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미식회 ㅣ 해원
가브리엘 포레(1845~1924)
포레는 고전주의-낭만주의-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음악 사조에서, 후기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프랑스 근대음악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두둥.
1. 생애 연보
포레는 1845년에 프랑스 남부 파미에르에서 시골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4년에 아버지에 의해 교회음악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61년(16세)에는 생상스가 부임해서 슈만, 리스트, 바그너 등 여러 작곡가의 음악을 소개하고 그를 가르쳤다. 이때 생상스와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나, 추후에는 음악으로 교류하는 친구가 된다. (생상스는 김연아의 작품으로 유명한 죽음의 무도를 작곡한 음악가이다.)
1874년(29세)에 포레는 생상스가 수석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는 마들렌 성당의 보조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당시 파리에는 바그너의 낭만주의 음악이 유행하고 있었다. 포레는 바그너의 음악은 존경하였지만 자신의 음악에는 반영하지 않았다.
1883년(38세)에는 유명한 조각가의 딸 마리 프레미에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못하였고, 염문을 뿌리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1892년에는 가수 엠마 바르닥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의 딸 돌리를 위해 피아노곡 돌리 모음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1887년(42세)에는 그의 대표적인 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레퀴엠을 작곡하였다. 85년과 86년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잃은 후였다.
1892년에는 생상스는 포레에게 파리음악원의 교수가 되는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다른 음악원 동료 교수들과 당시 음악원 원장은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1896(51세)에 결국 파리음악원의 작곡과 교수가 되었다. 포레는 그곳에서 모리스 라벨, 나디아 불랑제 등 많은 걸출한 제자를 길러냈다.
1905년(60세)에는 파리음악원의 원장이 되었다. 파리 음악원 출신이 아닌 포레가 원장으로 취임했다는 것은 당시 프랑스에서 놀라운 뉴스였다. 그리고 포레의 은근한 끈기, 또 다른 측면에서의 정치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포레는 심사직을 모두 외부 인사로 채우는 음악행정가로서도 여러 개혁에 착수했다.
청각이 이상이 생긴 포레는 1920년에는 파리음악원장직을 사임하고, 1924년 11월 4일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장례는 프랑스 국장으로 치뤄졌다. 장례식에는 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다.
2. 포레의 음악, 시기적 구분
포레 음악의 특징은 그의 작곡시기별로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낭만주의 어법을 흠뻑 받아들이며 음악적으로 성장해나가던 청년 시기이다. 생상스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특유의 서정성이 잘 발휘되었던 시기이다. 대표적인 곡으로 우리는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들어볼 것이다.
2기는 그가 음악적 성숙기에 접어들던 시기로 30대~40대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 작곡가로서 초반부를 벗어나면서 특유의 화성과 색채감, 모호한 듯 하면서도 은근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독특한 음악세계를 서서히 구축해간다. 1987년 양친을 잃고 작곡한 레퀴엠이 가장 대표적이다.
3기는 포레의 말년의 스타일이 드러났던 시기로 상당히 다양하고 풍부한 음악어법을 보여주는 시기이다. 젊은 시절 보여줬던 낭만성, 중기의 음악에서도 여전히 빛났던 감각적 아름다움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정신적이고 내향적인 세계로 침잠한다. 여기서는 포레 말년, 사망 직전 작곡했던 현악 4중주 e단조를 들어볼 것이다.
3. 포레의의 음악들
3.1. 바이올린 소나타 1번 (1877)
이 소나타는 포레의 작품세계에서 각별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왜냐하면 포레가 진지한 작곡가로 인정받게 된 계기가 바로 이 곡이었기 때문이다. 1877년 1월, 새로 설립된 국민음악협회의 콘서트에서 마리 타이요의 바이올린과 포레의 피아노로 이 소나타가 초연되었을 때 관객들은 열광했고, 그의 스승이자 친구인 생상스는 열렬한 찬사를 담은 평론으로 그의 앞길을 활짝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전까지 포레는 작곡가라기보다는 연주가(피아노, 오르간)나 교육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했고, 그의 창작활동은 가곡을 중심으로 한 성악곡에 편중되어 있었다. 이렇게 보면 포레는 이 곡을 통해서 기악 장르에 첫걸음을 내디뎠고, 보다 본격적인 작곡가로 도약할 발판이자 전환점을 마련한 셈이다. 그런가 하면 이 소나타는 청년 포레의 뜨겁고도 은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1870년대 들어 포레는 생상스의 소개로 유명 여가수 폴린 비아르도를 알게 되었다. 폴린 비아르도는 스페인 출신으로 어린 시절 리스트에게 피아노를, 라이하에게 작곡을 배웠고, 20대 때는 쇼팽과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탁월한 메조소프라노 가수로 1940년대에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사람들] 등의 오페라에 출연하며 최고의 여가수로 각광받았다.
포레를 소개받았던 1870년대에도 그녀는 파리 음악계의 여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정치적인 문제로 한동안 파리를 떠나 있었다가 돌아와서 음악 살롱을 열었는데, 그녀의 살롱은 당시 파리 문화예술계의 인사들과 지식인들이 드나들며 모임을 갖던 명소였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 이반 투르게네프, 조르주 상드 등이 자주 모습을 보였고, 음악가로는 생상스, 포레를 비롯한 피아니스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포레는 이 살롱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곤 했다. 당시 그는 마들렌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가 세속적인 살롱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어울린다는 것은 적절치 못한 처신이라는 지적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파리 최고의 명사들이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관한 이야기와 취미를 나누며 어울리는 그곳의 분위기를 즐겼던 것으로 보이며, 그들로부터 받은 풍부하고 신선한 자극은 그의 창작활동에 좋은 자양분이 되어주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일설에 따르면, 당시 포레는 비아르도의 딸인 마리안을 사랑했으며 결혼까지 염두에 두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마리안이 약혼 상태였던 1877년에 그는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 ‘우리의 소나타’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소나타가 바로 이 ‘A장조 바이올린 소나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도 그와 마리안은 맺어지지 못했지만, 이 소나타를 들어보면 도처에서 그때의 열정과 갈망, 희망과 환희가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물론 그가 살롱에 열심히 출입했던 이유 중 하나가 마리안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포레가 남긴 두 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중 첫 곡인 이 ‘A장조 소나타’는 단적으로 말해서 ‘환희를 지향하는 사랑과 정열의 음악’이며, 포레의 젊은 시절 특유의 신선한 생명력과 다채로운 활기로 가득한 매혹적인 작품이다.
마치 음악으로 쓴 한 편의 서정시와도 같은 이 소나타에서는 일정 부분 포레가 선호했던 멘델스존, 슈만, 생상스 등의 영향이 감지된다. 하지만 경쾌하고도 감미로운 터치와 유려하고 섬세한 화성의 흐름, 전편에 걸쳐 면면히 이어지는 칸타빌레 선율, 스케르초에서 감지되는 세련된 유머 등은 분명 ‘가장 프랑스적인 낭만주의자’였던 포레의 독자적 개성을 가리키고 있다.
3.2.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b플랫 장조. op. 28. (1893)
포레는 마리안느 비아도르와의 파혼 이후, 조각가의 딸 마리 프레미에와 결혼한다. 결혼 이후 포레의 관심사는 다시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구성을 지닌 작품으로 돌아오게 되며 1악장 형태의 이 작품은 시기에 작곡된다. 포레는 이 작품에 대해서 처음으로 들을 땐 마치 치아를 가는 소리처럼 들릴 것이고, 두번째에는 빛이 비춰지는 것처럼, 그리고 세번째에는 맑고 차가운 시냇물이 푸른 초원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다만 세번까지 듣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했다. 포레의 설명이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진다.
3.3. 파반느. op. 50. (1886)
스페인에서 유래된 프랑스의 궁정무용곡.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2, 현 5 부 , 혼성 사부 합창 (옵션) 타악기없이 금 관악기도 호른 만의 꽤 작은 편성으로, 특히 곡의 처음이자 실내악으로 울림이 특징이다. 포레의 다른 관현악 작품뿐만 아니라 목 관악기, 특히 피리에 중점을두고있다.
1886년 쥘레당베의 일련의 연주회를 위해 작곡한 관현악 소품으로 포레는 이듬해 그레퓌렉 백작부인의 요청으로 곡의 후반부에 합창을 첨가시켰다. 파반느는 16세기 초 스페인의 느릿한 2박자의 궁정무곡인데 공작새(pavo)를 흉내 낸 기품있는 자태의 춤에 그 어원을 두고있다.
이러한 로코코 시대의 우아한 파반느 무곡 양식이 바탕이 된 안단테몰토 모데라토의 이 작품은 3부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주제는 작곡가의 전 작품 중 첫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서정미가 넘친다. 극적인 중간부를 포함 포레다운 정교하고 날렵한 세련미로 인해 널리 사랑받는 소품이다.
3.4. 레퀴엠(1987,1893,1990)
주로 여름 휴가 때 집중적으로, 실내악 위주의 곡을 많이 쓴 포레에게 대작이라고 할만한 곡은 그렇게 많지 않다. 레퀴엠은 그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대작으로 꼽히며, 가장 많이 사랑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을 처음 구상한 것이 1877년도였고, 1887년 5악장까지 써서 초연, 그 후 5년 뒤 1893년에 2악장을 더해 7악장이 완성되었다. 이때는 실내악 오케스트라에 금관을 더한 비교적 소규모 연주였다. 1900년에 한 차례 편곡해서 실내오케스트라를 대규모 관현악으로 편성했다. 최종 대편성 오케스트라로 완성되기까지는 20여년 걸린 셈이다. 87년 레퀴엠을 작곡하기전, 85년과 87년에 양친을 떠나보낸 슬픔이 작곡의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레퀴엠은 원래 죽은 이의 안식을 기원하는 음악으로 가톨릭 미사에서 불리던 곡이다. 원래는 반주없이 합창으로 이루어진 아카펠라 음악이었으나 바로크 시대에 악기반주가 덧붙여졌다. 또 고전주의로 접어들면서 왕족과 귀족의 명령이나 청탁을 받아서 레퀴엠이 작곡되기 시작하면서 교회 음악을 넘어선 콘서트 음악으로 자리매김했다. 레퀴엠 걸작으로는 주로 모차르트, 베를리오즈, 베르디, 포레 등이 손꼽힌다. 물론 우리가 배운 바 있는 브람스의 독일레퀴엠도 걸작이다.
베를리오즈와 베르디 같은 이들은 레퀴엠을 작곡하며 최후의 심판에 초점을 맞춰 강렬한 극적 효과를 보여줬던 것과 달리 브람스의 독일레퀴엠의 경우 좀 더 인간적인 고뇌를 드러내었다. 포레도 죽음의 공포보다는 평화로운 안식을 노래한다. 그의 레퀴엠의 특징은 <최후의 심판>이 아예 없고 마지막 7악장에서 <천국에서>가 더해졌다. 다른 작곡가들의 레퀴엠에서 빈번히 형상화되던 지옥불의 공포가 사라진 자리를 따듯한 위로의 감정으로 채운다. 죽음이나 심판에 대한 두려움보다 죽은 자를 애도하고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영원한 안식,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담아내었다. 때문에 당시에는 이교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죽은 자를 위한 미사로서 너무 가볍다는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의 레퀴엠에 대해 "죽음이란 고뇌에 차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해방과 구원, 행복한 마음으로 다음 세상을 맞는 것"이라고. 그는 자신의 레퀴엠에서 내세의 행복에 대한 열망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
전체 악장에 대한 가사 참고 : http://blog.daum.net/seonomusa/3273
3.5 시칠리안느
포레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시실리안느'은 본래 몰리에르의 극음악 '평민귀족'의 일부로1893년에 작곡된 것이다. 그리고 후에 작곡된 극음악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op. 80)에서도 다시 이 곡이 사용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시실리안'의 독특한 부점리듬이 효과적으로 씌여지고 있으며, 선법적인 선율의 움직임을 통해서 섬세한 변화가 그려진다.이 곡은 포레의 곡중에서 가장 애호 받는 곡의 하나로서 여러 가지 악기로 편곡되어 연주되고 있다.
시실리안느는 17~18세기경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서 생겨난 무곡. 대개 중간 속도의 8분의 12, 8분의 6박자로 되었으며 펼친화음[分散和音]으로 반주된다. 선율은 거의가 점리듬으로 연주되는 서정적인 선율이고 성격은 다르지만 파스토랄과 비슷하다.코렐리 ·바흐 등의 소나타에도 느린 악장으로 쓰이고, 또 오페라나 칸타타 등에서도 아름다운 전원풍경 같은 데서 연주되고 있다.
3.6. 현악4중주 e단조 op.121. (1924)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79세로 세상을 뜨기 두 달전인 1924년 9월에 완성되었다. 그가 공직 자리도 모두 은퇴한 후이며, 청력을 잃은 후에 쓰여진 작품이다. 평생에 걸쳐 실내악 작곡에 심혈을 기울였던 포레는 현악 사중주를 작곡하기 전에 많은 실내악 작품을 남겼는데, 피아노 삼중주, 사중주, 오중주, 바이올린소나타, 첼로소나타, 작은 규모의 다양한 실내악 작품등이었다. 그러나 그는 현악 사중주를 작곡한다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현악사중주는 특별히 베토벤을 유명하게 만든 장르로서 베토벤이 아닌 사람이 현악사중주를 작곡한다는 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제자인 라벨은 현악사중주를 작곡하여 1903년에 포레에게 헌정. 이후 그의 제자들은 포레가 현악 사중주 작곡하도록 조용하곤했다. 오랜시간동안 베토벤만의 음악이라 여겼던 현악사중주를 작곡하는 것을 망설였으나, 결국 생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죽음이 다가와서야 비로소 그는 베토벤 곁에 설수 있는 용기를 얻은 셈이다.
4. 포레를 조사하며...
여러 음악가들의 생애를 살피다보면, 그들의 범상치 않은 면면들을 발견한다. 특출난 천재성, 예민한 감성, 고독과 자신의 내면세계로의 몰입, 그로 인한 세속에서 결핍되거나, 소외되기도 하고, 생전에는 인정을 못받기도 하고, 괴퍅한 성격이나 추문으로 주위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하기도 한다.
포레는 그에 비해 상당히 무난하고 부드러운 삶을 살았다. 포레는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내기도 했으나, 생상스라는 좋은 스승을 만나 영향력 있는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말년에는 파리음악원장으로 근무한 것을 보면 은근한 현실생활 내공, 정치력과 행정력을 짐작할 수 있다. 제자들의 회고 자료 등으로 비추어볼 때 그는 음악가로서, 음악행정가로서, 음악교육자로서 충실하였고 특별히 모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동료음악가와 제자, 청중들에게도 충분히 사랑받았으며 그의 죽음은 프랑스 국장으로 치뤄질만큼 당대에 충분히 인정받고 존경받았다.
음악적으로는 자신의 스타일은 완성하였으나, 형식적으로는 온건하고 보수적인 작곡가였다고 볼 수 있다. 동시대 작곡가인 드뷔시나 라벨처럼 모험적이지 않았고 생상스처럼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실내악 위주의 소규모 곡을 많이 작곡했다. 이번 주 참관한 한 회원의 감상은 포레의 음악을 들으면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하고 아늑한 집>이 떠오른다고 했다. 집에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나 음악에서 느껴지듯이 내향적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조용하고 따뜻한 그의 성향이 짐작 되는 듯하다.
말년에는 그는 여든 가까이 비교적 장수(?)하였는데, 그의 삶이 흘러감에 따라 변화해가는 그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내가 겪지 못한 세계에 대하여 이런저런 상상을 음미하는 시간이었다.
5. 함께 듣고 싶은 곡. "레퀴엠"
https://youtu.be/UnilUPXmipM - 36분 풀버젼
시간이 없다면...
https://youtu.be/8vVe_LMVia8 - 3분 4악장 자비로운 예수 소프라노독창부분
https://youtu.be/6-i1ESIRKdA - 4분 7악장 천국에서
기독교적인 환경이 없이 자라온 저에게 교회 음악은 신성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이국적이고 모종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레퀴엠이라는 장르는 더더욱 말이지요. 아무튼, 브람스 독일 레퀴엠에 이어, 포레의 작품 중에서는 워낙 레퀴엠이 두드러진 것이어서 대면을 하지않을 수가 없었는데요. 자료 조사를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레퀴엠은 원래 죽은 자를 위한 위령 미사에 사용되는 곡이라 합니다. 장례식에 가본 적이 많지는 않네요. 이번 기회가 아니었다면 레퀴엠을 적극적으로 들어볼 기회가 많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모든 상실 가운데. 죽음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상실이 아닐까 합니다. 아직 가까운 이의 직접적인 죽음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제 삶에도 크고 작은 상실감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어쩌면 제 살아온 시간만큼을요. 제가 떠나기도 하고 누군가를 떠나보내기도 하였답니다. 앞으로도 남은 생의 시간만큼이나 수많은 상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들이 너무도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며 생각해 봅니다. 언젠가는 최종적으로 맞이해야 할 죽음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나의 죽음 자체에는 그리 두렵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으나, 누군가가 나를 떠나는 두려움이 굉장히 컸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만 하겠습니다.
살아가며 매번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할 모든 상실들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묻게 됩니다. 무엇을 떠나보낼 때 그 과정을 적절히, 충분히 겪지 않으면 오히려 내면에 큰 상처로 남는 것 같습니다. 무심코 별일 아닌 척 가려두고 덮어버린 슬픔과 상실감은 한 구석에 남아 머리가 지끈지끈하도록 종종 괴롭히곤 합니다.
레퀴엠을 부르거나 곡을 하거나 염을 하거나. 어떤 형태로든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의식이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떠나보낼 때 충분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슬퍼하고 상실을 받아들이는 어떤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브람스의 독일레퀴엠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느낌이라면(순전히 가사를 올려주셔서 느끼게 된 건지만), 포레의 레퀴엠은 조금 더... <그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시도록> 라고 염원의 말 같습니다. 소프라노 독창과, 이어지는 투명한 합창으로 이어지는 음악의 절정에서 천상의 소리처럼 아름답게 마음을 어루만져줍니다. 저는 늘 인간의 번민과 고통에 마음이 끌리는 편이기는 하지만요.
한 회원이 사람의 죽음을 표현하는 또 다른 단어인 "돌아가시다"라는 말에 대해 최근에 생각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돌아가시다, 그 사람이 이 곳에 오기전에 처음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셨었다구요. 어쩌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처럼 우리가 어디로부턴가 와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결국은 그 돌아감을 슬퍼할 수 밖에 없겠지만, 삶이 허락하여 우리가 도중에 함께 만날 수 있었음에, 그 시간에 대하여 더 감사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한답니다.
정답은 없겠지요. 이 곡을 감상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다가올 상실(?!)에 대하여 촉촉~하게 그려보시고 여러분들만의 레퀴엠을 마음 속에 그려보셨으면 합니다. 후후후훗후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