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씨없는 귤

<귤>에 관한 짧은 이야기 ㅣ 곽정빈

by 한공기



KakaoTalk_20160508_223016445.jpg 싱클레어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또 좋아하는 책이 헤르만헤쎄의 데미안입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인간 본연의 양면성을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말을 곧 잘하곤 합니다.


작가프로필 ㅣ 곽정빈

저는 3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 1년간 세계여행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두 눈을 황홀하게 채우는 수많은 풍경들보다도 여태껏 가져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대면해야 했던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채워 왔습니다. 글을 쓸 때 비로소나 나 스스로가 나 다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희미해져만 갔던 나의 자아가 글을 쓰면서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된 제 인생의 2막에서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글을 써나가고자 합니다.




식탁 위에 놓여진 귤을 바라본다. 하얀 식탁 위에 놓인 샛노란 귤을 보고 있으니 껍질을 단번에 까서 입에 넣어 버리고만 싶다. 정성스레 하나씩 껍질을 벗길때 마다 터져 나오는 상큼한 향이 방울방울 공간을 메우면서 입에는 군침이 고여갈 것이고, 마침내 한입에 들어찬 귤이 탱탱한 과육을 터뜨리면 달콤한 과즙이 입안 구석구석을 감아 돌 것이다. 그런 귤을 보고만 있으려 하니 정신이 아득하다. 귤을 대면한 이 순간 귤의 맛을 상상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는다.귤에 대해 아프고 아린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요. 아련하고 미소 짓게 하는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눈앞의 귤에 거는 기대라 하면 지금 이 귤이 조금의 시큼함도 없이 세상 끝없이 달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과일이 달콤하고 먹음직스러운 이유는 포식자에게 섭취되기 위함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포식자의 배양분과 함께 새로운 터전에 씨앗을 뿌려 종족을 보존하고 번성케 하는 유전자적 이기이자 생명의 본능 때문이라고 했었던가. 그렇다면 이 포식자에게 섭취될 생각만을 불러일으키는 이 먹음직스러운 귤은 얼마나 자기 존재의 목적에 충실하고 있는 것인가. 참으로 대견스러운 일이다.


이제야 귤에 대한 글감을 찾다 오로지 먹을 생각만을 하는 것 아니냐며 자책하던 나 자신을 용서하기로 한다. 드디어 귤을 까먹을 합당한 이유를 찾아낸 것에 흡족해하며 귤을 한 손에 움켜쥐고 노려본다. 내 기어이 너의 업을 거두어주리라.


'가만... 귤에 씨가 있었던가?'


없다. 아무리 기억을 돌이켜 헤집어 보아도 없다. 수없이 내 식도를 지나쳤던 귤들의 속살에는 마땅히 있어야할 씨가 없었다. GMO 귤이었구나. 이 모두 누구의 소행이란 말인가. 장춘이 형인가? 그렇다면 이 귤은 도대체 왜 그 따가운 햇볕과 거친 바람과 병충해를 버텨왔단 말인가? 그 끝없는 부단한 노력은 대체 무엇을 위함이었단 말인가. 존재 이유를 망각한 채 맹목적으로 살을 부풀려 왔을 귤을 허망하게 내려다보며 애도한다. 인간의 이기를 위해 거세 되어버린 불쌍한 열매여. 왜 자신이 달아지고 있는지 끝끝내 모른채 살해될 가련한 과실이여.

귤을 도로 내려놓는다. 씨 없는 귤을 귤 박스에 차곡차곡 쌓인 씨 없는 귤들의 본디 자리로 되돌려 놓고 나는 집을 나선다.내가 사는 곳은 한국 산업 단지 공단에서 IT 노동자들을 위해 마련한 임대아파트의 9층이다. 출근길에 엘리베이터를 잡아타면 한 층마다 꼭 멈춰 서는데, 그때마다 여지없이 꼭 한 명씩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서로를 모르는, 알 필요도 없는 1인 세대주들이 좁은 사각의 엘리베이터를 마치 씨없는 귤이 귤 박스를 채우듯 차곡차곡 채우면서 내려간다. 그리고 가득 찬 귤박스에서 하나씩 빠져 나오는 귤들이 다시 박스를 채우지는 않듯이 오늘 퇴근길에 서로를 다시 마주치지는 않을 것이다.


시절은 가을이라 회사로 가는 길목은 노란 은행나무들이 가득 들어서있다. 무심코 내려다본 바닥에는 은행잎만 무수할 뿐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터져있어야 마땅할 은행 열매들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 피해가지 않아도 될, 냄새가 나지 않는 길거리에 안도하면서 나는 수나무들만 늘어서 있는 거리를 터벅터벅 처연하게 걸어간다. 이어폰을 통해 들리는 뉴스에서는 대한민국 1인 세대가 4인 세대 비율을 넘어섰다는 통계자료를 보도했고 올해 겨울은 유례없는 한파가 들이닥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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