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다 ㅣ 곽정빈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또 좋아하는 책이 헤르만헤쎄의 데미안입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인간 본연의 양면성을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말을 곧 잘하곤 합니다.
작가프로필 ㅣ 곽정빈
저는 3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 1년간 세계여행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두 눈을 황홀하게 채우는 수많은 풍경들보다도 여태껏 가져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대면해야 했던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채워 왔습니다. 글을 쓸 때 비로소나 나 스스로가 나 다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희미해져만 갔던 나의 자아가 글을 쓰면서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된 제 인생의 2막에서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글을 써나가고자 합니다.
어디서든 나의 긴 여행 이야기를 들으면 꼭 빠지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여행 중에 가장 맛있었던 음식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가장 기억에 남는 나라는 어느 곳이었냐는 질문과 수위를 다투는 것인데, 어찌 됐든 그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Sopa de Pollo [쏘빠 데 뽀요]
(Sopa는 Soup이고, de는 전치사, Pollo는 닭. 즉 치킨수프. 우리나라 식으로는 닭곰탕)
나는 페루 쿠스코에서 볼리비아 코파카바나로 20여 시간의 버스를 타고 이동해 그곳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그리고 다시 코파카바나에서 10여 시간의 버스를 타고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로 넘어와 있었고, 그곳 라파즈에서는 단 4시간만을 경유한 뒤에, 다시 20여 시간의 버스를 타고 수크레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날은 춥고 몸은 무거웠다. 라파즈는 해발이 4,000m라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현기증이 났다. 수백 킬로씩 이어지는 장시간의 이동으로 인해 허리와 목은 끊임없이 삐거덕거렸고, 집 없는 부랑자들이 여기저기 몸을 뉜 더럽고 냄새가 나는 버스터미널에서, 나는 혹시나 강도를 만날 새라 두 손으로 짐짝을 단단히 쥐어 매고는 하염없이 버스 출발 시각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꼼짝없이 부동자세로 있다 보니 속은 더부룩했고, 다시 슬리핑 버스에 20여 시간이나 몸을 뉠 생각을 하니 요기를 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새벽에 수크레 터미널에 내려 숙소까지 찾아갈 험난한 여정을 생각하니 뭐라도 먹어 두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터미널 깊숙이 자리한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수많은 메뉴가 눈을 어지럽혔다. 침침한 눈을 꿈뻑거리며 더듬더듬 눈에 들어오는 글자를 좇아 메뉴를 훑었다. 익숙한 글자 몇 개가 눈앞에서 정렬되더니 기어코 시선이 멈춘 메뉴가 바로 Sopa de Pollo였다.
Sopa de Pollo Por Pavor!!
카운터에서 바로 계산을 한 후에 식당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십여 분간 기다리니 기대도 하지 않았던 종업원이 직접 어떻게 내가 앉아있는 곳까지 귀신같이 찾아와서는 그릇 하나와 식기를 덩그러니 두고 간다.
물론 저렴한 가격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마주한 비주얼은 너무 초라했다. 기름이 뜬 노란 국물 위로 달걀 한 알과 살 몇 점이 둥둥 떠다닐 뿐이었고, 수저로 헤집어 보니 닭 다리 하나가 바닥에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 어차피 거북하게 먹어봐야 버스에서 배를 부여잡은 채 고통만 받을 것이었다. 차가운 수저를 들어 국물을 한 숟갈 퍼먹었다.
가히 세상에 없는 맛이었다. 적절한 염도의 진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벌컥벌컥 요란스레 넘어갔다. 몇 점 없는 살코기가 미끄덩거리며 입안을 감아 돌더니 기어코 정신이 혼미해진다. 아득하다. 다시금 허리를 곧추세우고 한 숟갈을 천천히 들어 삼킨 후에 눈을 감고 음미해본다. 꿀꺽하는 소리가 온 머리에 진동한다. 적당한 온도의 진한 국물이 메말랐던 목을 잔잔히 적셔온다. 한 숟갈. 또 한 숟갈. 쉼 없는 수저질에 국은 빠르게 수위를 낮추어 갔고, 어느새 나는 그릇 바닥에 구멍을 낼 듯이 마지막 한 숟갈까지 맹렬하게 내리 긁어 입속으로 마저 털어 넣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Sopa de Pollo는 내 여행 중 최고의 음식으로 등극했다. 이 여행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귀국할 것이었다. 더 찾아볼 것도 없었다.
마치 친엄마처럼 나를 챙겨주던 보스니아 크리스티나의 집밥이 아니라, 탄자니아 덩이네서 먹은 팔뚝만 한 랍스터구이가 아니라, 혹시나 내가 굶었을까 매 끼니를 챙겨주었던 이스라엘 나즈라, 아자르 부부의 음식이 아니라, 아르헨티나 삼촌네에서 여행 10개월 만에 처음 제대로 먹었던 한식도 아니라,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터미널 식당에서 먹은 이 한 그릇의 닭곰탕이 내겐 바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진미였던 것이다.
그 맛을 재현해 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깊은 국물 맛을 내어보겠다고 다진 마늘과 통무도 넣어 잔불에 오래도록 끓였고, 닭고기도 양껏 넣었다. 매콤함을 위해 페페로치노 홀을 넣고 잡내 제거를 위해 후추도 치고 양파와 파를 첨가해 식감도 살려 본다. 당연하건대 그때 그 맛이 나질 않는다.
퇴근 후 안락한 방, 가벼운 옷차림으로 편안한 의자에 앉아 먹는 닭곰탕이었다. 집 떠나온 지 9개월째, 춥고 졸리고 온몸은 부서질 듯 망신창이에다가 또 긴 여행을 목전에 둔 여행자가 반가이 맞이한 닭곰탕과 같을 수 없다.
그리고 어느덧 제자리로 돌아와 반복되는 루틴의 삶을 되찾고 다시금 안도의 숨을 내쉬며 현실에 안주하는 지금의 나는, 위태롭고 끊임없이 흔들렸지만 벅차고 생생한 살아있는 숨을 내쉬었던 그 때의 나와 같을리 없다.
가끔씩 닭곰탕을 해먹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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