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자몽빙수

ONE DAY ONE PAGE ㅣ 이정민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2-03 오후 2.30.52.png 대구아가씨
전 건망증이 심해서 병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전 10시반에서 11시까지 무엇을 했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물은 몇 잔을 마셨는지...흘러간 시간 속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감정들까지도 세세하게 기록하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이정민
직장인. 성격이 무척이나 쾌활한데 힘든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과장일지도 모름.



동호회에서 축하공연을 잘 끝냈다. 다들 직장인이지만 공연을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모여 연습을 했다. 연습이 끝나면 늦은 시간이라다음 날 출근 때문에 놀지 못한다. 그냥 가기 아쉬워 공연이 끝나면 뒤풀이를 하자며 서로를, 스스로를 위로했다. 공연을 마치고 모여 뒤풀이로 저녁을 먹고 카페에 갔다. 처음 가보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열 명 정도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저녁을 먹었던 식당에서 화장실을 가려고 했었는데, 모기가 많다고 해서 카페에 오자마자 화장실을 갔다. 화장실을 갔다 오니 사람들이 음료를 주문하고 있다. 직사각형 모서리 쪽에 짐을 두고 갔는데 사람들이 다 앉아버려 반대편 직사각형 짧은 변 쪽에 의자를 가지고 와 앉는다. 얼추 메뉴가 정해졌고, 메뉴판을 건네 받아 저녁에 먹어도 괜찮을 만한 커피 아닌 음료 중에 고민하다 과일 스무디는 왠지 과일을 사먹는 게 나을 것 같아 개중에 평소에 먹을 일 없을 것 같은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고른다.


곧 음료가 나왔고 여러 명이 주문을 하다 보니 빵도 몇 개 시키고 빙수도 몇 개 시킨 듯하다. 내 앞에 있는 빵을 칼로 자르는데 빵이 질겨서 안 썰린다. 옆에 계시던 분이 “얘는 빵을 찢네.”하며 웃으신다. 칼과 나이프를 그 분에게 건네준다. 앞에 다른 빵을 썰고 있던 언니가 “여기 빵 원래 질겨서 찢어야 되요”라고 말한다. 칼과 나이프를 넘겨 드렸으니 아까부터 유심히 보고 있었던 처음 보는 자몽빙수를 한입 가득 먹어본다. 자몽색 빙설 위에 자몽과육이 한쪽 귀퉁이로 원을 그리며 토핑 되어 있는데 자몽 과육 크기가 크다보니 한 수저 위에 빙수와 자몽 하나를 적절히 놓기가 힘들다. 빙수와 자몽 하나를 같은 비율로 떠 입에 넣는 건 더 힘들다. 빙수 높이에 자몽의 높이까지 더해져서 한 입에 넣으려면 새끼 제비가 어미 제비에게 내 입이 제일 크니 여기로 넣어달라고 하는 것처럼 입을 크게 벌려야 한다. 어차피 내 손이 내 입으로 숟가락을 넣겠지만, 여러 명이 같이 왔으니 자몽물이 입 주위에 줄줄 흐르는 꼴을 보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입을 크게 벌린다. 입 안에 넣고 나선 입을 그렇게 크게 벌리는 게 더 흉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몽 크기 때문에 자몽을 한 쪽으로 몰아서 반으로 자른 다음 양쪽 어금니로 보내 자몽향 얼음알갱이와 진짜 자몽과육을 같이 씹는다. 얼음이 사각사각, 자몽과육이 톡톡톡 씹힌다. 시원하고 달다.


자몽빙수를 먹다보니 아까 썰던 빵을 놓쳤다. 빙수는 녹기 전에, 빵은 따뜻할 때 먹어야 되는데 마음이 급하다. 심지어 이 빵은 생크림이랑 같이 나왔다. 생크림이랑 같이 찍어 먹어야 하는 빵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서둘러야 한다. 빵의 온기 때문에 생크림이 녹아 버리기 때문이다. 빵 조각 중에 하나를 골라 생크림을 야무지게 묻혀 먹는다. 빙수 먹으면서 차가웠던 입 안이 빠르게 빵의 온기로 덥혀진다. 치과에서 뜨거운 음식과 차가운 음식 번갈아 먹으면 치아에 안 좋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치아 걱정을 마무리 하기도 전에 마늘향에 생크림으로 촉촉한 빵을 먹다 보니 아까 그 상큼한 빙수가 또 땡긴다. 빙수까지 거리가 멀어 숟가락질이 힘들지만 같이 먹는 음식이니까 많이 헤집지 말고 집중해서 한 숟가락에 빙수와 자몽을 같이 담는다. 아까 먹었던 그 맛이다. 변함없이 달고 향긋하다. 세상에! 자몽과육이 토핑만 되어 있을 것 같았는데 토핑자몽의 크기는 아니지만 빙수 속에도 자몽이 들어 있다. 아까 메뉴판 볼 때 얼마인지 보진 않았지만 제 가격하는 빙수이다.


나처럼 빙수를 좋아하던 언니가 나를 보며 “너 니껀 손도 안 대고 빙수만 먹냐 ㅋㅋㅋㅋ”라고 했다. 응 이게 무슨 말이지 ? 알고 보니 빵은 같이 시킨 게 맞지만 빙수는 같이 갔던 사람 둘이 따로 시킨 거였다. 같이 있던 사람들 다 웃고 어떤 사람은 “너 안되겠네!” 어떤 사람은 “그렇지 공공재를 먼저 써야지” 라고 말했다. 직사각형 짧은 변에 앉아 열 명이랑 눈이 마주쳤다. 그 언니한테 “언니 그럼 제 프라푸치노라도 ...”라고 말했다. 언니는 “아니 나 그거 안 좋아해”라고 말했다. 아 나는 왜 이리 이기적인가. 눈치가 없는가. 무신경한가. 별도메뉴인 걸 알았다면 그렇게 허겁지겁 먹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먹어도 될지 확인은 했을 것이다. 나는 왜 몰랐는가. 나는 왜 아무 생각이 없는가.


왜 자몽빙수 생각은 나는가. 또 먹으러 가야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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