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귤, 걔

<귤>에 관한 짧은 이야기 ㅣ 이정민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2-03 오후 2.30.52.png 대구아가씨
전 건망증이 심해서 병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전 10시반에서 11시까지 무엇을 했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물은 몇 잔을 마셨는지...흘러간 시간 속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감정들까지도 세세하게 기록하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이정민
직장인. 성격이 무척이나 쾌활한데 힘든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과장일지도 모름.




연구실 후배가 귤을 좋아했다. 그래서 귤 이라고 하면 그 애 생각이 난다. 어릴 때부터 귤을 워낙 좋아해서 귤을 먹다가 얼굴이 노래졌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가 '넌 하루에 귤 몇개'로 정해줄 정도였다고 했다.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얘는 경기도 수원에서 내려왔다. 서울 방향에서 내려와서 서울말 같은 것을 쓰는 애였다. 대놓고 서울말이라고 하면 좀 부끄러우니까 사투리를 안쓰네 정도로 이야기를 했었다.


얼굴이 하얗고 화장을 안하고 똑부러졌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글씨는 하이테크 펜으로 깨알같이 썼다. 글씨가 워낙 작아서 다른 펜으로 쓰면 글씨가 점같이 보일테니 하이테크로 쓰는 게 맞을 것 같다.


머리가 길었다. 머리를 길게 길러서 묶고 다녔다. 그러다 하루는 싹둑 잘라서 백혈병 어린이들 가발 만드는 데다가 보내줬다고 했다. 멋있어서 나도 해보고 싶었는데 미용실가서 머리를 한번도 안한 머리여야 가능하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뚝뚝해보였는데 잘 웃고, 웃음소리가 특이했다. '키윳키윳키윳' 하고 웃었다. 고등학생 때 자기가 웃으면 다른 반 친구가 알 정도였다고 했다. 대학생 때도 변함 없었다. 대학생 때도 고등학생 같기도 했다.


10살 넘게 차이나는 언니오빠가 있다고 했다. 고향집에 강아지랑 고양이들이 많다고 했다. 지나가던 유기견을 거둬 키우다 보니 여러마리가 되었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강아지랑 고양이를 키우다보니 육식을 안하게 되었다고 했다. 좀 억울한 것 같다고, 언니오빠랑은 고기반찬 많이 먹다가 자기 태어나고서는 어머니께서 집에서 고기 요리를 안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고기를 안 먹었다. 점심메뉴로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고기가 주가 되는 식당을 얘기하다가 자길 보고는 슬며시 꼬리를 내리면, '그 정도는 먹을 수 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먹는다는 개념은 뭔가 그 식당이랑 어색했다.


똑똑했다. 자기가 현재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십원짜리까지 알고 있다고 했다. 같이 다니다가 현금이 없을 때면 빌리곤 했었다. 언제나 현금이 있었다. '진아캐피탈'이었다. 줄곧 같이 다니니까 내가 잘 기억이 안나는 부분을 물어봤다. 그럼 곧잘 대답해줬는데, 외장메모리같았다. 언젠가부터 당연하게 물어보면 당연하게 대답해줬었다.


졸업하고 수원으로 다시 올라갔다. 수원이랑 대구는 너무 멀어서 만나기 힘들다. 가끔씩 만난다고 해도 옛날처럼 캐피탈이나 외장메모리처럼 써먹지는 못하겠지. 지나간 사람을 추억하는 일은 슬프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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