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안아주세요' ㅣ 화이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캔디님 친구분이시라죠? 반갑습니다. 저는 새벽별이라고 합니다."
약간 큰 키에 옅은 분홍색 줄무늬 셔츠를 입고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남자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톤을 가진 그의 손은 걷어올린 셔츠 소매 아래 드러난 근육 때문인지 체구에 비해 작은 듯 느껴졌다.
"네? 아 저..."
말꼬리를 흐리는 희선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미영이 끼어들었다.
"이 분이 오늘 수업 품앗이 강사님이야. 여기 동호회에서는 유명한 분이다. 너 운 좋은 거야. 이 분 수업 자주 안 한다고. 새별 오빠, 저도 청강하면 안 될까요?"
"하하 캔디 레벨이 무슨 청강이야. 친구는 잘 챙겨줄 테니까 걱정 마. 그런데, 닉네임은 뭘로 정하셨어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뜬금없이 자기를 향한 질문에 희선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닉네임... 이라뇨?"
"아, 내가 얘기 안 해줬구나. 여기 동호회에서는 자기 이름 안 쓰고 다 닉네임으로 부르고 있어. 너도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 정해봐."
"그럼 네 닉네임이 캔디인 거야?"
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선은 작게 풋 하고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치하게 캔디가 뭐니? 어릴 때 눈물 흘리며 읽던 만화책이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새벽별이라는 닉네임도 웃기네...
"지금 당장 생각이 안 나면 천천히 정해도 돼요. 금방 수업 시작할 거니까 준비하시구요."
분홍 셔츠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다른 사람들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닉네임이라.... 뭐가 좋을까? 땅고는 남미 춤이니까 카르멘? 너무 통속적인가?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어떤 닉네임들을 쓰고 있지?
희선은 그제서야 수업이 곧 시작될 장소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서교동 골목 안쪽의 5층짜리 건물 지하에 위치한 그곳은 "땅고 빠라도스" 라는 동호회의 연습실이었는데, 지하 특유의 쾌쾌한 냄새가 살짝 나기는 했지만 그렇게 거슬릴 정도는 아닐만큼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크림색과 옅은 하늘색 페인트로 칠한 벽에는 동호회 사람들의 단체사진들이 걸려있었고, 한쪽 벽 전체에 거울이 붙어 있었다. 거울이 있는 반대편 벽으로 긴 스툴 같은 의자가 놓여져 있었고, 가방을 넣을 수 있는 선반이 벽에 세워져 있었다. 파란색 커튼이 쳐져 있는 곳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니 춤을 추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는 곳인 듯했다. 들어오는 입구 옆으로 신발장이 있어서 외부 신발을 벗고 들어와야 했다. 입구 옆 벽에는 이름표가 줄줄이 엮여 잔뜩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마도 동호회에서 사용하는 사람들의 닉네임이라 추정되는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로커, 아멜리아, 파랑 하늘, 덩더쿵, 하모니, 써니, 제임스, 밀러, 고구마라떼, 클라라 등등... 닉네임들은 각양각색이었고 법칙 따위는 없었다. 저기 아리랑이라는 이름도 있네. 희선은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그래도 한번 정하면 계속 그 이름으로 불리워질텐데,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기는 싫었다. 아무래도 이름 같은 닉네임이 좋을 거 같은데 마땅한 이름이 생각이 안 났다. 뭐 어때,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고 했잖아.
"자,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모이세요."
미영은 희선에게 어서 가 보라는 눈짓을 했다. 손으로 전화하라는 사인을 보내고 그녀는 연습실 밖으로 나갔다. 희선은 살짝 어색함을 느끼면서 수업을 받으러 온 다른 무리들과 함께 홀에 빙 둘러서 섰다. 이번 기수에 수업을 받기 위해 모인 이들은 30여 명 정도다. 얼핏 보니 남자보다 여자가 살짝 더 많은 것 같다. 홀 중앙에는 아까 인사를 나눈 분홍 셔츠의 남자와 단발머리에 체구가 자그마한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룹을 둘러보고 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땅고 빠라도스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저희는 4주 동안 수업을 맡은 새벽별과 젤소미나입니다."
저 사람들이 앞으로 한 달 동안 내 수업을 책임질 선생님들이구나. 드디어 이제 시작하는 거야, 그 땅고라는 춤을 드디어 배워 보는 거야. 희선은 살짝 긴장이 되었다.
"남녀 짝지어 주시고, 이렇게 서로 팔을 잡고 마주 보고 서 주세요."
머뭇거리고 있던 희선 앞에 낯선 남자가 와서 섰다. 얼굴이 둥글고 턱이 다부지게 생긴 남자였다. 고집이 좀 있겠네 하고 희선은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 보고 서니 어쩐지 쑥스러워서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강사가 마주 보고 서서 걸으라고 한다. 이렇게 걸으라니, 뒤로 걸으란 말이야? 태어나서 뒤로 걸어보는 건 처음인데 이토록 내 다리가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다. 남자가 자꾸 내 발을 밟고 얼굴이 빨개져서 멈춰 선다. 그러면 한참 동안 주춤거리다가 다시 강사의 재촉을 받고 걷기 시작하면 또 밟고 멈춰 선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걷는 게 걷는 게 아니고, 어기적거리면서 발을 밟고 밟히는 게 우리가 하고 있는 전부다.
"서로 마주 봐야 해요. 눈은 상대방의 상체를 보세요."
내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걸 들켰나 보다. 그러니까 상체를 보란 말이지. 설마 이 남자 시선이 내 가슴을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뭐, 가슴이 파인 옷을 입은 것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이 남자 셔츠는 좀 깔끔하니 괜찮네. 살짝 짙은 회색에 이렇게 흰색으로 무늬가 있으니까 깔끔해 보이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게 비싼 셔츠 같은데, 근데 셔츠 앞자락에 김칫국물이 묻었네. 하필이면 흰색 무늬 있는데 묻어서 눈에 딱 띌게 뭐람. 물수건으로라도 닦았으면 금방 지워질 텐데, 남자라 신경을 안 써서 그런가? 어쩐지 얼룩을 보자 낯선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나 호감이 뚝 떨어져 김이 새 버렸다. 아얏! 또 밟혔다.
"파트너 바꾸세요."
이번엔 안경을 쓴 키 큰 남자가 앞에 섰다. 아까 남자보다 더 휘청거린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남자가 휘청거리면서 걸으니까 나도 덩달아 휘청거리게 되면서 더 힘들어졌다. 아, 내가 왜 여기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지, 하긴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댔으니까. 게다가 뒤로 걷는 게 어디에 좋다고 들은 것 같은데 뭐였더라? 맞다, 오래 무릎 꿇고 앉아있어서 발이 저릴 때 뒤로 걸으면 빨리 풀린다고 누군가 말했던 게 기억났다. 건강에도 좋다고 했지, 아마? 사람은 앞으로만 걸으니까 몸의 균형을 위해서 가끔 뒤로 걷는 게 좋다고 말이다. 그럼 나는 지금 계속 뒤로 걸으니까 최소한 아주 건강해지겠네. 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뒤로 걷는 게 아니라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는 거였던가?
파트너를 또 바꿨다. 이번엔 나이가 중년으로 보이는 호리호리한 아저씨인데, 걸음이 시원시원하고 자세도 좋은 걸 보니 처음 배우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은근히 밀어주어서 걷기가 너무 쉽고 편했다. 아, 남자가 잘 하면 여자가 하기가 쉬워지는구나. 이제는 한 방향으로만 걷는 게 아니라 앞뒤 양옆으로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어쩐지 몸이 저절로 걸어지는 느낌이 들어 희선은 눈을 감았다. 마치 커다란 발 위에 올라타고 걷고 있는 것 같다. 항공모함처럼 커다란 아빠의 발. 아빠가 성큼성큼 걸으니 내 몸이 구름 위에 뜬 것처럼 기우뚱기우뚱거린다. 나는 그게 재미있어서 까르르 웃는다. 희선은 갑자기 눈을 떴다. 아니 잠깐, 내가 어렸을 때 진짜 아빠 발 위에서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던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상상한 게 아니고? 아니면 내 동생에게 해 주는 걸 봤던 건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희선의 기억 속의 아빠는 절대 그녀에게 자상한 분이 아니었다. 늘 엄하게 야단치고 매질을 하던, 엄마가 항상 아빠와 싸우면서 얻어맞는 모습을 보고 아빠에 대한 미움과 경멸을 가슴속에 품고 자라온 그녀였다. 한 번은 고등학교 때였던가, 학원을 안 가는 날이어서 저녁을 먹고 방 안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공부를 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스탠드 하나만의 어스름한 조명을 빌어 숨겨놓았던 만화책을 참고서 사이에 끼어 몰래 읽고 있던 참이었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라 만화책을 감춘다는 게 방문 앞에서 희선을 노려보던 아빠에게 제대로 들키는 꼴이 되고 말았다. 공부하랬더니 만화책이나 보고 있다고 버럭 소리를 지른 아빠는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만화책을 뺏어 내동댕이치고 희선의 뺨을 때렸다. 그 힘에 내동댕이 쳐진 희선은 그대로 머리를 벽에 꽝 부딪혔는데, 부딪힌 머리를 누르고 있던 손을 떼자 손바닥에 피가 묻어 나왔다. 머리에 꽂고 있던 머리핀 때문에 상처가 난 것이다. 그때 아빠는 내 머리에서 피가 나는걸 못 보셨던 걸까. 아니면 보고도 상관 안 하고 그냥 나가 버리셨던 걸까. 그때 나는 아빠한테 야단맞아서 속상했던걸까, 아니면 피가 날만큼 다쳐도 신경도 안 쓰는 아빠가 야속해서 슬펐던 걸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작 머리핀에 상처가 났던 거야, 피가 많이 난 것도 아니어서 티슈로 누르고 있으니 곧 멎었던 가벼운 사고였는데 갑자기 왜 이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희선은 앞에 있는 남자의 빨간 넥타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기억을 털어버리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아빠 발등을 밟고 걸음마를 하는 게 이런 기분일 거야. 내가 걷는 게 아닌데 저절로 걸어지는 느낌...'
희선은 왠지 그 느낌이 아주 좋았다. 아마도 사실은 더 어렸을 때, 지금은 기억조차 안 날 만큼 어렸을 때의 아빠는 희선을 발 위에 올리고 걸음마를 같이 해주던 자상한 아빠였다고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