집에서 두 갑 정도의 줄담배를 피고있을 때면 내가 담배를 피는 건지, 담배가 나를 피는 건지 헤깔리게 된다. 담배가 아니더라도 우리사회에는 감각적 쾌감을 극대화 시켜주고 그것으로 돈을 버는 사례가 너무도 많다. 문제는 내가 내 자신을 잃어버린 다는 것이다. 중립을 유지하며 똑바로 서지 못하고 자꾸 무엇에 끌려다닌다. 결국 탐욕이 나를 삼키고 난 어느새 괴물이...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이라는 답을 제시한다. 네오도 자기 자신을 깨달으면서 더원이 되었다.
소크라테스로부터, 부처로 부터, 예수로 부터 지겹게도 들었던 말...네 자신을 알라...과연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신기하게도 우리 부모님은 한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비비와 나는 꼼장어를 먹으며 야채를 먹는 사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만약에 사자가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 왜 난 들소를 보면 달려들어 그들을 뜯어 먹을까? 생각해보니 들소는 풀만 먹잖아. 왜 난 풀을 안 먹지? 안 먹는거야? 못 먹는거야? '
사자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사자가 채식을 시작한다면...
"그건 말도 안됩니다."
"왜죠?"
"사자는 육식동물로 태어났으니까?"
"그렇게 태어났지만 자신이 스스로 바꿀 수 없나요?"
"잠깐..그것도 가능할까? 사자가 채식을 하면 죽나요?"
"음..."
이미 우린 다 알고있다. 사자가 그럴리 없다는 것을. 사자는 본능대로 그저 흘러갈 뿐이다. 사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그냥 흘러가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짐승처럼...
우린 왜 질문하지 않는가?
난 거기서 부터 모든 문제기 시작되었다고 본다.
질문은 철학의 출발지점이다. 즉 질문하지 않는자는 삶에 철학이 없는 것과 같다.
생각과 사유가 없다면 그저 동물처럼 흘러가며 사는 것이다.
그렇게 흘러가는 자에게 '나'라는 자기인식이 필요할까?
내가 여기서 말하는 자기인식은 self를 말한다.
self는 ego와 다르다.
모든 존재는 자기중심적이다.
ego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이로운대로 주변 상황을 재편집한다. 그런 과정에서 타인에게 피해가 가도 크게 신경쓰지 못한다.
자신의 쾌감을 극대화시키는 삶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사자마저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짜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난
스타벅스보다 폴바셋 커피를 좋아하고
아이오아이보다 트와이스를 좋아하고
삼성폰보다 아이폰을 좋아하고
이탈리안 레스토랑보다 중국집을 좋아하고
한국 영화보다 일본 영화를 더 좋아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기호가 내 정체성을 대신할 수 있을까?
난 거의 10년간 이런 저런 청년단체에서 활동했다. 그곳에서 만났던 수많은 2,30대 청년들과 그들과 나눴던 수많은 대화들을 기억했을 때 우린 그저 서로의 기호를 파악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했을 뿐 누구도 심각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질문은 모두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모두가 질문을 회피했다. 결국 아무도 질문할 수 없었다.
외면당했던 수많은 질문 중에
내가 주구장창 반복했던 질문이 있다.
<왜 우리는 지독하게 수동적으로 살아갈까?>
즉 나는 폴바셋 커피, 트와이스, 아이폰, 중국집, 일본영화가 없으면 무엇인가?
감각적 쾌감에 대한 욕망은 늘 대상성이 필요하다.
즉 감각에 의존해서만은 나는 내 스스로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감각이란 바깥쪽으로 뻗어있는 더듬이를 말한다.
그런데 내 안쪽으로 뻗어있는 더듬이는 없을까?
분명히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않고, 냄새 맡지 않고, 맛보지 않고 , 만져지지 않는 나는 무엇인가?
그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무척 어렵다. 하지만 방법이 있다.
그래서 직관적인 이미지보다는... 적극적으로 읽고 생각할 수 있는 텍스트를 접하고
멍때리기 보다는 ... 뭐라도 끄적여 글을 쓰는 것을 권한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침묵하고 있기 보다는 ... 대화하며 생각을 공유하고 집단지성을 키우는 것을 권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데 무척 중요한 방법이 된다.
또 규칙적인 운동으로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인식하고 사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 비비님 그런 과정에서 우린 똑바로 설 수 있지 않을까요?"
" 똑바로 서면 뭐가 좋죠?"
" 하늘과 땅을 연결하니 자기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되겠죠?"
"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원래 그런 뜻이라고 들었어요. 자신의 실존을 깨닫는 거라고..."
" 그래요? 그럼 우리 똑바로 섭시다. 무엇에도 끌려다니지 말고 중립의 발란스를 유지합시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제는 '각성을 통한 노예해방'이 아닐까 하다. 빨간약 선택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감각과 욕망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이다. 빨간약을 먹으면 나는 진실을 마주하고 각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각성을 하면 어떻게 될까?
알을 깨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미래라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고치속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런 과정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질문이다.
나는 누구지?
그 질문이 내 자신과의 소통과 나를 알아가는 것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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