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미식회 ㅣ 이건우
요하네스 브람스 (1833~1897)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책에서는 브람스에 대해 이렇게 소개를 하고 있다.
'낭만의 끝자락에서 고전을 바라보다.'
그리고 첼리스트 안너 빌스마는 브람스에 대해 이렇게 소개를 하고 있다.
"외관은 어두워보이지만 좋은 친구이고 도덕가이며 정직하다. 위대한 시인은 아니다. 그래서 나와 같다. 친애하는 여러분, 당신들과도 같다."
시기적으로는 후기낭만주의를 살았다. 당시의 음악 주류를 이끌던 바그너, 리스트보다 스무살가량 어렸던 브람스지만 신고전주의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브람스를 그 어딘가에 위치시킨다는 것이 어디까지나 편의적 방법에 불과하다. 그의 음악을 시기별로 관통해서 듣고나면 여러분도 동의할 것이다.
그는 그저 음악의 순수한 예술성을 고집스럽게 지켜내려 했던 사람이라는 걸.
> 브람스의 가족관계와 10대 시절
아버지 요한 야코프 브람스는 콘트라베이스(정확히는 콘트라바스, 영어식으로는 더블 베이스가 맞다)의 연주자였다.
당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의 위상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유명한 소설 '콘트라베이스'의 한 구절을 보며 명확히 알 수 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최후의 쓰레기 같은 존재입니다.'
화려한 현악기와 우렁차게 터지는 관악기들에 비하면 초라하고 안쓰러운 악기라 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 내에서의 위상도 마찬가지였고, 아버지 야코프는 어느 오케스트라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이 악사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리고 북부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 정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세 들어 살던 주인집의 딸과 결혼을 하고 브람스를 낳게 된다.
브람스의 어머니, 크리스티아네 니센은 야코프보다 무려 17살이나 연상이었고, 한쪽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였다.
음습한 항구도시 함부르크,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환경,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 속에서 자란 브람스는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다.
처음엔 아버지가, 그리고 동네 피아노 교사, 이후엔 그 피아노 교사의 스승에게 작곡과 음악이론을 전수 받은 것이 다였다.
아버지는 항구 주변의 술집을 전전하며 호른을 연주하여 돈을 벌었고, 열세살이 된 브람스 역시 아버지와 함께 술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극장에서는 인형극을 연주했고, 술집에서는 왈츠와 폴카를 연주했다.
항구 근처의 술집은 선원들의 매매춘 장소로 이용되는 거칠고 지저분한 곳이었는데, 어린 브람스는 그곳에서 10대 시절을 고스란히 바친다.
-> 브람스의 음악이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무겁고 중저음들이 강조되는 이유는 이러한 10대시절의 환경과, 콘트라베이스와 호른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 또, 한가지 1848년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을 때, 많은 헝가리 집시 음악가들이 항구도시인 함부르크로 건너왔다. 그 중에는 후에 친구가 된 바이올린의 비르투오소인 '에두아르드 레메니'도 있다. 이후 '헝가리 무곡'의 뿌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스무살의 브람스, 슈만과의 만남
마침내 스무살이 된 브람스, 1853년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 베토벤의 적자로 불리던 슈만을 찾아가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C장조'를 연주한다.
<피아노 소나타 C장조>
1악장을 끝냈을 때, 슈만이 말한다. "잠시 연주를 멈추게!"
그리고 그는 아내 클라라를 데리고 와서 듣게 하는데, 그것이 브람스와 클라라의 첫만남이었다.
슈만은 자신이 창간했던 음악평론지 '음악신보'에 '새로운 길' 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글을 게재하는데, 그것은 이 잡지에 절필을 선언한 후 10년만에 쓴 글이었다.
슈만은 브람스의 소나타가 마치 '베일을 쓴 교향곡'에 가깝다고 평했다.
다양한 성부의 복잡한 구조를 교향곡처럼 다루는 젊은 작곡가의 천분을 꿰뚫어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슈만은 글에서 브람스를 극찬하면서 동시에 리스트와 바그너풍을 거세게 비난한다. 그런 까닭에 브람스는 음악계 데뷔와 동시에 반대파들의 공격 타깃이 된다.
슈만은 그 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천재가 다녀갔다.'
> 생애에 걸친 단 4개의 협주곡, 그 첫 번째
브람스를 열렬히 옹호했던 슈만은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 브람스와 첫 대면한 뒤 약 5개월 뒤에 라인 강에 몸을 던지지만 간신히 구조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슈만이 생을 마감하기까지 약 2년간 브람스는 뒤셀도르프에 머물면서 슈만의 집안을 가족처럼 돌본다.
바로 이 무렵에 작곡한 곡이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이다.
<피아노 협주곡 1번>
3악장으로 구성되어있으며, 1악장은 마에스토소 악장. 장엄하게 펼쳐진다.
비장하면서도 남성적으로 시작하는 이 악장은 젊은 브람스를 잘 보여준다.
2악장은 아다지오로 연주되는데,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는 2악장을 '당신의 아름다운 초상' 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을 인정해준 스승과 같은 존재인 슈만을 잃은 슬픔, 그리고 그의 아내인 클라라에게 느끼는 애틋한 마음이 휘몰아치는 젊은 브람스의 마음을 나타내주는 것만 같은 곡이다.
완성된 것은 1858년, 그리고 초연은 1859년에 절친한 친구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제프 요하임의 지휘하에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여 발표하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브람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단도 청중도 무반응이었고, 박수를 치려고 했던 사람은 고작 3명' 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음악에 대한 평가보다는 '진영 논리' 때문이었다. 바그너를 비롯한 진보진영과 원치 않았지만 브람스를 위시한 보수진영과의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 때문인지, 브람스의 두 번째 협주곡을 듣기 위해서는 무려 20년을 기다려야 하게 된다.
>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독일 레퀴엠
서른두살이던 1865년 어머니를 잃은 브람스는 깊은 슬픔에 빠져있다가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악보 하나를 꺼낸다.
그것이 독일 레퀴엠의 출발점이었다.
슈만이 죽은 1856년 무렵부터 작곡을 시작한 미완성 악보였다. 거의 운만 띄워 놓은 악보에 불과했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이 곡의 작업을 재개하여 이듬해에 모두 6곡으로 이루어진 독일 레퀴엠을 작곡해 초연한다.
그리고 뭔가 허전했는지, 한곡을 더 작곡한다. 제5곡으로 레퀴엠 중 가장 온화하고 아름다운 곡이다.
성경의 구절들을 독일어 가사로 표현한 장엄한 곡으로, 이 곡을 접한 당대의 음악비평가 한슬리크는 이렇게 브람스를 표현한다.
'슈만의 진정한 계승자, 밀도 높고 지적인 작품, 가장 내밀한 세계로 침잠하는 음악의 세계를 보여준다."
독일 레퀴엠 역시 구상에서 완성까지 거의 10년이 걸렸으며, 어머니의 죽음이 완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곡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가사의 의미를 마음 속으로 따라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독일 레퀴엠>
-독일 레퀴엠 가사 소개-
[1곡]
"애통하는 자 복이 있나니 /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 마태복음 5장 4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 울며 귀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년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시편 126편 5~6절
[2곡]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도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
"그러나 참으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까지./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라니./ 너희도 길이 참으라."
-야고보서 5장 7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도다./ 그러난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3곡]
"여호아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하여금/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보라,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나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분노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지는/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겠나이까?/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편 4~7절
"올바른 사람의 영혼이 주님의 손에 있으니/ 어떤 고통도 그들에게 닿지 않으리라."
-잠언 3장 1절
[4곡]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에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라."
-시편 84편 1~2절, 4절
[5곡]
(소프라노 독창)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요한복음 16장 22절
(합창)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이사야 66장 13절
(소프라노 독창)
"내가 잠시 수고한 걸/ 너희가 보았으나/ 나는 큰 휴식을 얻었노라."
-집회서 51장 35절
[6곡]
(합창)
"이 땅에 영원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우리가 찾나니."
-히브리서 13장 14절
(바리톤과 합창)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소리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합창)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 살고 우리도 변하리라."
(바리톤)
"기록된 말씀에 응하리라"
(합창)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장 51절~52절, 54~55절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
[7곡]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가 행한 일을 따름이라."
-요한계시록 14장 13절
> 드디어, 교향곡 1번 C단조
'등 뒤에서 다가오는 거인의 발자국 소리'
브람스가 친구인 지휘자 헤르만 레비에게 했던 이야기이다.
베토벤을 두고 한 말로, 당시 교향악을 작곡한다는 것은 베토벤이라는 앞 시대의 거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1827년 이후 브람스의 시대까지 베토벤의 교향곡은 가장 많이 연주되는 레퍼토리였고, 그 아성을 뛰어넘는 교향곡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안그래도 소심하고 신중한 성격인 브람스가 교향곡 작곡에 얼마나 조심스러웠겠는가.
그는 베토벤에 대한 존경심이 유난했고, 자신의 음악 작업실의 그랜드 피아노 뒤 벽 높은 곳에 베토벤의 흉상을 달아놓은 것을 보며 마치 작곡하는 브람스를 베토벤이 위에서 지켜보는 것만 같은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등 뒤에서 다가오는 베토벤을 의식했던 브람스는, 게다가 반대파들로 인해 음악적으로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스케치는 1855년에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는데, 그로부터 무려 20년이 지난 1876년에 이르러서 초연을 하게 된다. 지휘는 교향곡 1번의 충실한 조언자였던 오토 데소프가 지휘를 맡았다.
당대 유명한 음악비평가이며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는 이 곡을 듣고, '베토벤 교향곡 10번이라는 표현을 한다. 물론 찬사의 뜻이다.
참고로 한스 폰 뷜로는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와 결혼하고 이후 바그너에게 빼앗긴 남자지만,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았던 대인배였다.
교향곡 1번 베토벤이 5번 교향곡에서 인상적으로 전개한 '어둠에서 광명으로'의 패턴이 이 작품에서도 여실히 보여지는데, 그런 부분들이 성취욕이 강한 부르주아 청중의 공감을 산 것도 이 작품이 환영받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교향곡 1번>
> 교향곡 2번 D장조
1번이 발표되고 연이어 1877년에 2번 교향곡이 발표된다.
브람스의 작품 중에서는 유달리 밝고 여유로운 기분으로 충만한데, 여름 호숫가 휴양지 푀르차흐의 석양이 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브람스적으로는 드물게 단숨에 써 내려간 작품으로 1번 교향곡과는 반대편에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교향곡 2번>
> 바이올린 협주곡, 세개 3대 바이올린 협주곡 중 하나로 불리는
요하임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 받으며 작곡에 열을 올리던 브람스는 이윽고 첫번째 협주곡 이후 20년이 지난 1878년 바이올린 협주곡을 발표하게 된다. 그의 신중한 성격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 곡은 베토벤과 멘델스존과 더불어 3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바이올린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2번 B플랫 장조
1878년부터 작곡해 1881년에 마무리 한 회심의 콘체르토로, 브람스가 50세를 앞두고 완성한 원숙기에 도달했을 때의 곡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이미 앞서 소개한 '독일 레퀴엠, 교향곡 1, 2번,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완성하고 초연한 이후이므로 이미 사회적인 명성을 쌓은 음악가가 된 이후이다. 이 시기부터 우리가 익숙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완숙기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1번만큼 격정적인 곡은 아니지만 음악적으로 더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브람스가 편지로 음악적 의견을 나누던 여자사람은 클라라만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폰 헤르초겐베르크라는 여성에게 협주곡 2번을 완성한 후,
"사랑스럽고 연약한 스케르초를 가진 정말 작은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 라고 편지를 보내는데, 이것은 브람스적 역설이다. 연약하고 작기는 커녕 1번 보다 길이도 더 길고 무려 4악장이나 된다.
이 여성은 브람스의 제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여성이나 브람스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마음이 끌릴까 두려워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브람스는 클라라만 마음에 품은 채 독신으로 죽은 남자로 그려질 때가 많지만 사실과는 좀 다르다. 여러 여성과 실제로 교제도 하였지만 결혼직전에 번번이 관계를 단절했다고 한다.
오히려 유년기의 경험이 강하게 작용한 것 아닐까싶다.
1번이 피아노의 존재감을 화려하게 부각시켰다면 중년의 브람스는 조화를 추구한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며 주제를 만들어나간다.
<피아노 협주곡 2번>
> 교향곡 3번 F장조
1883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4개의 교향곡 중 가장 힘 있는 교향곡으로 알려져 있다. 동명의 소설인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배경음악으로 교향곡 3번의 3악장이 흘러나오는데, 우리에게 더 친숙한 곡이다.
만약 당신이 브람스에 대해 무뚝뚝하고 보수적이고 형식주의자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 곡을 가장 먼저 듣기를 권한다.
<교향곡 3번 3악장>
브람스는 교향곡 2번을 작곡하던 시절부터 3번을 완성하던 시기인 약 6년 동안 이탈리아를 세 차례 여행했다. 교향곡 3번이 유난히 구성면에서 명쾌하고 간명한 특성을 보이는데, 알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주제를 논리적으로 빈틈없이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영향이라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헝가리, 네덜란드, 폴란드 등을 방문하며 견문을 넓혔으며, 이 시기의 브람스는 자신의 대표작들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 교향곡 4번 E단조
브람스가 50대 초반, 1884~85년에 작곡한 곡으로, 교향곡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곡이다.
브람스는 이 곡을 완성한 이후로, 교향곡은 물론 관현악이 들어간 곡도 거의 쓰지 않는다. 유일한 것은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협주곡' 뿐으로, 생의 후반부에는 관현악보다는 실내악에 마음을 기울인다.
특히 말년에는 클라리넷을 주인공으로 3중주, 5중주, 소나타를 작곡했다.
<교향곡 4번>
> 브람스의 예술적 성취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자신의 저서 '음악미학'에서 브람스를 이렇게 평한다.
'그의 음악은 자신의 재료 (슈만의 낭만주의 정점의 재료)가 객관화될 때까지 자기소여 속에서 깊이있게 관찰한다. 그것은 주체의 객관화다.
바그너 음악에서는 역동적인 열정을 통해 성취된 것이 브람스에게서는 완고한 고집을 통해 성취된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베토벤이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끌어안으면서 실제적인 총체성을 구현했던 것에 비해, 바그너는 가상적 세계로의 총체성을 만들어낸다. 결국 바그너의 총체성은 실제에 이르지 못한 사이비 총체성이라는 한계를 노정하면서 허구와 도취라는 논란을 낳는다.
브람스의 시대에는 개인과 전체의 결합이라는 이상에 이미 균열이 가 있던 상태였다. 베토벤적 이상은 당시 유럽사회에서 더 이상 미덕이 아니었다.
바그너가 청중을 허구의 세계로 몰고 가 집단적 열광을 얻어냈던 것과 달리, 브람스는 개인적 내면의 세계로 점점 침잠한다. 그리하여 개인적인 순정함, 오로지 음악에 대한 고집스러운 경의가 브람스를 설명하는 요체로 남는다.
> 브람스를 여행하며 얻은 키워드
단 4개의 협주곡, 단 4개의 교향곡 (물론 의외로 브람스는 슈베르트를 잇는 가곡의 왕이며, 수많은 실내악곡, 소나타 등을 작곡했으나...하지만, 오페라나 교향시는 한 곡도 작곡하지 않았던...)
오로지 관현악의 범주에서 보자면 그가 이룬 성취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적은 결과물이다. 그의 신중하고도 완벽주의적 기질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덕분에 이번 브람스 여행에서 충실하게 협주곡들을 감상하며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포인트가 있었다.
전통과 조화
바그너는 자신의 태생의 비밀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좀처럼 과거를 껴안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과거와의 지난 것과의 결별을 선택한다,
그는 '교향악은 죽었다' 고 선포하고, 자신의 악극을 새롭게 창시한 선구자적 인물이다.
하지만 브람스는 자신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슈만의 가족을 옆에서 지켜주며 평생을 걸쳐 그들과 왕래하며 지원해주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재혼하여 낳은 자식과 가족들까지 거둬들였다.
그는 자신의 우울했던 과거를 끌어안고 함께 가는 그런 남자였던 것이다.
숙명...그리고 한.
그런 성향이 고스란히 그의 음악에 표출되어 있다.
젊었을 때의 협주곡 1번의 경우에는 아직 피아노의 주제가 강하고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려는 경향이 엿보이지만, 20년의 세월이 지난 후의 브람스의 협주곡은 단연 '조화'가 키워드가 된다.
보통 협주곡은 피아노 vs 오케스트라의 구도로 가는데, 브람스의 협주곡은 다르다. 이기려 하지 않는다. 끌어안고 주제를 서로 주고받으며 변주하여 모두가 만족하는 주제를 마지막 악장에서 제시해낸다.
이런 구성은 필 받아서 후루룩 써내려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니체는 브람스가 철학이 없다고 비판하였지만, 브람스는 머리로 생각해 앞서서 제시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과 음악을 중첩시켜나가며 천천히...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것이 스스로 주제를 제시하기를 기다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나는 바그너적인 것보다는 브람스적인 것이 좋다.
다소 시간이 걸릴지언정 삶을 배반하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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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러분과 함께 듣고 싶은 곡은 가장 브람스적인 깊은 침잠을 느낄 수 있는 '독일 레퀴엠'입니다.
브람스는 신실한 프로텐스탄트 신자였으나,
종교를 떠나 슈만을 잃은 슬픔에서 작곡을 시작해,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완성한 독일 레퀴엠의 가사를
부디 음미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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