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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공기 Dec 14. 2017

그럴 수도 있지

이달의 키워드 <습관> ㅣ 신정훈

호주 멜번의 청소부
저는 글을 막 씁니다. 브레인스토밍하듯 손가락 가는대로 놔두는 식입니다. 


작가 프로필 ㅣ 신정훈 

현상을 쿨하게 응시하고 그것에 담긴 의미를 즉흥적인 글쓰기 과정으로 풀어내려 한다. 




어머니가 떠나고 습관이 생겼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습관이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말한다. '그럴 수 있지.' 모든 의외를 가정한다. 내일 당장 죽을 수 있다. 아니, 몇 분 뒤에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맞고 죽을 수 있다. 뉴스를 보며 비명횡사 사례를 접한다. 저렇게도 죽을 수 있구나... 다시 한 번 사고의 틀이 벌어진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여러 매체를 통해 대리 경험한다. 

몇 달 전에 멜번에 큰 사고가 있었다. 정신 나간 사람이 차를 몰고 시티에서 폭주했다. 결국 그의 차는 트램을 기다리는 한 무리의 사람을 덮쳤다. 수 십 명의 무고한 이들이 죽었다. 그 결과 시티 내 안전 문제가 대두되고, 도보에 흉물스러운 바리케이드가 들어섰다. 당시 나는 사고 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H&M 앞 트램 스톱이 비극의 장소였는데, 그날 쇼핑할까 고민하다 귀찮아서 카페에 남았다. 죽음의 경계에 있었던 셈이다. 내게 가장 큰 사건은 나의 죽음이다. 만수무강하고 싶지만 보고 들은 게 있어 그게 참 어렵단 걸 깨달았다. 주변인이 죽고, 요단강 입구 지나칠 때 말했다. 어떤 일도 일어나는 곳이다. 바꿀 수 없으면 겸허히 받아들이자. 

올해 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지켜보며, 죽음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단 사실을 실감했다. 우리 가족은 안 죽을 줄 알았다. 억지로 그린 장면은 90 넘어 호상 소리 들으며 편하게 가는 것이었다. 뇌종양 말기, 전신마비, 산소 호흡기란 단어는 드라마나 뉴스에서만 접하는 말이었다. 죽어가는 사람 목에 구멍 뚫어 석션 넣고 가래 빼는 일을 내가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생명이 꺼져가는 과정을 몇 달에 걸쳐 지켜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는 없다. 모두 변한다. 

나는 세상사에 초연한 편이다.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넓지 않던 감정 폭이 더 좁아졌다. 욕 실컷 먹겠지만, 세월호 사건은 내게 큰 충격을 주지 못 했다. 매일 누군가의 죽음이 들려오는 세상에서 학생들의 죽음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다. 희생자가 우리나라 사람이고, 어린 학생들이란 사실이 큰 차이를 만들지 않았다. 물론 타인의 슬픔에 부정하거나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냥 내 삶을 사는 것뿐이었다. 세월호 사건이 화제에 오르면 참사에 원인이 된 사람들을 벌하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고 이성적으로 말했다. 사이코패스냐고, 어떻게 그렇게 이성적이냐고 상대가 다그치면, 세상에 절대는 없다고 속으로 말했다. 

나는 작은 사업을 하고 있다. 여러 고객이 있는데, 고객마다 지불하는 금액이 다르다. 큰 돈을 주는 고객이 더 소중하다. 그들에게 각별히 신경 쓴다. 최근에 가장 큰 돈을 지불하는 고객이 우리 팀의 서비스를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재정 문제라고 했다. 안타까웠지만 우리 팀은 할 만큼 했다. 그녀의 문자를 받고서도 그럴 수 있다고 말했다. 당장 큰 손해를 입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담을 수 없다는 걸 안다. 

같이 사는 형이 한국에 돌아가게 됐다. 30대 후반이고, 호주에서 대학을 나왔다. 전공을 한국에서 써먹을 수 있는지 확신이 없어서 막막하다고 말했다. 영어 점수가 있었으면 영주권을 받아 평생 호주에서 살 수 있었을 터였다. 1년을 준비했지만, 끝내 점수를 따지 못 했다. 결국 호주에서 일궈 놓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귀국해야 한다. 돌아가면 호주 회사에서 벌던 돈의 절반도 못 벌 확률이 높다. 그를 보며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 할 만큼 했으나 결국 결과를 못 냈다. 더 이상 방법이 없으면 가는 수밖에 없다. 

일의 특성상 단순 반복 작업이 많다. 자연히 잡생각이 많아진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 산재로 식물인간이 된다든지, 사지 중 하나가 잘리든지, 비자에 문제가 생겨 한국에 간다든지, 주식시장이 붕괴해서 보유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는 등의 상상이다. 가정의 끝엔 같은 독백이 있다. '그럴 수 있지. 내가 바꿀 수 없는 일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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