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안녕, 2016년

ONE DAY ONE PAGE ㅣ 최미애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1-25 오후 2.18.58.png 직장인 명상가
명상을 하면서 '관찰'이 취미가 되었어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촉감을 느끼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파악하는 관찰 작업을 수행하고, 그렇게 관찰하고 있는 자신을 순간 순간 깨달을 수 있도록 뭔가를 좀 써봐야 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작가 프로필 ㅣ 최미애

IT 9년차 직장인.

불교와 명상에 관심이 많아 경전을 읽으며 '집중'과 '관찰' 수행을 하고있다.

자신의 특기를 이용해 세상에 관한 '관찰일기'를 쓰려한다.




아침 9시 반이었다. 집을 나서고 나서야 눈이 쌓였다는 것을 알았다. 올겨울 들어 처음 본 풍경이었다. 하늘은 파랗게 맑았다. 공기가 차가웠지만 매운맛은 없었다. 쌓인 눈을 밟을 때 나는 뽀드득한 느낌을 즐기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휴가까지는 아니고 볼일이 있어 종로에 좀 다녀오겠다고 한 날이었다. 172번 버스를 탔다. 이 시간에 버스를 타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언제나 막히는 성산 2교 교차로에서 버스는 좌회전하고 연희동 방향으로 흐르는 고가로 올라섰다. 목도리에 두툼한 패딩 점퍼를 입고, 등에는 핫팩을 붙이고, 헤드폰으로 귀를 감싸고 있었다. 때문에 반짝이는 겨울 햇살이 비치는 버스 안에 앉아 있는 나는 자꾸만 졸렸다. 하지만 자고 싶지 않았다. 상암동 외에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바깥 풍경을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한 해는 바쁘게 흘러갔다. 엄마가 아팠고, 회사에서는 사람들이 잘려나갔고, 새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야근과 밤샘과 주말 근무 사이로 시간은 더 그럴 수 없을 만큼 가속되어 갔다. 그래도 아침의 버스는 느릿느릿 신촌을 지나고, 충정로를 지나 종로에 나를 내려주었다.


볼일이 있는 곳은 저축은행이었다. 1년 동안 부었던 적금 만기였기 때문이었다. 번호표를 뽑자 대기 2번이었다. 잠깐 소파에 앉아 있는 사이에 사람들이 금세 들어와 은행 안의 소파를 모두 채웠다. 대부분 나보다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곧 창구 하나가 비었다. 그 날이 만기인 줄 알았는데 하루 먼저 찾으러 와서, 구백 몇십 원 정도 이자가 빠졌다. 새로 적금에 가입할 금액은 두고 나머지는 증권사 CMA 통장으로 이체했다. 새로 적금을 가입할 때는 인터넷으로 하면 0.1% 우대 금리가 있다고 했다. 창구 직원은 세심하게 다음 번 적금 만기 때 이체하기 편하도록 1일 이체 한도 증액 신청도 같이 봐주었다. 그리고 만기 적금 통장에 ‘PAID’라고 적힌 도장을 쿵 찍고 마그네틱 선을 제거한 후 내게 돌려주었다. 창구 직원은 내가 신분증과 통장을 가방에 챙기는 동안 조용히 기다리더니, 내가 일어서자 같이 일어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나도 마주 인사를 하고 거리로 나왔다.


광교를 건너다 눈 녹은 길에 잠시 미끄러졌다. 보신각 앞에서는 타종 행사를 위한 무대 준비가 막 시작되었다. 종로 타워 지하에 다시 종로 서적이 부활했다고 해서 들러 보았다. 아직 책 냄새보다는 새집 냄새가 많이 났다. 휴대폰 정도 크기의 2017년 탁상 달력이 있나 했는데, 흡족한 것은 없었다. 회사로 가기 위해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710번 버스를 탔다. CMA 통장과, 다른 예금 통장에서 또 다른 통장으로 이체하고, 가계부를 썼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대 후문 쪽을 지나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 점심 시간 맞춰 도착할 수 있을지, 저녁 회식 때는 뭘 먹게 될지, 처리해야 하는 일이 뭐가 있었는지, 그리고 이리 저리 이체해 둔 돈을 어떻게 굴릴지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또 다시 졸렸다. 겨울 햇살이 종로에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 옆에 매달려 있던 것이다. 나른한 가운데 나는 버스 밖으로 흘러가는 겨울 풍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버스의 속력만큼 2016년이 뒤로 갔다. 회사 근처에 이르자 눈이 쌓였을 뿐 늘 보던 상암동의 풍경이 되었다. 그래도 뭐, 좋았다. 점심 먹으려고 나서던 회사 동료들과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딱 마주쳤다. 그래서 마주 보고 웃었다. 점심은 안동 국시 먹으러 가려는데 괜찮겠냐고 했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회사 건물 밖으로 나오자, 공기가 조금 더 따뜻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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