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인생연습 ㅣ 김은지
저는 스토리 중독자예요. 어렸을 때는 만화랑 소설에(주로 만화에) 빠져서 살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영화에 빠져 살고 있어요. 스스로 이야기에 중독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제가 음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작가 프로필 ㅣ 김은지
그냥 평범한 대학원생이에요. 회사에 다니다가 학교로 돌아간 거라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보다 나이가 많은 만학도예요. 처음엔 회사생활이 싫어서 도망치다시피 학교에 들어왔는데 다니다 보니 어느새 좋아져서 계속 학계에 남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국제정치를 전공으로 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꼰대 같은 면이 있어요. 위트 있고 매력 넘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렸을 때 내 친구 중엔 열성팬들이 많았다.
중학교 2학년 때 HOT 팬클럽 부회장이 같은 반이었는데 멤버들 생일마다 간식을 나눠줘서 잘 받아먹었다. 어느 날 그녀가 HOT의 무슨 기념일이라고 팬클럽만 입고 다니는 하얀 우비를 학교에 입고 왔다. 복도에서 하얀 우비를 펄럭이며 걸어 다니는 그녀를 본 체육선생님은 화가 나서 그 우비를 갈가리 찢어버렸는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가방에서 새걸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보고 있자니 너무나도 태연한 그녀의 태도에도 놀라고 슬쩍 비친 가방 안이 온통 하얘서 대체 우비를 몇 벌씩 가지고 다니는 것이지 몰라 경이로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젝스키스 강성훈의 열혈팬이랑 짝이 됐는데 친해져서 매일 하교를 같이 했다. 점심에 밥을 안 먹길래 알아보니 자신은 사이다랑 빼빼로만 먹는다 했다. 강성훈이 그걸 제일 좋아한다고.. 집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내가 보는 앞에서 그녀가 그 외의 음식을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혹시 집이 가난한가 했는데 한 번 놀러 갔더니 우리 집보다 훨씬 부자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으리으리한 음식을 차려주며 학교에서도 빼빼로와 사이다만 먹냐고 물었다. 고2 때는 잡다한 스타를 좋아하는 아이와 친해졌는데 플라이 투 더 스카이 팬클럽 창단 멤버였으며 이기찬과 함께 하고 싶어 장래희망 칸에 연예인 매니저라고 써냈다가 담임에게 불려 갔다. 그녀는 드림콘서트인지 뭔지 연예인이 한 번에 20팀도 더 나오는 곳에 나를 데려가려고 일주일 넘게 내 심부름을 했다. 지금까지도 그 콘서트가 내가 가 본 가장 큰 규모의 콘서트다.
그녀들과 친하긴 했지만 나는 내심 그녀들이 한심했다. 천성이 나쁜 아이들은 아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욕하는 아이들과 싸우느라 대인관계를 망치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투자하는 돈이 연예인에 쓰는 것보다 터무니없이 적었다. 예를 들면 연예인 생일에 선물을 보내려고 몇 달을 옷도 못 사고, 놀러도 못 가고 돈을 모았다. 한심했다.
물론, 나도 누군가의 팬인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드라마를 보고 이나영이 너무 좋아져서 서울에서 분당까지 사인을 받으러 갔고, 대학 올라와서는 조인성 팬이 되어서 그의 영화는 "웬만하면" 개봉 첫 날 보러 갔다. 그래도 팬클럽에 가입한다거나 생일에 선물을 한 적은 없었다. 나는 그게 합리적이며 오히려 내 존엄성을 높이는 멋진 팬질이라 생각했다. 그랬다. 나는 열정이 부족했다.
최근 몇 년간 인기를 끌고 있는 <응답하라> 시리즈에는 팬심이 두둑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두둑하다 못해 내 기준에서 그녀들은 팬질이라기보다는 덕질을 하고 있으며 예전 같았으면 한참이나 한심해 보였을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그녀들의 모습을 보니 한심하다기보다 무언가에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이 괜히 귀여워 보이고 부럽기까지 하다.
팬질(또는 덕질)을 한다는 것에는 적어도 두 가지 장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우선, 자신의 우상(연예인이든 스포츠 스타든 가상의 존재이든)에 대한 빠삭한 배경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모조리 알고 싶어하는 사람의 특성상 누군가를 좋아하면 더 알고 싶고 그 지식은 누적되고 체화된다. 이렇게 얻은 지식은, 범위는 좁을지 몰라도 깊이에 있어서 책이나 강의 등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또, 열정을 가지게 된다. 나 아닌 존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은 삶을 윤택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비록 돌려받지 못하는 애정일지라도 그 일방성을 스스로 인지하는 선에서 크게 어긋남 없이 열정적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친구들은 사실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함으로써 지식을 넓혔고, 열렬한 사랑을 간직함으로써 마음을 풍부히 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경험은 가지지 못했다. 그녀들이 팬으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을 때 나는 숙제를 했고, 시험 준비를 했고, 연애를 했다. 최근까지도 그게 더 값지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이런 일상적인, 평범한 활동들이 몰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했던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니 나는 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중하지 않았는지 묻게 되었다. 숙제하고, 공부하고, 연애도 하고, 모두 어떤 의미로 사회에서 생산적이라고 평가받는 행위들이다. 목적이 있고, 무엇보다 보답이 있는 활동들이었다. 결국 나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행위에 집중했고, 외부의 대상에게 열정이 향할 때는 뚜렷하게 돌려받을 수 있는 경우에만 노력을 쏟았다.
어떤 존재에 대해 아낌없이 사랑하고, 열광하고, 공부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이들의 눈치 보지 않고 나의 마음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그러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애정의 마음이 나에겐 부족했던 것 같다. 이런 열정은 선천적인 거라 앞으로도 이런 감정을 못 가지게 되는 것인지, 아직 나에게 그렇게 열광할 존재가 나타나지 못해서 그러지 못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 안에서 열정을 불태우는 불꽃은 시간이 지날수록 크기가 작아지고 있어서 나중에라도 이 불꽃이 화르르 타오를 가능성은 계속 낮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연예인을 보며 꺅꺅대고, 공개방송에 가고, 선물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사그라 들어가는 내 마음의 불꽃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자신을 활활 태우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감정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녀들이 부러워진다. 그래도 기회가 없을 것 같지는 않다. 불꽃은 위태로워 보여도 한 번도 꺼진 적은 없으니 말이다.
감정에, 마음에, 열정에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다만, TV 속에서 자신의 젊은 날을 끝없는 애정으로 불태우며 눈치 보지 않고 사랑하고 있는 주인공들을 보고 있자니 이런 게 합리적이라고 스스로를 방어하면서 멋대로 친구들을 판단한 나의 오만함이 불현듯 미안해졌고, 갑자기 그녀들이 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