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개업 Project ㅣ 신정훈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또 좋아하는 책이 헤르만헤쎄의 데미안입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인간 본연의 양면성을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말을 곧 잘하곤 합니다.
작가프로필 ㅣ 곽정빈
저는 3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 1년간 세계여행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두 눈을 황홀하게 채우는 수많은 풍경들보다도 여태껏 가져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대면해야 했던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채워 왔습니다. 글을 쓸 때 비로소나 나 스스로가 나 다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희미해져만 갔던 나의 자아가 글을 쓰면서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된 제 인생의 2막에서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글을 써나가고자 합니다.
[개업사]
꾸준한 글쓰기를 위한 글 감을 고민했다. 게다가 그 글이 매력적이기 위해서는 독창적인 나만의 컨텐츠여야만 했다. 그래서 다소 긴 시간 동안 그런 컨텐츠가 무엇일까 고민했지만, 원래 없던 것을 굳이 찾으려 노력하는 것은 허사라는 것만 깨달았다. 그래서 별수없이 꾸준함에 집중하기로 했다.
매일같이 내가 꾸준하게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니 답은 뻔했다. 먹는 것, 싸는 것, 자는 것.. 그보다 덜 자주 하는 것은 책 읽는 것, TV 보는 것, 잡 생각하는 것.. 그래서 그 뻔한 몇 가지 중에서 그냥 밥을 먹는 것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제대로 해야겠으니까 식당부터 오픈하기로 했다. 세상은 지르고 보는 법이다. 상호는 아직까지 미정이다.
사실 나와 상당히 비슷한 부류인 내가 꽤나 좋아하는 대학시절 동아리 선배 형이 제일 먼저 창업한 아이템이다. 그 식당이름은 [서초동 낙타식당]이다. 그 형은 갑자기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문득 먹는 것에 대해 써야겠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 그냥 꾸준히 하다보면 적어도 누구한테 요리 하나 정도는 해줄수 있게는 되겠다 싶어서 그냥 해보기로 한다.
[ 메뉴]
먹는 것에 대해 쓴다고 했지만 레시피를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친절한 식당이라 한들 레시피를 제공하지는 않는 법이다. 물론 어쩌다가 레시피를 공개할지도 모르지만 네이버에서 검색하는 편이 더 맛있을 테니 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메뉴는 당연하건대 주인 마음이다. 애초에 손님(독자)가 원하는 음식(글)을 받고 내오는 식당이 아니다. 손님이 먹기 싫으면 나가면 그만이다. 꽤나 불친절한 듯 보이지만 이런 컨셉의 식당도 요즈음에 많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더 많은 손님을 끌기 위한 고민은 할 것이다. 그래야 식당을 지속적으로 운영해나갈 동기가 될테니 말이다.
음식은 그저 글 감일 뿐이다. 재료를 사러 가는 길에 본 풍경에 대해 쓸지도, 그 음식과 관련된 경험에 대해 쓸지도, 밥을 먹다가 문득 든 상념에 대해 쓸지도, 같이 밥을 먹은 사람에 대해 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식당의 메뉴는 '그 날 먹다가 쓰는 글'이라는 말을 길게 풀어 얘기했다.
[영업시간]
2회 / 1달
지하 구내식당의 음식은 짜고 맵고 자극적이다. 담당 영양사는 균형 잡힌 영양섭취보다는 단기적인 대중의 선호도에 편승해서 조리를 하는 것이 틀림없다. 굳이 가요계에 비유를 하자면 10대 아이돌 그룹을 다달이 찍어내기에 급급한 대형 연예 기획사정도가 되려나... 강한 자극만큼이나 빠르게 변하는 유행과 또 그에 발맞춰 빠르게 소모되는 형태가 똑 닮았다.
입사 후 처음 두 달간은 괜찮았다. 아니 되려 내 입맛에 맞는다며 밥을 두 세 공기씩 퍼먹기까지 했다. 하지만 딱 두 달 동안만이었다. 메뉴는 매번 다양했지만 자극적인 음식에 서서히 길들여진 내 미각은 이제 더 이상의 맛의 차이를 구분해내지 못한다. 단 네 칸뿐인 화장실은 항상 밀어내기 한 판을 벌이고 있을 용무자들에게 각각 점거되어 문이 꼭꼭 닫혀있기 일쑤이고, 늘 같은 종류의 악취가 난다.
그래서 아주 적나라한 처방을 하기로 했다. 오늘의 메뉴는 채소찜이다.
근처 대형마트에서 숙주나물과 청경채 한 봉씩을 고른다. 푸석푸석한 채소만 씹어대긴 어지간히도 힘들겠다 싶어 애호박과 가지도 장바구니에 담는다. 마침 유통기한이 임박하여 30% 세일중인 송이버섯과 팽이버섯으로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기로 한다.
준비라고 할 것이 전혀 없다. 찜기에 물을 적당히 부어 불을 올린 다음, 재료들은 깨끗이 씻어 따로 준비해두고, 이윽고 증기가 올라와 뚜껑이 들썩이기 시작하면, 준비해두었던 채소를 모조리 찜기 속으로 집어넣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찜]
고온의 수증기로 요리하기 때문에 재료의 수분이 부존되어 식감이 살아있고 영양소의 파괴가 적다. 기름에 볶거나 튀기는 류의 요리와는 달리 재료의 변성을 일으키지 않아 재료 각각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수증기를 듬뿍 머금은 채소들이 찜기 위에 널브러져 있다. 마치 막 한증막에서 한껏 몸을 불리고 나온 엉덩이들 마냥 너나 할 것없이 포동포동한 살결을 자랑한다. 숙주나물을 한 젓갈 들어 입에 넣어본다. 청경채도 한 젓갈 들어 아삭아삭 씹어본다. 재료 본연의 맛이라... 숙주나물은 그저 숙주나물이고 청경채는 역시 청경채일 뿐이다.
재료 본연의 맛이라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내게 음식의 맛을 음미하면서 먹는 것은 정말이지 익숙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식탐이 많아서 음식을 유독 빠르게 먹었다. 그야말로 먹어 해치웠다는 표현이 더 그럴듯할 것이다. 허기를 빠르게 잊기 위해서 음식을 제대로 씹지 않고 목구멍으로 집어 넣었다. 당연하게도 강한 맛의 소스나 기름진 음식을 제외하고는 음식의 맛을 느낄 새가 없었다.
초중등학교 때는 도시락을 싸 들고 다녔다. 그리고 으레 어느 학교에서나 그렇듯 점심시간이면 서로간의 치열한 반찬 쟁탈전이 이루어졌는데 그 승부는 한 마디로 속도전이었다. 옆 짝의 동그랑땡을 빠르게 씹어 넘겨야지만 다시 다른 친구의 베이컨 소시지 말이를 입에 집어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대시절 역시 매한가지였다. 후임 때는 선임들의 잔반량을 수시로 체크하면서 밥을 먹느라 음식 맛을 느낄 새가 없었고, 중간 선임 때는 후임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느낄 겨를이 없었고, 말년에는 이미 그렇게 길들여진 습관 때문에 그저 밥을 빠르게 먹었다.
이전 직장에서는 파트 단위로 밥을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구성원 각자가 워낙 말주변도 없었거니와 이른 아침부터 정신 없이 업무에 치여야 했던 우리파트는, 점심시간이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서로가 별다른 말없이 식사를 했다. 머릿속으로는 저마다 다들 꼬일 대로 꼬여있는 업무들의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자연히 수저는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다가 불현듯 불편한 침묵을 느끼게 되면 그 어색한 기류를 어찌하지 못해 빠르게 수저를 놀렸다. 앞 사람이 숟가락을 빠르게 움직일수록 내 숟가락도 덩달아 빨라졌다.
그래서 밥은 같이 먹고 싶은 사람과 함께 먹어야 하는가 보다. 같이 오래 있고 싶기 때문에 천천히 먹어야 하고, 천천히 먹기 위해 말도 섞어가며 음식을 꼭꼭 씹어 넘겨야 한다. 하기야 같이 있고 싶은 사람과 밥을 먹는데 그보다 더 건강한 식사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어찌됐든 밥은 꼭꼭 씹어먹어야 건강해진다는 선조들의 옛 지혜는 결국엔 맞는 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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