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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공기 Apr 01. 2018

역대 최강 숙취

술시에 만나요 ㅣ 윤성권

재생에너지 연구원
책상 앞에서가 아닌 사람들 속에서 좀 더 현실적이고 모두가 쉽게 접근 가능하고 실현 가능한 재생에너지 정책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 프로필ㅣ 윤성권
평소에 꿈을 디테일하게 꾼다. 그것을 각색해서 쓰면 재밌겠다고 생각함



여기는 일본 하네다 공항이다. 지금 시각은 저녁 8시. 곧 한국행 비행기가 출발하는 데 나는 아직 숙취로 사경을 헤매고 있다. 오늘만 대체 몇 번을 토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속이 좋지 않아도, 점심 이후면 괜찮았었는데, 내 몸에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조금 전에도 속이 좋지 않아서 화장실에 갔다. 오늘 먹은 것을 모두 게워냈기 때문에 내 몸에는 더는 배출할 것이 없다. 오히려 토사물이 있으면 덜 고통스러울 텐데 그것조차 없기 때문에 더더욱 고통스럽다. 속은 이제 쓰린 걸 넘어서 타는 것 같은 느낌이고, 배도 더부룩하고 너무 아프다. 진짜로 장이 뒤틀렸나 보다. 어제 저녁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참 좋았었는데.


짧지만 긴박한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다. 저녁 식사 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룸메이트와 편의점에 가서 작은 사케와 오뎅을 사 왔다. 병이 작아서 1~2잔 나누다 보니 금방 마셔버렸다. 아쉽지만 저녁 먹으러 가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분위기 좋은 선술집에 가서 맛있어 보이는 안주를 이것저것 시키고, 따뜻한 사케를 주문했다. 사케 잔은 작아서 홀짝홀짝 마시기가 참 좋았다. 홀짝홀짝 마시며 따뜻한 것과 차가운 것 중 무엇이 더 나은지 열띤 토론을 펼쳤다. 도꾸리를 3개 정도 마셨을 무렵에 다른 일행이 왔다. 다시 안주를 시키고, 사케를 마셨다.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기에 메뉴에 있는 사진을 보고 안주를 주문했다. 간혹 동남아 음식 중에 생긴 모습과 다른 맛을 내는 음식들이 있는데, 여긴 정직하다. 충분히 예상되는 맛이라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적당히 취하니 시끌벅적한 선술집도 평화롭게 보였다. 한국은 날씨가 엄청 추운데, 도쿄는 선선했다. 따뜻한 겨울 저녁을 그냥 보내기 아까워서 2차(나는 3차)를 갔다. 2차도 사람들로 붐비는 선술집이다. 일본 선술집은 술과 안주가 맛있고, 분위기가 일품이다. 여기서 큰 사케를 시켰는데, 종업원이 얼음을 갖다 주었다. 사케에 얼음을 넣나? 알고 보니 사케가 아니라 일본 소주였다. 일본 소주는 도수가 높기 때문에 온더락으로 마시기도 한단다. 타코 와사비와 꼬치구이를 안주로 주문했다. 타코와사비는 코가 뻥 뚫릴 정도로 고추냉이를 듬뿍 넣는 걸 좋아한다. 그럴 때마다 입맛이 살아나는 것 같다. 입맛이 살아나서 술을 더 마신 것 같다. 하지만 내일 사경을 헤맬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했더라면 여기서 멈추었어야 했다.


예전에 글 중에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중간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고 했다. 지금 나는 술이 술을 마시고 있다.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선술집을 나와서 숙소로 향했다. 또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서 숙소 앞 편의점에서 큰 사케를 샀다. 그냥 큰 정도가 아니라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청주 크기였다. 좁지만 아담한 숙소에 둘러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사케를 마시기 시작했다. 내일 비행기를 타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예측을 했더라면 여기서라도 멈추었어야 했다. 이미 선을 넘었다. 이제는 술이 사람을 마시고 있다. 아마도 사케라는 바이러스가 내 몸속으로 들어오고 싶어 안달 난 모양이다. 내 몸속으로 들어와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잠시 기분 좋게 해주다가 이후에는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려고 하나 보다. 그렇게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때까지는 전초전이었던 모양이다. 첫 번째 신호가 감지되었다. 사실 이때가 제일 중요하다. 인터넷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구토가 나오려 할 때 가능하면 어떻게든 참아야 한다고 했다. 구토하는 것은 구토에 관련된 중추가 자극을 받아서 생기는데 몸은 이 자극을 기억하기 때문에 연속해서 구토를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좀처럼 참기가 어려웠고, 결국 첫 스타트를 끊었다. 이후 계속해서 화장실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잠을 자면 괜찮을 텐데,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맑은 공기를 쐬면 좀 나아질까 해서 공원으로 산책하러 갔다. 그나마 걷거나 움직일 때는 괜찮았는데 앉아서 쉬면 또다시 구토가 자극되었다. 숙소에 들어와서 다시 누웠다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반복했다. 내 몸은 이 자극에 완전히 중독되어서 약한 냄새라도 맡아지면 바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오늘 쇼핑도 하고, 관광도 한 뒤 저녁에 한국에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 상태로 공항에 갈 수는 있을까. 지하철에서 구토증세가 나오면 어떡하지. 동료들은 검은 비닐봉지를 귀에 달고 가는 것이 좋지 않겠냐면서 놀린다. 어렸을 때 자동차 멀미를 심하게 해서 정말로 비닐봉지를 귀에 달고 버스를 탄 적이 있었는데 진짜로 그렇게 해야 할 지 심란하다.


어렵게 비행기에 탑승했다. 아직도 속은 진정되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나에게 최면을 걸어보았다. 내 몸 구석구석에 명령을 내려, 모두에게 잠시 휴가를 주는 마음으로 말이다. 승무원들이 분주한 걸 보니 곧 기내식을 주는 것 같다. 평소 같았으면 없어서 못 먹던 기내식도 오늘은 깔끔하게 거절한다. 대신 따뜻한 녹차를 마셨다. 속이 진정되는 느낌이다. 녹차 때문에 진정이 된 건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서 진정이 된 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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