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미식회 ㅣ 이상은
바그너 ( 1813~1883 )
시대적 배경 : 1871년 통일될 때가지, 여러 제후국으로 나뉘어져있었습니다. 주변 국가의 간섭도 많이 받아 이민족에 대한 반감이 컸던 상황입이죠. 그러다가 프랑스 대혁명(1789), 나폴레옹 국민군 때문에 유럽 전체에 시민,국민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민족주의가 발달하게 되었는데요.
당시 유럽전역에서 낭만주의가 유행했는데 독일에서는 민족주의와 결합해서 게르만민족의 뿌리를 찾으려는 쪽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신화 찾기나 과거문학 필사본 발굴작업이 대표적입니다.
바그너의 생애
어린 시절 : 친아버지 생후 6개월 후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10개월도 안 되어서 아버지 친구였던 가이어와 재혼하게 됩니다. 가이여가 연극배우이고, 형제자매가 무대예술가였고, 어린 시절 바그너가 배우로서 활동했던 경험이 바그너의 작품에서 무대가 웅장하고, 언어를 중시하게 하는 등 영향을 많이 끼쳤습니다.
어머니에게 따뜻한 사랑을 못 받아 여성에 대한 갈망이 평생 지속되어 작품에서 여성의 헌신적인 사랑을 추구하고, 현실에서도 여성편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그너는 작곡 공부를 하고 지휘자로 활동하다가, 23세 때 여배우 민나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때 민나는 27세였는데, 10살 어린 딸이 있었고, 결혼 초기에 바람을 필 정도로 남성편력이 심한 사람이였습니다. 바그너가 원하던 절대적 사랑을 충족시킬 수 없는 여자였죠. 둘다 돈 낭비가 심해서 빚이 눈동이처럼 커지니까 파리로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파리에서는 직장도 없고, 작곡을 해도 올릴 기회도 없어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요. 독일로 돌아와서 ‘리엔치’가 대성공을 거두게 되고,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게 됩니다. 조국 ‘독일’이 자신을 알아봐준다고 생각하니까, 더 애국심이 높아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1849년 드레스덴 혁명이 실패하니까, 혁명파였던 바그너는 11년동안 망명생활을 하게 됩니다.
스위스 취리히에 정착해서 베젠돈크 부부와 친분을 쌓게 되었습니다. 남편 오토 베젠토크의 적극적 후원과 인간적 신뢰에도 불구하고, 부인 마틸다에게 연정을 갖게되었습니다. 마틸다는 아름답고, 총명하고,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인데다가 바그너를 열렬히 숭배해서 바그너가 원하던 여인상이였습니다. 두 사람이 밀회를 즐기다가 남편 오토와 바그너 부인 ‘민나’에게 들켜, 바그너는 루체른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당시에 작곡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두 남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는 이야기로서, 마틸다와 이루지못한 사랑이 반영되었습니다.
서서히 혁명에 대한 열정도 사라지고, 독일에서도 바그너의 귀국을 허락해줘서 독일로 돌아와서 명성을 얻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낭비벽이 여전히 심해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갑자기 루티비히 제후가 바그너를 후원해주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빚을 다 갚아주고, 작품활동에 전념하도록 재정적으로 크게 지원해주었는데요.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왕 주변 사람들이 바그너가 혁명주의 사상을 가져 왕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 영향을 끼치고, 바그너를 지원하는데 돈을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그너는 유부녀 코지마와 사랑에 빠졌는데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첫 부인 민나가 사망하고 코지마가 이혼을 허가받자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바그너는 65세, 코지마는 33세로 친분이 있었던 리스트의 딸이였습니다. 제후는 바그너에 대해 점차 신뢰를 잃어가고, 연출자, 상연시기 등 공연에 많이 간섭했습니다. 바그너는 이런 간섭이 싫고 자신의 작품을 상영하기에 좀더 큰 극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한 끝에 독일 남쪽에 위치한 바이로이트 도시에 극장을 건설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니벨룽겐의 반지’초연이 대공성하면서, 바그너의 명성은 더 높아졋다고 합니다.
나이 82년도 건강이 나빠져 베네치아에서 요양하다 심장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바그너 사후에 가족들이 바이로이트에 있는 극장을 경영하고 있는데, 매해 7~8월에 바그너 축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자기 모순의 아이콘
1. 초월 : 쇼펜하우어는 삶에 대한 맹목적이고도 근원적인 갈망을 삶을 고단하게 하고, 이 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법 ‘포기/체념’이라고 했습니다. 쇼펜하우어를 열렬히 존경하면서도 바그너는 윷게적 역망을 포기하지 못했죠. 욕망의 포기와 해소라는 고통스러운 역설을 비록 언어로 시원스럽게 설명하지 못한 대신 음악으로는 극한까지 탐험하였다고 합니다. 미학자 아도르노는 이처럼 비범한 예술적인 통찰력을 “자신의 타락을 관찰하고서 이를 초월해 극도로 매혹적인 눈길을 이겨내는 이미지로 화하는 능력”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쇼편하우어 역시 “창조의 절정에 달한 순간의 자아와 일상생활의 자아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탄식을 했다고 하죠. 이성에 따라 삶을 살아내는 것은 성자들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예술가는 이상을 잠깐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을따름이고, 작품을 통해 이상을 담아내고 체현할 수 있는 거 같습니다.
2. 반유태주의자 : 바그너가 태어난지 10개월도 안 되어서 어머니가 재혼을 했다고 하는데, 연극배우였던 의붓아버지에게 예술가적 기질을 많이 물려받았습니다. 의부의 영향이 크다보니 자기 친아버지가 아닐까 평생 의심을 했는데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의붓아버지의 출신인 유태인에 대한 반감을 더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아들이 의부를 닮아서 자신이 유태인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커졌습니다.
3. 혁명의식 : 처음에는 무정부주의자였다가 1848년 혁명때 11년 동안 망명생활하면서 혁명의식이 약해졌습니다. 루티비히 제후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면서도 작품에 불투명한 혁명의식을 반영했습니다.
4. 배은망덕 : 도움을 준 지인들을 깎아내렸다고 합니다. 파리에서 일이 안 풀리니까 도움을 준 음악가들이 오히려 방해를 해서 자기 일이 안 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5. 물질만능주의 :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부르주아들을 경멸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상반되는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열렬한 바그너주의자 ’니체‘가 실망해서 비판적 입장을 갖게되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바그너가 후대에 끼친 영향
1. 총체적 예술 ‘악극’ - 전통적인 오페라에서는 성악가의 노래가 주는 아름다움을 중시하고, 오케스트라는 노래를 반주하거나 강조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그너는 오케스트라가 흐름을 주도하며, 목소리는 가사를 통해 음악의 명확성과 정확성을 높이는 역할을 했습니다. 기존 오페라가 작은 극이 모여서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붙이면서 이루어졌는데, 바그너는 이러한 작품번호의 형식을 없애고 중단하지 않고 음악이 계속되었다. 극의 표현이 더 중요해져서 대본과 연기가 더욱 중요되었다.
또 오페라를 시, 장면디자인, 무대, 연기,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 총체적인 예술작품을 만들어내서 기존 오페라와 구분하기 위해 악극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오늘날 오페라에 널리 쓰여서 ‘악극’이란 용어가 크게 쓰이지 않게 되었다.
2. 화성의 기능적 확장 : 모호한 불협화음의 긴 행렬, 끊임없는 반음계적 전조, 빈번한 허위 종지를 사용하여 끝날 것 같으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무한 선율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런 화성진행의 사용은 이후 근대음악의 반음계주의의 시금석이 되고, 현대음악에 큰 여향을 줍니다.
3. 라이트모티프(유도동기, 지도동기) : 라이트 ‘독일어:이끌다’
: 극중 인물이나 상황과 연관된 선율을 의미 → 현대 영화음악과 드라마에 큰 영향
모차르트나 베토벤보다 바그너가 선율을 많이 만들어내는 능력은 적음→리듬,악기조화/수로 변주
이번에 같이 듣고 싶은 곡은 Overture Die Meistersinger (뉘른베르크 명가수 서곡) 입니다.
듣고 난 감상 부탁드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