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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공기 Apr 01. 2018

시간의 거느림 속에서

공통주제 <눈> ㅣ 김혜연

간호사 
저의 키워드는 행복입니다.결국 모든 것이 이 길 위에 있더라구요.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사람도, 글과 음악, 인생의 목적과 같은 것들이 행복이라는 틀 안에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프로필ㅣ 김혜연 


피아노를 전공하고 이후 간호학을 공부하였음.

피아노 치는 간호사  

복지와 힐링에 관심이 많음



따뜻한 남쪽지방이었다. 도시에서 멀지 않은 외곽에 위치해 있었던 작은 시골마을. 크나큰 둥그나무가 서 있던 바로 그 곳. 우리 집은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 진 집이었다. 진흙과 돌로 이루어진 벽과 구들장이 있었던 전통가옥. 덕분에 겨울은 무척 뜨끈뜨끈한 아랫목에서 뒹굴 수 있었고, 여름엔 시원한 대청마루에 누워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뒤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뒷집에 살고계신 할머니네 앵두나무 가지가 넘어와 있어 가끔은 몰래 앵두를 따먹을 수 있었던 우리집. 나는 그런 우리 집이 참 좋았다.


마당도 넓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기와집 세 채가 디귿자로 서 있었는데 사랑채처럼 사용된 대문 가까이에 있는 집 한 채를 허물어버리고 넓은 마당을 만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까지는 돌다리를 만들어 놓았었고 대추나무, 감나무도 두 그루씩 서 있었기에 섭섭하지 않게 서 있을 수 있었다. 상추, 케일 같은 채소도 길러서 먹고, 채송화, 금잔화, 맨드라미 같은 꽃도 심어 마당은 겨울이 오기까지 참 예쁘고 화사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렇게 가득한 행복을 주었던 마당은 겨울이 되면 왠지 심심해보였다. 새벽이면 대나무 숲에서 지저귀던 참새들도 소리를 내지 않는것 같았고, 가라앉은 차가운 공기와 굴뚝으로 나오는 연기들만이 고요함을 깨는 기차의 경적소리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눈도 거의 내리지 않았다. 가끔 강원도 가까이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댁에라도 가면 볼 수 있었을까. 하지만 눈이 오는 바로 그 날 할머니댁에 가는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기에 항상 며칠 지나 흩어지는 눈 밖에 볼 수가 없었고, 그저 뽀드득거리며 밟히는 소리로 만족했어야 했다.


 그저 서리와 논밭의 얼음, 추운 바람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겨울의 모습이었다. 간간이 서 있는 키 큰 미루나무도 까치집만 보이는 허술한 계절, 수확이 한참 전에 끝나 벼의 밑동만 남은 논으로 공허한 공간, 그나마 거무스름한 녹색으로 남아있는 탱자나무조차 뾰족한 가시가 바람조차 막아주지 못해 밉살스레 보였던 우리마을의 겨울. 연날리기도 해보고 썰매구경도 했지만 눈 구경을 못하는것을 못내 아쉬워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동네에도 눈이 온단다. 정말 눈이 우리동네에도 온다고? 눈발이 잠깐 날리는것만 보아왔던 나는 기대감에 한껏 들뜨기 시작했다. 그날 밤부터 눈이 거짓말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땅에 닿자마자 눈이 사라져 버리는것 같아서 심통이 나려고 하는데 눈발도 굵어지고 조금씩 마당에 쌓이기 시작하는것 같다. 오호라~. '내일은 정말 우리집에서도 눈이 쌓인 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 그래도 아주 많이는 안쌓일지도 몰라' 하며 반신반의 하는 마음으로, 그렇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아침이 왔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창살 밖으로 비치는 빛이 왠지 온 세상이 하얘져 있을 듯한 느낌이었다. 엄마와 오빠와 나는 얼마나 왔을까 도란도란 얘기를 하다가 "하나, 둘, 셋!"을 외치며 문을 열었다. 열린 문으로 온 세상이 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함박눈은 펑펑 내리고 있었고, 마당도, 지붕도, 빨래줄 위에도 조용히 내린 눈이 쌓이고 쌓여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넓은 마당이 하얀 눈으로 가득 덮여 있는 모습이라니. 발자국조차 내고 싶지 않은 백지의 새 땅이었다.


오늘은 반드시 눈사람을 만들거야. 예쁘고 큰 눈사람. 아침을 먹고 밖으로 나가 조심스레 눈을 밟았다. 보드라운 눈이었다. 눈과 얼음이 섞여서 서걱거리지 않는, 뭉치면 바로 내 손의 체온에 살짝 녹으며 뭉쳐지는 그런 눈. 주먹만한 눈덩이를 요리조리 굴리며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커져가는 눈덩이가 그렇게 무거운지 처음 알았던 그 날. 우리 집 귀여운 강아지들은 눈이 와 좋은지 줄달음질을 치며 쫓아다녔고, 우리도 눈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할 기세로 온종일 눈과 함께 뒹굴었던것 같다. 밥을 먹었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딱 한번 그렇게 눈을 보았던 것과는 달리 서울로 올라온 후로는 제법 눈을 자주 본다. 그렇지만 내게 가장 소중한 기억을 남겨준 눈 오던 날은 바로 그 날이었다. 기대감과 설레임, 감격과 한껏 누림을 모두 주었던 비율 딱 맞게 양념된 맛깔스러웠던 하루.


 얼마 전에도 눈이 내렸다. 일을 하다가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면서 한껏 여유를 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내가 해야하는 일을 하러 들어가야했다. 퇴근을 하고 나왔을 땐 이미 눈도 그치고, 다 녹아버린 거리를 걸을 수 밖에 없어 아쉬웠던 날. 어른으로 살면서 어린아이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지 못해서가 아니라 손과 어깨에 주어진 일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신나고 즐겁게 마당과 골목을 뛰어다녔던 그 날을 떠올려보니 어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 때의 어른들도 못내 아쉬워하며 그 눈들을 떠나보내야 했을까. 멋진 하루를 보내는 우리를 보며 흐뭇한 자신의 어린날의 추억 또한 떠올렸겠지. 그래. 어린 아이들은 가장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사람들인것이지. 반면에 어른이 되어갈수록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거느리며 살아갈 수 있는것 같다. 그 거느림이 우리를 아이처럼 순수하게도 만들고, 추억하게도 하며, 책임을 지게 하고, 보다 나은 삶을 갈망하게 하는거라고. 그렇기에 과거를 지닌 어른의 현재는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으로 빛나진 않더라도 더욱 아름다울 수 있는거라고 말하고 싶다.


마당이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을 피우고, 온갖 식물로 가득했던 예쁜 우리집 마당이. 추운 겨울 문을 열었을 때 하얀 눈으로 가득 채워진 예쁜 우리집 마당이. 여전히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마당이 내 눈에 들어와 마음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순진함을 가지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나를 그 안으로 들여보내게 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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