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안아주세요' ㅣ 화이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블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자 공기 중에 섞인 곰팡이 냄새가 났다. 바이올린 선율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초록색 철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실내에 사람들의 움직이는 실루엣이 보인다. 어슴푸레한 조명이 붉은 벽돌로 지어진 벽을 비추고 있다. 어두움에 눈이 익으면서 보이는 건 놀랍게도 남녀가 서로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고 그저 꿈틀거림이라고 하기에는 역동적인 움직임들을 음악에 맞춰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팔은 서로를 꼭 붙들고 놓치지 않으려는 열망으로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고, 허벅지가 상대방의 허벅지와 맞닿으면서 가끔 다리가 얽히기도 하는 것이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그들의 표정은 무엇인가에 홀린 듯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아편 소굴에 가면 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을 잃어버린 채 꿈을 꾸는 그 표정들...
"그때 거기... 다시 가볼 수 있을까?"
한참 동안 설탕을 넣은 커피를 스틱으로 젓고만 있던 희선이 말했다
"응? 거기라니, 어디?
"왜 있잖아. 전에 네가 데리고 갔었던... 지하로 들어가서 춤추던 곳."
"아... 밀롱가 말이야?"
"으응... 거기 이름이 밀롱가였나?"
"정말? 아니, 왜? 너 거기 어둡고 음흉하다고 싫다고 그랬잖아."
"아니 뭐... 생각해 보니 그렇게 음흉한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궁금해졌어."
"나야 좋지만, 도대체 무슨 바람이야? 너 혹시 재원씨..."
미영이 말을 이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차, 아직은 쉽게 이야기하기에 너무 경솔한 주제일지도 몰랐다. 미영은 얼른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어때. 마음이 바뀌어서 가 보고 싶어졌으면 가 보면 되는 거지. 대신 너 지난번처럼 5분 만에 뛰쳐나오기 없기다?"
"알았어. 넌 거기 푹 빠져 있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넌 나 신경 쓰지 말고 실컷 놀아. 난 그냥 조용히 구경만 할게."
미영은 희선의 변심이 아주 기쁜 모양이었다. 들뜬 표정으로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럼, 이번 주 금요일에 같이 가자. 퇴근하고 같이 저녁 먹고 가면 딱 맞겠다. 홍대 근처에 내가 아는 파스타집 괜찮은데 있어. 파스타 괜찮지? 냄새나는 메뉴는 아무래도 춤추러 가기 전에는 곤란하거든."
"파스타 좋아. 나 면이면 다 좋아하는 거 너 알잖아?"
희선은 애써 밝게 웃었다. 요즘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게 익숙해진 것 같다. 친구들도 전처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벌써 3개월이 다 되어 가는구나. 그 나쁜 자식과 헤어진 게... 비록 결별 선언은 희선이 했어도 아직도 마음 한켠이 어두운 것은 그만큼 상처가 깊었던 탓일 것이다. 그게 언제였더라? 그가 수상하다고 처음 느꼈던 것이? 작년 여름이었던가... 그의 오피스텔 욕실에서 수상한 머리카락을 발견했던 게 말이다. 물론 그의 오피스텔은 사무실을 겸하고 있어서 여자의 머리카락쯤은 이상할 게 없는 것이었다. 그게 단지 세면대나 화장실 바닥에서 발견되었다면 말이다. 그런데 화장실 휴지통 뚜껑 밖으로 삐죽 나와있던 그 머리카락을 본 순간 희선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래서 휴지통 뚜껑을 열고 안을 보고 말았다. 거기에는 여자의 머리카락 뭉치가 휴지에 싸여져서 버려져 있었다. 그 중 긴 머리카락 하나가 미처 휴지통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으로 걸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 재원은 희선의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모른다고 답했다. 희선은 재원을 믿었다. 그리고 그 일은 그냥 지나가는 듯했다. 5개월 전 그 휴지에 싸여진 머리카락 뭉치를 다시 발견할 때까지 말이다. 재원은 거래처 여직원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주기적으로 그의 오피스텔을 드나드는 여자 중 한 명인 듯했다. 그리고 머리카락 뭉치는 좀 더 자주 발견되었다. 재원은 그 여자가 유난히 깔끔한 성격이어서 화장실에 갈 때마다 머리를 빗어서 그런가 보다고 둘러댔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여자가 머리카락을 그냥 버리지 않고 휴지에 싸서 버리는 걸 보니 얼마나 여성스러워."
둘은 자주 싸우게 되었다. 재원은 자기를 믿지 못한다고 화를 냈고, 희선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고 다그쳤다. 거래처 직원을 오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 않냐며 재원이 달랬다.
그리고 지난 5월, 재원이 샤워를 하러 간 사이에 희선은 그의 핸드폰을 열었다. 그동안 한 번도 핸드폰을 보여주거나 비번을 알려주지 않는 재원이었지만, 희선은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남자친구라고 하더라도 프라이버시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지금까지 한 번도 보려고 시도도 하지 않았던 그의 핸드폰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과 죄책감을 누르고 희선은 메세지함을 열었다. 정서진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 와' 라는 메세지가 눈에 들어왔다. 재원이 그녀에게 메세지를 보낸 시간이 새벽 1시였다. 어젯밤 나를 바래다준 시간이 12시 반이었던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끼면서 메세지 창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재원과 그녀가 작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관계를 맺어왔던 정황들을 보고 말았다. 그녀는 희선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재원을 만나고 새벽에 오피스텔에 와서 자고 가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욕실에 갈 때마다 머리를 빗어서 버린 게 맞았다. 샤워 후에 말이다. 희선은 조금 전 재원이 그녀를 안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속삭이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이 더럽게 느껴졌고, 그런 그와 조금 전 잠자리를 가졌던 자신이 혐오스러웠고, 핸드폰을 열고 금단의 열매를 먹어버리고 만 현실이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자기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재원이 원망스러웠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정서진이라는 그녀가 저주스러웠다. 아주 잠깐, 그가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나한테만 전념해 준다면 다 잊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재원이 몸에 타월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는 그녀를 볼 때까지 희선은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을 어쩔 줄 몰라했었다. 하지만, 희선의 원망과 분노에 재원이 대꾸한 말은 희선의 마음을 얼음같이 굳어지게 만들었다.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사냐? 나 원래 프리 연애주의자인 거 알고 만나왔던 거 아니야? 쿨하지 못하게 정말 왜 이래?"
그랬다. 처음 재원을 만났을 때, 그녀는 재원을 사랑할 계획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대학 선배를 막 잊겠다고 술을 마시며 훌쩍이던 그녀한테 어떻게 하면 쿨하게 상처받지 않고 연애를 할 수 있는지 알려주겠다고 한 사람이 재원이었다. 난생처음 혼자 맥주집에 가 본 희선은 낯선 남자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와서 처음에는 수작을 거는 줄 알고 경계했었는데, 오히려 어떻게 하면 여자를 쉽게 꼬실 수 있는지 알려주고 바람둥이 구별법 같은걸 말해 주면서 자기 같은 남자는 조심하라고 하는 바람에 오히려 경계를 풀어 버렸다.
"여자들이 남자의 눈을 보면 진심을 알 수 있다고 하잖아? 그거 착각이야. 날 봐. 네 눈을 보고 넌 참 이뻐, 널 사랑해, 하고 얘기할 수 있잖아. 하지만 그건 남자가 여자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니야. 여자의 눈에 비친 자신을 보고 하는 말이지. 그래서 어떤 얘기도 할 수 있는 거야. 자기 자신한테 하는 말이니까. 그러니까 그런데 속으면 안 돼."
희선은 이런 재원이라면 이성이라도 친구로 지낼 수 있구나 싶었다. 이야기를 하면 의외로 마음이 잘 맞아서 유쾌했다. 바람둥이들이 여자 맘을 잘 안다더니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참 자상하고 따뜻하고 친절했다. 그렇게 친구로 두어 달쯤 만나다가 어느 날 재원이 희선에게 키스를 했다. 희선은 스스로 뿌리치지 않는 자신에게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키스가 기뻤다. 그렇게 둘은 시작했고, 재원은 희선에게 참 잘 했다. 늘 배려하고 챙겨주고 상냥했기 때문에 2년이 지나는 동안 희선은 재원이 마음이 변해 자기에게 정착했다고 생각해 왔던 모양이었다. 재원이 원래 자기를 조심하라고 했던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재원이었기에 자유연애라는 거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줄까 하는 유혹에 잠시 흔들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헤어진 이후에도 두고두고 그가 그리웠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땅고라는 거 나도 배워 볼까 봐...."
문득 친구 미영이 데리고 갔던 밀롱가라는 장소에서 본 남녀의 흐느적거리는 듯한 몸동작들이 떠오른 건 왜일까. 밀롱가에서 봤던,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어쩐지 에로틱하기도 하고 민망스럽기도 하던 동작들... 처음 봤을 때는 눈을 둘 수 없고 바라보기도 부끄러웠었는데, 갑자기 왜? 재원과 그녀의 관계를 생각해서인가. 어쩐지 남들 다 하는데 나도 그런 거 해 볼까 하는 오기가 생긴 것일까. 재원과 헤어진 이후 희선은 매일 그 밀롱가에서 봤던, 땅고라는 춤을, 서로 밀착된 남녀의 움직임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림: 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