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구건조증 걸린 미소녀가 본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ㅣ 변효선
대학교 들어가서부터 뭔가 마음이 뒤틀릴 때마다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비판하는 건조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야구에도 같이 빠지기 시작했는데, 뭔가 정치와 야구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같은 사안을 보고서도 같은 편이냐, 아니냐에 따라 시선이 확연히 달라진다. 수비방해냐, 진루방해냐를 두고 전혀 의미 없는 싸움을 시작한다. 그것도 목숨 걸고. 연고지에 따라 팀이 갈린다는 측면도 많이 닮아있다.
작가 프로필 ㅣ 변효선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정치에 관심이 많아 정치부 기자를 하고싶다.
예로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곁에 항상 있었던 것은 바로 문화다. 여가와 놀이를 기반으로 한 문화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곁을 떠난 적이 없다. 고대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그러했고, 그리스 시대의 희곡이 그러했고, 조선의 남사당패가 그러했다. 현재 들어서 더욱 다양화된 영화, 드라마, 연극, 만화, 음악, 게임 등등의 문화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이렇게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했던 문화산업이 신(新) 성장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현대사회가 지식 및 정보 사회에서 창조 경제가 기반이 된 사회로 변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이후 세계는 산업 중심의 사회에서 지식과 정보 중심의 사회로,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이는 다시 창조 및 창의력 중심의 사회로 변화했다. 이러한 사회 흐름 속에서 인간의 창조 능력과 상상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문화산업이 부흥하리라 예측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실제로 최근 국가 수출의 대부분이 K-Pop이나 게임 산업이 주축을 이루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한국 콘텐츠진흥원의 작년 발표 자료를 보면, 2013년 게임 산업의 수출액은 27억 1500여만 달러로 약 2조 원에 이르고 K-POP의 수출액은 2억 7천여 달러(약 2900억 원)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 문화산업의 부흥은 더욱 더 커져가고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미래는 여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여가의 중요성이 커진다는 이야기다. 여가와 문화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점을 감안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여가의 중요성은 커질 것이고 이에 비례해 문화산업 또한 부흥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문화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한국사회에 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은 자본 독점 구조다. 영화산업만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흥행 작은 대기업이 투자와 배급을 맡은 작품들이다. 이는 당연한 결과다. CJ E&M이나 롯데 엔터테인먼트가 배급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고, 상영시장에서도 전체 극장의 8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국내 거대 배급사 작품이 스크린을 과다 독점현상은 대중이 소비할 수 있는 환경에서부터 차이가 벌어지게 만들어 중소기업 배급사 영화들이 결국 제대로 된 경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든다. 음악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가요 현장에서는 SM엔터테인먼트나 JYP 등으로 대표되는 대형 기획사들에 의한 대중음악 장악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돌 위주의 댄스음악 쏠림현상이 벌어지면서 더 이상 TV에서 록, 발라드, 힙합 등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산업의 거대 자본 독점 구조는 문화의 생명인 다양성을 말살시키며 결국 문화산업의 쇠퇴를 야기할 것이다.
문화에 있어 다양성이 필수적인 요소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자명한 논제일수록, 이를 논증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안다. 지구 생태계 자연의 진화가 생물의 다양성의 증가에서 왔던 것처럼, 문화의 진보도 결국 다양성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보다 최근 들어 문화의 다양성이 더욱 중요해진 이유들은 따로 있다. 문화를 향유하는 소비층의 요구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소비자들은 산업사회처럼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의 몰개성적인 경제활동을 원하지 않는다. 요즘은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확고한 취향을 가진 '소수 취향의 소비자'들이 늘었다. 대기업 브랜드보다 개인 브랜드에 열광하는 킨포크 열풍이 대표적인 예다. 또한 타국과의 경제적 교류가 많아지면서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소비자로 받아들여 만족시켜야 한다는 사실은 문화산업의 다양성 확보에 더욱 더 경종을 울린다. 물론 이런 글을 보고 문화산업을 너무 경제적 측면에서만 분석한 것이 아니냐고 반론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 문화를 돈으로 환산하는 일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문화적 다양성이 곧 돈이 된다는 것 만큼, 문화적 다양성의 중요성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논증할 방법이 또 있을까.
서울의 한 조그만 극장에는 작은 플랜카드가 걸려있다. “예술은 가난을 구제할 순 없지만 위로할 수는 있습니다.” 틀렸다. 요즘은 예술도 돈이 되는 시대다. 예술과 문화가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시대가 드디어 도래했다. 그러나 예술로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자본 독식구조와 기울어진 운동장을 해결해야만 한다. 지금같이 거대 자본이 문화산업을 잠식하고, 다양성을 훼손한다면 문화는 가난을 구제할 수 없을뿐더러, 위로할 수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