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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공기 Apr 01. 2018

아르느보

수요미학회 ㅣ 곽정빈

연구원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또 좋아하는 책이 헤르만헤쎄의 데미안입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인간 본연의 양면성을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말을 곧 잘하곤 합니다.


작가프로필 ㅣ 곽정빈

저는 3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 1년간 세계여행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두 눈을 황홀하게 채우는 수많은 풍경들보다도 여태껏 가져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대면해야 했던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채워 왔습니다. 글을 쓸 때 비로소나 나 스스로가 나 다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희미해져만 갔던 나의 자아가 글을 쓰면서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된 제 인생의 2막에서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글을 써나가고자 합니다.



1.    아르누보 양식

독일인 지크프리트 빙이 1895년 파리에 문을 연 ‘메종 드 아르누보’라는 화랑 이름에서 유래하였고 ‘새로운 예술’이란 뜻을 의미하며, 1890~ 1910년 사이 유럽 각지와 미국, 남미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으로 유행한 양식이다. (프랑스,벨기에 : 아르누보, 미국,러시아 : 모던스타일, 독일 : 유겐트스틸, 오스트리아: 제체시온슈틸, 바르셀로나 : 모데르니스타, 이탈리아 : 스틸레리베르티) 하지만 단순 예술 양식이라기보다는 세기 전환기의 시대적 요구와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반영한일종의 예술운동이었다. 전통으로부터의 이탈, 자연주의, 자발성, 단순 및 기술적 완전을 이상으로 하였고, 미술과 생활의 통합, 즉 총체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

영국의 존 러스킨은 그의 저서 [베니스의 돌]에서 “모든 아름다운 미술작품은 의도적이든 우연적이든 자연의 형태를닮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예를 포함한 미술에서 기계적대량 생산을 거부하고 미술로서 사회 개혁을 부르짖은 러스킨의 디자인 개혁 운동은 그의 제자 윌리엄 모리스가 주도한 ‘미술 공예 운동”에 의해 더욱 구체화 되었다. 그것은 가구와 공예품은 기능에 적합한 재료의 사용과 정직한 구성으로 견고하고 실용적으로 제작되어야 하며, 또한 이를 통해 일상적 삶 속에서 미적 쾌락이 추구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수공예만을 고집한 모리스와 달리 아르누보 미술가들은 새로운 기계문화와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여 새 시대에 맞는양식으로 발전시켰다. 이들은 모든 역사적인 양식을 부정하고 자연 형태에서 모티프를 빌려 새로운 표현을얻고자 했는데, 오히려 디자인이 곡선, 곡면의 집적에 의한유동적인 미에 치중될수록 견고한 구축성이나 기능에 기초를 둔 합리성에 소홀하게 되어 탐미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장식으로 빠지게 될 위험도 컸다. 아르누보가 비교적 단명하게 된 이유를 여기서 보는 학설도 있다.

아르누보는 민족과 지역에 따라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산업과 과학의 발전으로 달라진 시대, 세기말 전환기의 시기를 맞이한 미술가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한 것은일체의 과거 양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양식의 필요성이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이 공유한 것은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고, 이를통해 이룬 미술이 곧 생활이 되는 것이었다. 벨기에와 프랑스, 독일의아르누보 미술가들은 고딕 부활, 미술공예 그리고 다른 복고적 경향들에서 유래된 요소들에 자연에서 추출한형태를 융합하여 당대에 새롭고 적합한 양식을 만들어 냈다. 여기에는 자연의 형태에서 비롯된 곡선 또는추상적인 선과 모티프로 디자인된 생활용품과 실내장식으로, 산업화된 대도시의 복잡함과 지저분함에 지친도시민들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도가 포함되었다.

경제적 제약(높은 비용)으로 인해 대중화에 실패하고, 과잉된 유미주의로 인한 매너리즘으로 단명한 예술사조라는 평을 듣지만, 반면에 이후 모더니즘으로 변화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는 의미에서 아르누보를 바라보는 관점도 있다. 이후 아르누보 양식은 1925년의 아르데코 양식으로 이어졌고, 20세기 후반 포스트 모더니즘에서도 그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2.    아르누보 예술가

1)    앙리 반 데 벨데(벨기에. 1863~1957)

아르누보 건축가와 디자이너들 중에 가장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미술가. 자유로운선과 유동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를 그 특징으로 했다. 초기에는 화가로써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고, 조르주 쇠라와 반고흐와 같은 후기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1800년 후반 존 러스킨의 사상과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의 이념을 알게 되고, 특히윌리엄 모리스의 Red House에 영감을 받아 반데벨데는 자신의 신혼집을 직접 브뤼셀 근처 위클에지었는데, 이것이 블루멘베르프 저택(Bloemenwerf House)이다. 이 집은 그의 디자인 이론을 입증하는 모델로, 창호, 가구, 카펫, 커튼에서부터식기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전통적인 형태의 모방에서 탈피해 합목적성이 있는 종합 디자인으로 완성한 것이다.












블루멘베르프 저택

(Bloemenwerf House)


▲ 블루멘베르프 저택 내부 촬영영상





▲ 크뢸러뮐러미술관 

반데벨데는 직선과 곡선을 유기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던 빅토르 오르타와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직선과 곡선을 사용하되 물체가 가진 구조적인 로직을 명확히 해야한다는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전형적인 아르누보 양식의 특징을 보이면서도 장식적이기보다는 구조적인 특성이 드러난다. 바이마르공예학교, 캉브르 장식예술연구소등을 창립하였고, 대표작으로는 네덜란드 오테를로의 크뢸러뮐러미술관(Kroller MullerMuseum)이 있다.

2)    빅토르 오르타(벨기에. 1861~1947)

헨트 예술학교에서 회화, 직물, 건축을전공했고 1878년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건축가 겸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1880년 아버지의 사망하면서 벨기에로 귀환했고 브뤼셀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레오폴 2세 국왕의 왕실 건축가로 근무하고있던 알퐁스 발라(Alphonse Balat)의 제자가 되었다. 발라는오르타와 함께 라켄 왕립 온실(Laeken)을 설계했는데 이 건축물은 오르타가 처음으로 강철, 유리를 소재로 설계한 건축물이다.







▲라켄 왕립 온실

1885년부터는 독립과 함께 3채의집을 직접 설계했다. 오르타는 공공 전축물 설계전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출품했으며 건축뿐만 아니라 조각상, 묘비 등 다양한 조각들을 설계했다. 오르타는 설계에서는 곡선을 주목했지만건축에서는 실용성을 중시했다. 특히 1892년 브뤼셀에 지어진타셀 저택은 식물을 소재로 한 유기적인 곡선 형상을 주철로 만들어 내부 장식에 사용한 것이 특징인 이 건축물은 유럽에서 최초로 아르누보 양식으로지어진 건축물이다














 ▲ Horta House















 ▲ Hotel Solvay


(저택 특징) 가장 이목을끄는 것은 계단이며 철로 제작된 계단기둥은 식물을 모방해 만들어졌는데, 철제 난간은 물결치듯 흐르는형태이며, 이런 형태는 벽의 덩굴무늬 그림과 바닥 모자이크의 덩굴무늬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나선형과 곡선은 아르누보의 주요 모티프로 영국의 맥머더 그리고 특히 삽화가 헤이우드 섬너Haywood Sumner와 같은 미술공예운동의 다른 화가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그러나 오르타가 보여준 선의 형태는 벨기에 특유의 것이다. 그것은이후 사람들이‘벨기에식 선’으로 명명한 긴장감 넘치고 추상화된장식이다. 그러나 오르타의 장식미술에서 발견된 것은 다른 아르누보 화가들처럼 식물의 잎이나 꽃이 아니라기둥과 줄기였다.

1913년 브뤼셀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었으며 후에 남작의 칭호까지받게 된다. 오르타 저택을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디자인과 단순한 라인의 세계로 돌아갔다.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과 다른 새로운 시도로서 아르누보 양식을 도입한 모더니즘의 창시자였으나 성숙기의 그의작품은 독특한 스타일과 혁신적인 시도가 아닌 보수적 전통주의에 몰두하면서 더 이상 혁신적인 작품을 설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건축물은 유럽 도처의 많은 현대적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자유미학과 같은 벨기에 아방가르드예술가 그룹의 심미적 이상에 영향을 주었다. 벨기에의 아르누보 건축의 기초 형태는 혁신적인 이상을 발생시켰으며, 식물적 형태와 감각적인 이중 곡선은 후에 ‘벨기에 선’으로 알려졌으며, 창문, 램프, 나무 가구 금속세공품, 문 손잡이와 심지어 초인종까지 색을 입히면서주요 구조물에서 전체 인테리어 장식요소에 이르기까지 빌딩의 모든 디테일이 개조되었다

3)    세뤼리에-보비(벨기에. 1858~1910)

앙리 반 데 벨데는 미술공예운동의 구성원들이 제작한 섬유, 벽지, 전등, 판화를 벨기에에 도입한 인물로 귀스타브 세뤼리에-보비Gustave Serrurier-Bovy(1858~1910)를꼽으며, 그가 영국 미술공예운동의 감성을 최초로 해석한 디자이너이고 자신과 빅토르 오르타가 그의 뒤를따랐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벨기에 남동부의 리에주Liege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영국 미술공예운동소속의 길드가 운영한 학교에 다닌 세뤼리에-보비는 가족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가구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 그는 1870년대에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 그리고 프랑스의 건축가외젠 에마뉘엘 비올레-르-뒤크Eugene Emmanuel Viollet-le-Duc(1814~1879)의 영향을 받았다.

1884년에 결혼 한 뒤 세뤼리에-보비는리에주에 실내장식을 제공하는 매장을 열었으며, 그곳에 연 두 번째 매장에서 자신이 제작한 가구와 일본양식의 공예품을 포함하여 리버티상사의 제품을 취급했다. 그는 자신의 가구공방에서 가구를 설계하고 제작했다. 1894년과 1895년에 자유미학에서 전시회를 열고, 1897년에는 브뤼셀 만국박람회의 콩고 전시관을 짓는 데 기여했다. 같은해에 그는 파리에 지점을 냈다.

세뤼리에-보비가 1899년경에제작한 마호가니 침대는 영국 미술공예운동의 중심인물로 서정성을 보여주는 패턴과 가구를 디자인한 찰스 프랜시스 앤슬리 보이지Charles Francis Annesley Voysey(1857~1941)의 떡갈나무로 제작한 <백조의자>와 <필기용책상>에 나타나는 형태의 단순성과 구조적 정직성을 갖추고 있지만,미술공예운동을 떠나서 과감하게 부르주아적 안락함이 배어나는 아르누보를 수용했음을 시사한다. 떡갈나무대신 마호가니를 사용한 것 자체가 사치스러움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이 점은 곡선적 덮개의 웅장한 형태와디자인된 꽃문양으로 장식된 패널에서도 확인된다. 이 침대는 파리 지점에 전시되었다. ‘가정 속의 미술 L'Art dans l'Habitation’로명명된 상점은 부르주아 가정의 방들로 이루어져 있어 1890년대에 디자인한 ‘장인의 방 Artisan's Room’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세뤼리에-보비와 르네 뒬롱ReneDulong이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은 식당인 청색관은 완벽한 아르누보 건축의드문 예 중 하나이다. 1890년대 후반과 1900년대에세뤼리에-보비의 가구는 초기작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고딕부활 양식과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에서 벗어나더 자유롭고 표현적인 아르누보 형태로 발전해갔다.
















 ▲ 세뤼리에 보뷔의 작품들


4)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

1852년 레우스(Reus)에서태어났으며, 부친과 모친은 주물 장인 집안이었다. 아버지는프랑스계 가우디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코르네트 가문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동판 장인이었는데, 가우디는 아버지가 구리냄비를 만드는 과정을 줄곧 지켜봐 왔다고 한다. 어렸을적부터 류마티스를 앓아 서있기도 힘들 정도여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한다. 이렇게 성적도 좋지 못하고몸도 허약했던 가우디는 어느 날 한 친구에게 자신의 그림실력을 인정받게 되고, 그것이 가우디가가 건축가의길을 걷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

바르셀로나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한 가우디는 25세에 건축사 자격을 딴후 시청 산하의 여러 프로젝트를 수주 받으면서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된다. 1888년 카사 비센스를 건축하기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그 후 카탈루냐의 명문가 코미야스 후작가의 별장을 건축하면서 가우디 평생의 후원자 에우세비오 구엘 백작을만나게 된다.

리고 1883년에는 구엘 가의 가문 건축가가 되었으며 이 시점부터 '구엘'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축물을 대대적으로 건축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메리카와 직물산업을 기반으로 한 구엘 가문의 무제한에 가까운 후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 와중에도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답게 다양한 수주가 들어왔으며 구엘 가문과 관련된 작품들외에도 다양한 건설작업을 하게 된다. 카사 바트요나 카사 밀라 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 CasaVicens








 ▲ CasaBattlo







▲ CasaMila












1918년부터는 평생 동안 설계한'성 가족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건설에매진했지만 이런저런 재정문제 등으로 끝을 보지 못하고 1926년 6월 7일 성당에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노면전차에 치여 치명상을 당했다. 운전사는지저분한 노숙자로 여기며 그를 길 옆에서 팽개치고 전차를 몰고 가버렸다.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고자택시를 찾았으나 꾀죄죄하게 입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3번이나 승차거부를 당한 끝에 경찰의 도움을 받아 4번째 운전사가 겨우 운전했지만 병원도 2곳이나 거부당해 할 수 없이빈민들이나 치료받는 열악한 시설을 가진 무상 병원에 놔두고 가버렸다. 신분을 증명할 게 없어 이 병원에서도방치되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이름을 말하자 비로소 병원 관계자들이 매우 놀라며 가우디의 친구들과 친척에게 연락했다.


















▲ 성가족 대성당


서둘러 달려온 그들이 어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지만 가우디는"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이 거지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주게 해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며그대로 남았고 결국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그를 죽게 만든 노면 전차 운전사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승차거부한택시 운전사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택시 운전사 3명과 그의 입원을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1926년 6월 12일 사실상 반(半)국장으로치러졌고 유해는 가우디가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았던 성 가족 대성당의 지하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다음과같은 묘비명이 묘석에 새겨졌다.

건축 성향은 카탈로니아 전통 복고주의 + 아르누보 정도로 대개 분류되지만, 그 자신의 다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취향과 건축주들의 다양한 요구를 소화시키려는 노력에 의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등등 서양 전통뿐만 아니라 인도, 이집트, 중국, 마야와 잉카, 역사이전의 석기시대 건축들, 오컬트 신비주의, 심지어 곤충이나식물등 동물들의 형태에서까지 모티브를 따와 건축물에 반영하면서, 그 이전이나 이후나 볼 수 없는 독특한건축물이 완성되었다. 거기에는 기존 서양건축에서 고전건축을 리바이벌할 때 나타나는 엄격한 절차나 규칙이무시되어 가우디만의 독특한 원칙에 의해 배치되었는데, 이건 사실 탈권위성이 강한 아르누보 예술의 특징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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