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술 대신 잠

KEYWORD ONE PAGE <술>ㅣ 이상은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4-04 오후 1.38.04.jpg 사업가
갑자기 얻는 깨달음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유지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작가 프로필 ㅣ 이상은

Keyword: 연극, 여행, 춤, 다이어리, 팟캐스트




뭐든지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파이더맨처럼 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이다. 세상이 다 내 것 같다. 아침에 술에서 깼을 때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낀다. 그걸 없애기 위해 다시 낮술을 하면서 해방감을 즐긴다. - 팟캐스트 ‘요조, 김관의 이게 뭐라고’ 28-2에서 김제동이 한창 술을 마셨을 때 추억하며


처음에 들었을 때 ‘난 그런 거 필요없어’ 단번에 무시했다. 흐트러지는 게 싫고,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곧 내가 그런 상태를 동경하고 대신 잠으로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을 생각하면, 부정적 느낌이 강하다. 게임 블랙홀이어서 벌칙으로 술을 연거푸 마시다 보니, 강요받으며 마신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원샷을 해야 할 때 목넘김이 안 좋아 자주 끊어 마셔야한다. 건강염려증도 약간 있어 술을 더 멀리한다. 쓸데없이 주량이 센 편이고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주는 술을 잘 마시면 다시 사람들이 권해 더 괴롭게 한다. 동호회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진솔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술자리는 좋아하게 되었지만, 술은 싫다.


그래도 사람들이 술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내심 부럽다. 샤워하고 맥주 한 캔 하면 좋다, 요거 소주랑 먹으면 딱인데 등의 말을 들으면 ‘그게 어떤 걸까? 그렇게 좋을까’하고 생각한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일시적이지만 맛있는 음식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 같다. 더 나아가 삶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를 놓친 기분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놓아줄 수 있는 용기가 부럽다. 나 자신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건강을 지키는 게 정말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데 내가 술을 마음속으로 조금이나마 동경한다는 것은 새삼 놀랍다.


나는 술 대신 잠을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삼는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불 속에서 밍기적거릴 때 행복하다. 매일 점심을 먹고 온열매트 위에서 30분 정도 낮잠을 잔다. 자고 일어났을 때 상쾌함이 남들이 술 마셨을 때 느끼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똑같은 역할을 한다. 술이 주는 자신감과 비교할 수 없다고 다른 사람들은 말하겠지만, 나는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가끔 저녁을 먹고 잠을 잤다가 일어나면 벌써 9시가 넘을 때가 있다. 죄책감을 느끼면서 책을 보다가 다시 11시쯤 즐겁게 잠자리에 든다. 올해 힘든 일들을 겪으며 때 현실을 잊게 해준 잠이 더 좋아졌다. 눈을 뜨고 있으면 자꾸 생각나는데, 베개에 머리를 대면 곧 그 괴로움을 잊게 된다. 꿈도 잘 안 꾸어 곤히 자다가, 눈을 뜨면 다시 고통이 시작된다. 몇 년 전까지 괴로운 일이 있으면 새벽 3시가 넘어도 잠을 못 이루었는데, 최근에는 바로 잠으로 도망간다.


여전히 나에게 술은 악의 축이다. 그래도 잠이 주는 효용을 생각하면서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사람들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낮술 마시는 인간들이 한심했다. 이제 충분히 잔 것을 알면서도 아침에 다시 잠을 청하는 내 심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오늘 낮잠을 2시간 넘게 잤다. 잠깐 현기증이 났고 오후에 할 일의 절반밖에 못 할 것 같아 좀 후회가 들었다. 그래도 술에 비하면 잠은 참 건전한 탈출구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고, 절대 알람 따위를 맞춰놓고 낮잠을 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현실로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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