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혼맥 예찬

알콜홀릭ㅣ 서유미

by 한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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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술을 만들어요. 알콜이 주는 위로와 행복에 대해서 함께 공유하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서유미

학부 때는 일본어를 전공하고 대학원은 일본지역 전공을 했지만 서울에 삽니다. 잘 닦여진 아스팔트 같은 순탄한 인생을 살았지만, 같이 걷던 사람들도 이정표도 사라진 길 위에 홀로 서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이 길이 맞는지 고민이 됩니다. 아마도 지금은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돌아봐야 하는 시간 같아요.


나는 술을 좋아한다. 술을 잘 마시느냐면 그렇지는 않다. 소주를 짝으로 마시고 폭탄주를 돌려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눈도 풀리지 않는 탱탱한 간을 보유한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만 나는 맥주 두어 병, 소주 반 병, 와인 반 병, 막걸리 한 병 정도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은 반쯤 감기며, 혀가 꼬부라져 발음이 샌다. 안타깝게도 많이 마신 다음날은 어김없이 두통에 시달리고 속이 메스껍다. 술자리 후 얌전하게 귀가해서 곱게 화장을 지우고 점잖게 침대에 누워 잠이 들지만, 웬일인지 다음날이면 도무지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가끔 취하면 주사를 부리기도 하는데, 취기가 사라지고 퍼즐처럼 기억이 떠오르면, 웃으면서 뻔뻔하게 모른 척 넘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이실직고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은 작작 좀 마시라고 핀잔을 주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술을 마신다.

술은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한 술이 있고 혼자를 위한 술이 있다. 여럿이 둘러앉아 인생의 희로애락을 논하기에는 소주가 제격이고,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맥주가 딱 알맞다. 소주도 맥주도 저마다의 매력과 즐거움이 있지만 내가 조금 더 애정을 느끼는 것은 '혼술'할 수 있는 맥주이다. '혼술'이란 '혼자 먹는 술'이라는 의미로, '혼술'한다 하면 옛날 같았으면 대번에 알코올 중독자 취급을 받았겠지만, 신조어까지 생기는 것을 보니 술과 함께 인생의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닌가 보다.

나를 더 정확히 표현하면 '혼술러'를 넘어 혼자 맥주를 마시는 '혼맥커'에 가깝다. 최근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절주하고 있지만, 평소에는 맥주 500한 잔 정도는 마셔줘야 비로소 하루가 끝나는 느낌이 든다. 퇴근 후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켜고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맥주를 따면, 탁! 캔 따는 소리와 함께 촤르르 기포가 올라온다. 일단 한 모금 마신다. 혼맥의 생명은 간편함이기 때문에 안주는 없어도 된다. 간혹 위생상의 이유로 캔맥주를 컵에 따라 마시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캔 째 마시는 것이 더 좋다. 꿀떡꿀떡 캬~ 목을 타고 몸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맥주 한 모금은 행복이다. 하루 일과에 치여 긴장되었던 근육은 자연스레 풀리고, 묵혀둔 고민도 잠시 잊힌다. 이 순간만큼은 마음속 풍랑도 고요해진다. 맥주는 힐링이다.

맥주는 그 자체로도 매력적인 술이다. 맥주는 발효주로 보리를 싹 틔워 만든 맥아를 적정온도의 물로 우려낸 뒤, 홉으로 맛과 향을 내고 효모로 발효시킨 후 탄산을 주입해 만든다. 발효온도에 따라 크게 에일과 라거로 구분되는데, 에일맥주는 효모를 상온에서 발효시켜 거칠고 강한 풍미가 특징이다. 남자로 치면 거친 상남자이다. 꽉 찬 바디감과 쌉싸름한 홉향. 에일 맥주의 강렬함은 안주를 곁들이는 것보다는 한 모금씩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셔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반면, 라거 맥주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뒤에서 돌봐주는 배려심 깊은 연인이다. 저온에서 하면발효시켜 투명함과 깨끗함이 라거의 장점이다. 홉을 쓰지 않아 강한 맛은 없지만 대신 목 넘김이 젠틀하고 첫 맛과 뒷맛이 아주 깔끔하다. 포용력 있는 라거는 어떤 안주와도 궁합이 잘 맞아, 외롭고 힘든 날 치킨과 함께 먹으면 더욱 행복하다.

혼맥 한다고 혼자는 아니다. 전국 방방곡곡 맛있는 맥주를 찬양하고 갈망하는 혼맥커들이 늘어나자 국내 맥주 소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전통적으로 국산 맥주는 주로 라거 맥주 위주이고, 에일 맥주는 거의 생산하지 않아 특색이 별로 없다. 그 마저도 시장원리에 따라 보리 함량을 낮추다 보니 물같이 밍밍해서 소주와 4:1 비율로 섞어 폭탄주로 만들어야 술다운 맛이 난다. 안타깝게도 혼맥커의 신성한 한 잔으로 국산 맥주는 부적당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요즘에는 아사히, 기린, 기네스, 호가든 등 대중적인 해외 맥주들을 편의점에서 만날 수 있다. 초보 혼맥커라면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접해보는 것이 좋다. 수 만 가지 종류의 맥주 중에서 입맛에 맞는 맥주 스타일을 찾은 다음에는 취향이 확고해지면, 맥주 전문 소매점에서 비슷한 계열의 맥주를 구입할 수 있다. 최근에는 다양한 지역의 희귀 맥주들을 수입 유통하는 전문 소매점도 늘어가고 있어 맥주 덕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홍대와 이태원 등지의 트렌드 스팟에서는 소규모 양조업체인 크래프트 비어가 하나 둘 자리 잡고, 급기야는 직접 맥주를 만들어 소비하는 홈 브루어도 나타나 새로운 맥주 트렌드를 만들어 가고 있다.

주고받는 소주 한 잔이 정(情)이라면, 홀로 마시는 맥주 한 잔은 채움이다. 오늘을 비우고 내일을 담는다. 맥주 한잔으로 오늘의 나와 이별하고 내일의 나를 만난다. 복잡한 잡념 대신 경쾌한 단순함이다. 그러므로 이 번잡스럽고 하수상한 시절에 “혼맥” 만이 진정한 자유이자 치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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