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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공기 Apr 01. 2018

유겐트슈틸

수요미학회 ㅣ 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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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프로필 ㅣ 해원

현재 요가원에서 일하면서 요가를 배우고 있고, 주말에는 종종 커피숍에서 일하고 있어요.  

요가로 신체를 단련하고, 글쓰기를 통해 정신을 단련해서 초인이 되고자 합니다. (...)  

필살기는 음... '머뭇거림...'입니다. -_-




1. 유겐트슈틸 Jugendstil



  아르누보(뉴 아트)가 프랑스-벨기에 불어권 유럽을 중심으로 펼쳐진 양식이라면, 유겐트슈틸은 독일에서 펼쳐진 아르누보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유겐트슈틸은 유겐트- 청춘, 슈틸 - 양식 즉 청춘의 양식, 젊음의 양식이라고 번역된다. 이 명칭은 1896년부터 뮌헨에서 발행되고 있던 미술 잡지 《유겐트Jugend》(청춘)에서 유래했다.  




당시 발행된 잡지 표지들. 




  유겐트스틸은 초반의 식물넝쿨이나 새, 꽃봉오리 등의 파도처럼 출렁이는 듯한 곡선을 주로 사용했다. 이는 미술공예운동의 윌리엄모리스와 존 러스킨의 영향을 받았다. 또  저명한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자연의 예술적 형상들> 출판하면서 유겐스슈틸에 깊이 영향을 미쳤다. 헤켈은 자연의 진화과정이 유기체들이 환경과 상호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아름답게 색색의 석판화들로 이뤄진 그의 책은 육지동물, 곤충, 해양생물, 화석, 식물등을 세부적으로 그려서 당대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에른스트헤켈의 자연의 예술의 형상들 



  유겐트슈틸은 프랑스와 벨기에의 아르누보 운동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인 목표를 추구했다. 장식예술 관련 제작행태를 개선하고, 더 단순하고 덜 상업적인 생활방식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범신론적으로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세계의 원리, 진화론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 교재에 나오는 유겐트슈틸 키워드를 중심으로 작품을 좀 더 살펴보자. 




  1) 헤르만 오브리스트(1863~1927)


  스위스 출생으로 식물학과 역사를 전공하였다. 1892년에 플로렌스에서 자수공방을 설립하였다. 1895년에 뮌헨으로 이사하여  1897년에 뮌헨공방 연합회를 공동 창설하였다. 직물, 도자기, 조각품, 가구 등을 만들었다. 



다음은 오브리스트의 손자수 작품들이다. 









   2) 아우구스트 엔델(1871~1925)


  베를린 태생의 엔델은 튀빙겐에서 철학과 수학 등을 공부하고 후에 건축과 공예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뮌헨의 사진 스튜디오 <호프 아텔리어 엘비라>이다. 건물의 전면과 계단 부분이 특히 유명하다. 

  자연과 자연세계를 생동감 있게 재현하였다. 기이하고 추상화된 환상적인 생물 형태로, 유겐트슈틸의 선구자라는 찬사와 함께 <문어 로코코>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기괴한 유기주의의 감각과, 자연의 기초적인 힘에 대한 엔델의 생각이 드러난다. 


  다음은 <엘비라>의 사진들. 








   이 벽면 부조에 대해 제레미 하워드는 “모든 게 다 있다. 유기적이고 환상적인 역동성이, 터키옥색과 진홍색 톤의 삐걱대는 꺾임이 있다.” 추상적이면서도 사실적이며, 그 생동감 속에서 공격적인 활기가 있다.“라고 높게 평가했다. 




3) 뮌헨 공예미술 통합공방. 


  오브리스트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함께 공예미술 통합공방을 공동 설립(1897)했다. 영국 미술공예운동의 장이조합에서 영감을 받아 설립된 이 공방은, 고품질 예술제작품의 제조, 판매, 전시도 하는 장식예술집단이었다. 교재에서 언급되는 판매한 제품 중 유명한 디자인 두 개를 소개한다. 


교재에 나온 음악실 설치작업 사진 좌측 하단에 있는 의자가 바로 



-

리하르트 루머슈미트의

음악실 의자



 - 브루노파울 - 황동촛대.



세련되고 우아하고 사려깊고 실용적인 디자인이면서 원초적 근대성을 보여주는 이 두 유명한 디자인은, 아르누보 양식을 보다 제약적이고 근대적으로 해석한 단순하고 간소화된 유기적 형태라고 평가된다. 





4) 잡지 <판>


유겐트슈틸은 189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에 이르러 독일전반에 대유행하게 되었다. 그 요인 중 하나는 <유겐트>라는 잡지와, 이와 유사한 1895년에 창간한 베를린 기반의 저널 <판>이라는 잡지를 통해 전파된 덕이 크다. <판> 제목은 그리스신화에서 비옥함과 열정을 상징하는 젊은 신에게 경의를 표한 것으로 이 신의 모습은 1895년부터 1900년까지 출판된 다섯 호 모두의 표지를 장식했다. pan은 그리스어로 <모두>란 뜻으로, 창립자들은 세계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를 모두 아우르는 포괄적 저널을 의도한 것으로 해석된다. <판>이 단기간 출판에 그치긴 했지만, 유겐트슈틸 그래픽디자인 및 활자디자인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쳤다. 국제적으로 도발적이었고, 기존예술 보수적 작업방식에 반대하였다.



<판> 잡지 





페터 베렌스의 <판>을 위해 만든 목판화. <키스>(1898)

두 연인이 서로 유동적으로 맞물린 채 키스하는 모습. 에로틱한 관능이 가장 잘 반영한 그래픽 작품일 것이다. 양성적인 연인이 등장하는 이미지는 힘차고 생생한 근대적 그래픽 표현하면서도, 구불구불한 색색의 붓질, 추상과 단순화를 향한 뉴아트의 경향도 드러난다. 



5) 다름슈타트 마틸다 언덕의 예술인 마을



  에렌스트 루트비히 대공이 예술과 산업의 상호협력 진흥을 위해 다름슈타트 마틸다 언덕에 예술인 마을을 세웠다.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부수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했다. 페테 베렌스 포함 7명 대표 디자이너 참여헀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저택 이라는 중앙 스튜디오 건물과 여덟채의 아티스트 주택군으로 구성된다. 페테 베렌스의 주택은 피터베렌스가 가구부터 음료잔에 이르기까지 실내의 모든 디자인이 디테일이 장소에 맞춰 설계되었다.

   1901년에 <독일예술의 기록>이라는 제1회 다름슈타트 예술인 마을 전시회가 열리고, 유겐트슈틸 예술인 주택과 아틀리에 장식을 선보였다. 전시회는 비평가 들에게 찬사를 받았지만, 상업적으로 성공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택, 아틀리에 등 기본적으로 후에 빈 공방 형성에 영감이 되었고, 제 1차 세계대전 전 독일 근대 디자인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피터베렌스의 주택. 





  프랑스 아르누보의 정교한 고급양식과는 반대로 유겐트슈틸은 수수하고 아늑한 매력을 주었다. 표준화된 가구품목들은 산업제작기법으로 생산할 수 있는 더욱 단순하고 기능적인 작품에 대한 독일 디자인 개혁가들의 열망도 있었다. 그러나 구조와 전반적인 디자인은 모두 여전히 고품질에 속하였다. 










2.  빈분리파와 빈 공방. 



  유럽의 전지역이 근대의 물결 속에서 파도치고 있을 때, 빈은 과거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이때 세기말 빈이라는 도시의 분위기는 문화예술사적으로 독특하다. 


   19세기말 빈은 650년에 가까운 함스부르크가의 통치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절정에 있었다. 귀족이 통치하던 제국에서, 새롭게 시민계급이 성장하면서 귀족들의 세력을 위협하고 있었다. 시민계급의 힘은 신흥공업, 상업을 통해 쌓은 부와 귀족 못지 않은 교양이었다. 시민계급은 점차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주도해갔다.


  주도자와 소비자가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시민이란 점에서 과거의 것들과 완전히 차별화되었다. 세기말 빈은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제국의 세퇴, 과거의 제국과 귀족 사회가 자기모순을 온전히 안고 있는 시기였다.


  세기말 빈은 끝까지 전통적인 체제를 갖고 있으면서, 그로 인해 변화하고자 예술가, 지식인들의 시도 역시 활발하게 일어난 곳 이었다. 미술, 음악, 건축, 철학 등 전반에 걸쳐 예술가들이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다방면에 걸친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웠다. 


당시 빈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람들은 

건축가 -  오토바그너,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아돌프 로스, 요제프 호프만

화가 -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쉴레, 오스카 코코슈카

작가 - 페터 알텐베르크, 아르투르 슈니츨러, 휴고 폰 호프만슈탈, 칼 크라우스, 슈테판 츠바이크

심리학자 프로이트,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 슈타인

작곡가 - 쇤베르크,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이 있었다 고한다. 




1) 빈 분리파 결성, 빈분리파의 건물 제체시온 


유럽에서 인구 200만, 손꼽히는 대도시, 예술가, 사상가... 지적인 활기가 오가는데 비해, 관료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면이 있었다. 1861년 설립된 <빈 미술가 연맹>에 대다수 미술가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유일한 전시공간을 독점적으로 갖고 있었는데, 공공기관의 지원을 얻고자 안이하고 정치적인 전시회만 조직하는 데 급급했다.

1897년 4월 3일,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오스트리아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공예가인 콜로만 모저,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인 요제프 호프만, 건축가 오토 바그너 등 예술가들은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예술을 지향하는 예술가협회와의 분리를 선언하고, 1898년 첫 전시회를 통해 빈 분리파의 등장을 알린다.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은 빈 분리파의 양식은 오히려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빈 분리파는 건축물에 수평선 띠와 둥근 형태를 적용하며 모던한 양식을 시도한 부류다.



빈 분리파가 결성된 해인 1898년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탈과거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빈분리파의 전당인 제체시온을 설계했다. 제체시온은 월계수잎을 형상화해서 덮은 금박 대형 구형 디자인이 유명하다. 돔형 천정도 아닌 구형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바로크나 역사주의 양식에 익숙한 빈 시민들에게 <황금 양배추>라는 조롱섞인 평가를 듣기도 했다.













출입구에는 분리파의 표어로서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그 예술의 자유를>

미술비평가 루트비히 헤베시의 말을 굵게 새긴 것이다.




제체시온의 열네번째 전시회


  이 건축물은 1902년 열네번째 전시회에 <베토벤 전시회>를 하면서 유명해진다. 이 전시는 공간 조각, 회화, 음악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분리파가 지향하는 총체예술작품의 이상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새로운 예술운동을 펼칠 분리파에게 그들을 대표할만한 상이 필요했다. 베토벤은 분리파 정신을 대표할 만한 상징적 인물이었다. 음악가이긴 했으나 시대에 항거하고, 새로운 예술 세계를 개척하는 베토벤 정신은 분리파가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조각가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 작품을 전시하며 분리파의 정신을 만천하에 천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 1902년 전시 당시







  클림트는 베토벤을 기리는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베토벤 심포니 9번을 듣고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는, 바로 베토벤 프리즈다. 벽 삼면을 채운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의 제 4악장 중 환희의 송가부분을 벽화로 표현했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빛이여, 오 세상에 입맞춤을 해주리라. 라는 유명한 실러의 가사와 음악을 형상화 했다. 




베토벤 프리즈 전시 - 3개의 벽면에 그림이 전시됨 


1902년 베토벤 프리즈 전시






세개의 벽면에 그려진 그림들


  


첫 부분은 ‘행복을 향한 동경’인데, 비상하기 시작하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가운데의 큰 부분은 모두 희고 연한 부드러운 색으로 비어있는데, 그 위로 여자처럼 보이는 인간들이 마치 물속에서 행복을 느끼듯이 부드럽게 비상한다기보다는 내가 보기에는 부유(浮遊)한다.


  두 번째 부분은 ‘약한 자의 고난’이다. 황금빛 갑옷과 큰 칼로 완전 무장을 한 기사가 서 있고 두 뒤에는 여인들이 있다. 기사의 앞에 허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한 남녀 커플이 무릎을 꿇고 그에게 애원하고 있다. 그 뒤에 또 한 명의 여인이 손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그 그림 뒤로는 역시 부유하는 사람들이 계속된다. 이 두 부분은 첫 번째 벽, 즉 방으로 들어가 왼편 벽의 그림이다.






  세 번째 부분은 정면의 벽에 그려져 있는데, ‘적대적인 힘’이다. 거인 티포에우스가 마치 고릴라 같은 무서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그 왼편으로는 그의 딸인 세 명의 고르곤이 있다. 고르곤 뒤로는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세 가지,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을 상징하는 형상들이 보인다. 거인의 오른편으로는 아주 역겨운 세 명의 여자들이 각기 독특한 모습과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각기 음탕, 음란, 방종을 뜻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아주 많은 여자의 머리카락과 뱀들이 보이는데, 가운데에 있는 마르고 슬퍼하는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보인다. 그 많은 머리카락과 뱀들은 인간이 가진 끊임없는 슬픔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벽, 즉 오른편의 벽으로 넘어간다. 네 번째는 그림에는 다시 처음과 같은 부유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한 여인은 리라를 타고 있다. 이것은 음악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가운데 벽의 상당 부분은 바탕색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으로 남겨져 있다. 여기서 클림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우리에게 무슨 생각을 하라고 여기는 비워놓은 것일까?..... 다음으로는 모두 기쁨에 겨워하는 다섯 명의 여인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녀들은 예술을 상징하는 것이다. 쉴러의 시에 화답하는 여인들을 나타낸 것이다. 시와 미술과 음악이 다 나왔다. 예술만이 인간에게 진정한 기쁨을 줄 수 있다는 클림트의 철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다섯 번째 부분이다. '세상을 향한 키스'로 해석된다. 보다 밝아지는 분위기로 바탕은 꽃이 만발한 풀밭이다. 먼저 그 위에서 많은 천사들이 합창을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 천사들 앞으로는 너무나 밝고 행복해 보이는 배경 중앙에 한 쌍의 남녀 커플이 꼭 껴안고 키스를 하고 있다. 남녀의 피부색이 다르다거나 여자가 남자의 어깨 속으로 쏙들어가 있다거나 하는 것들이 클림트의 다른 그림 <키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김영사, 박종호,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 에서 발췌함)






다시 제체시온 건물로 돌아와서... 



건물의 왼편 아래에는 <성스러운 봄>, 역사의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분리파의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서 잡지 제목이기도 하다.

자체저널인 <성스러운 봄>을 출판하였다.



콜로몬 로저가 디자인,1899



초기디자인 작업은 아르누보 양식의 유기적인 규범으로 이루어졌지만, 1900년 제 8회 빈 분리파 전시회 이후로는 점점 직선화되었다. 분리파의 방향 변화는 전시회에 설치작업으로 선보인 매킨토시의 기하학적 형태와 꿰뚫린 모티프에서 영향을 받았다.


<매킨토시의 작품들>















2. 푸커스도르프 요양원 - 요제프호프만 


매킨토시의 직선에 영향을 받은 새로운 양식은, 요제프 호프만이 푸커스도르프 요양원에 활용했다. 이 건물의 장소에 맞춰 콜로만 모저가 디자인한 실내 가구에도 반영되었다. 이 디자인은 추후 수십년간 근대운동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기하학적 추상을 예견하기도 했다.






















3. 빈공방


호프만과 모저는 1903년에 빈 공방을 설립하였다.

빈공방의 작업장들은 공기가 잘 통하고 빛으로 충만한 평균이상의 작업 조건을 갖추고, 작업자들은 연간 1~2주간 유급휴가를 누릴 수 있었다. 장인들은 자기가 생산한 작품에 디자이너와 나란히 이름의 머리글자를 새기는 방식으로 공로를 인정받았고, 공방조직은 이렇게 예술가와 장인간의 평등성을 높이겠다는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열망을 반영했다.

빈공방은 최상의 재료를 활용하고, 디자인 가격을 높일지언정 품질에 관해서는 타협의 거부했다. 제작의 질은 탁월하게 높였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매우 고급스러워서 대중보급이 가능한 실용적이고 민주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1905년에 이르러 빈공방은 빈분리파를 대신하여 오스트리아에서 대표적인 미술공예세력의 지위를 물려받게 되었고, 빈분리파는 내홍을 겪으며 호프만, 클림트, 모저와 같은 일부 구성원들이 집단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빈 공방의 디자인은 <독일 예술과 장식>, 영국의 <더 스튜디오>와 같은 당대 유수의 디자인 저널들에 정기적으로 실리면서 대중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또한 이 공방은 자체적으로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빈 공방이 1903년부터 1932년까지 200명이 넘는 디자이너들이 있었지만, 1914년까지는 직선적 형태와 고급재료의 사용이라는 하나의 미학적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4. 오토바그너


바그너는 빈 분리파 창립 핵심멤버이고 올브리히, 요제프의 스승이다.

바그너는 과거의 건축은 반복된 것일 뿐 개인의 창작에 저해된다고 보고 전통을 거부했다. 그는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재료는 새로운 건축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건축의 형태는 필요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기능주의적 사고를 보였다.

신고전주의적 기미가 보이긴 했으나 뉴아트스타일로 작업했다. 우체국 저축은행은 맞춤설계한 알루미늄 조명기구 등, 기능주의적 미학으로, “실용적이지 못하면 아름다울 수 없다.”는 그의 신조를 보여준다.

바그너는 “최대한의 편리성과 최대한의 깔끔함”을 지녀야 한다고 했으며, “이런 속성을 고려하지 않는 모든 실험은 무가치하다.” 라고 했다. 기능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접근.

아돌프 로스도 아르누보의 지나친 장식적 경향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아르누보는 처음으로 진정 근대적인 국제양식이었다. 비록 디자인 개혁을 위한 초기의제가 장식적스타일로 변형되긴 했으나, 역사/전통에서 탈피한 아르누보의 접근법은 확실히 미래지향적이었다. 과거 역사의 혼성 모방을 버린 아르누보 운동은 차세대 디자이너들에게 양식적인 부담을 덜어주고, 모더니즘을 추구할 자유를 허용하였다. 비록 수공예예술을 대량제작과 결합시키려던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근대 운동 디자이너들은 기계화를 활용하고 합리적인 디자인 접근법을 채택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고자료

디자인의역사

건축인문의집을짓다

독일가구디자인

빈에서는인생이아름다워진다

http://news.mt.co.kr/mtview.php?no=2014071517487179304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MKL8&fldid=YJap&datanum=208

https://blog.naver.com/de_sign/220079988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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